때는 바야흐로 1982년 10월 어느 날. 국민학교 1학년인 한 남자아이가 안방에 있던 14인치 텔레비전 앞에 앉아 OB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결승전을 보고 있다. 손에 땀을 쥐는 접전 끝에 9회 말 터진 OB 베어스 김유동 선수의 역전 만루 홈런(분명히 역전 홈런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며 기록을 뒤져보니 역전 홈런은 아니었다. 사람의 기억이란...). 이로써 OB 베어스는 한국 프로야구 첫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때의 감격을 잊지 못해 지금까지도 두산 베어스(전 OB 베어스)를 응원하고 있다는 전설이...
40여 년이 지났는데도 그날의 그 감동과 흥분은 쉽게 잊히지가 않는다. 어린 마음에 응원하는 팀이 우승하기를 간절히 빌며 TV를 보던 기억이 생생하기만 하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 국민학생이 되기 훨씬 전부터 야구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때는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이었는데도 TV에서 중계해주던 고교야구를 보며 야구에 대한 지식과 애정을 키워나갔다. 벽에다가 야구공을 던지며 “던졌습니다 쳤습니다~” 혼자 투수 타자 그리고 캐스터 역할을 번갈아 하기도 하며 야구선수 흉내를 낸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당시 다니던 국민학교에 야구부가 있어서 괜히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1982년. 배후에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프로야구가 생기게 되었고. 단지 어린 시절 집 근처에 OB맥주 회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엄마 손에 이끌려 그곳에 찾아가 어린이 회원에 등록하게 되는데... 그 해 가을 그 어린이 회원이 집에서 TV를 통해 첫 우승의 기쁨을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대학에 가서도 직장을 다니면서도 운 좋게 경기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함께 느낄 수 있었고 지금까지 베어스의 팬으로 살고 있다.
아빠들의 로망, 아이와 함께 야구장 가기
남자들의 대표적 로망이 아빠가 되어서 아들과 목욕탕 가는 거랑 아이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팀 옷 입혀서 함께 야구장 가는 거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집의 경우 딸이라서 목욕탕은 같이 가기 어렵지만 야구장이야 얼마든지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섣불리 데려갔다가 야구장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곳이란 인식이 박혀버릴 수도 있는 법. 그래서 야구와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위해 치밀한 작전을 세웠다. 경기장 가기 몇 달 전부터 조금씩 훈련 아닌 훈련을 시켰다고나 할까?
우선 야구라는 게 뭔지를 가르쳐야 했다. 야구라는 게 쉽게 말해 공을 던지면 방망이로 그 공을 때리는 거긴 한데... 야구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야구의 룰을 설명해본 적 있는 사람은 의외로 야구가 무척이나 복잡한 게임이란 걸 깨닫게 된다. 난 어렸을 때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그 복잡한 룰을 어떻게 알았을까? 여하튼 유치원생 아이를 붙잡고 삼진이란? 파울이란? 도루란? 뭐 그런 것들을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
우선 주말마다 거실에서 야구의 맛을 보여 주었다. 아이에게는 커다란 장난감 테니스채를 들게 하고 나는 집에 있는 것 중 제일 말랑말랑한 공을 골라 투수 인척 던지는 거다. 이때 아이가 치기 좋게 던지는 게 중요한데 사실 아이가 친다기보다는 아이가 들고 있는 배트(테니스채)에 최대한 가깝게 공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다 운 좋게 아이가 공을 때리면 “안타~” 좀 더 멀리 나가면 “홈런~” 맞히지 못하면 “스윙~” 이러면서 자연스럽게 야구의 기본 개념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TV 시청. 가끔씩 TV로 중계를 함께 보면서 두산 베어스가 우리 편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세뇌시켰다. “방금 공잡은 사람이 정수빈이야, 저 잘생긴 타자는 박건우야, 지금 올라온 투수는 유희관이야...” 반복적으로 아빠와 함께 잠깐씩이라도 경기를 보며 응원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두산 베어스는 우리 팀이라는 인식이 박히게 되었고 그 후엔 야구규칙이 정확하게 뭔지도 모르면서 두산이 이기면 기뻐하고 지면 기분 나빠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언젠가 가게 될 직관을 대비해 유튜브를 통해 각 선수들의 응원가도 예습해두었다.
드디어 딸과 함께 야구장에 가다
이 정도면 준비가 됐다 싶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야구장 나들이. 며칠 전부터 인터넷을 통해 두산 베어스 티셔츠를 커플 디자인으로 맞춰 주문해 놨다. 혹시나 아이가 지루해서 중간에 나가자고 할까 봐 본전 생각에 가장 저렴한 외야석으로 자리를 예매했다.
드디어 홈구장인 잠실야구장에 도착. 이해를 돕기 위해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최대한 아이 눈높이에서 맞춤 해설을 쉴 새 없이 해주었다. 야구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치킨 그리고 홈런볼 등 간식도 계속 사 먹이면서 야구장은 최대한 즐겁고 재밌는 곳이란 인식을 심어주려고 했다. 다른 걸 떠나서 햇살 좋은 어느 날, 탁 트인 야구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모여 선수들 플레이를 보며 응원하고 소리 지르고 흥겨운 음악에 치어리더 언니들의 신나는 율동도 보고 목청껏 응원가를 따라 부르고...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아이가 느낄만한 야구장의 매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비록 경기 중반을 넘어가며 엄마 무릎에 기대어 잠이 들긴 했지만, 그래서 경기가 끝나고 나서야 깨워서 집에 와야 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처음치고 장족의 발전.
그 뒤로 매해 여름이 지나고 나면 가끔씩 딸과 함께 옷을 맞춰 입고 야구장엘 다니고 있다. 왜 여름이 지나서냐고? 원래 두산팬들은 가을부터 야구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다. 다른 팀 팬들은 무슨 소린지 잘 이해 못해도 할 수 없다.
주변 야구팬들을 보면 내가 야구를 엄청 좋아하는 편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플레이오프 시즌이 시작되어야 야구에 관심을 갖고 챙겨볼 정도니까. 딸아이에게 야구를 가르치고 같은 팀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꼭 야구가 좋아서라기보다 딸과 함께 공유하고픈 추억거리를 만들고자 함이 큰 것 같다. 나중이 되어서 그 야구가 아빠와 딸의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대학생 딸이 아빠에게 야구장 한번 같이 가자고 먼저 얘기해줄 수도 있는 일이고.
오늘도 딸아이 학원을 데려다주는데 공터에서 어떤 아빠와 아들이 야구를 하며 노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던 딸의 뜻밖의 한 마디! "난 이제 야구 보기 싫어!" 아마도 최근 도쿄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야구팀이 졸전을 벌인 끝에 4위를 차지한 모습을 본 덕에 야구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일 거다. 그래도 찬바람이 불 때쯤에 한번 슬쩍 딸을 또 꼬셔봐야 할 거 같다
이번 주말에 아빠랑 야구장 갈까?
싫다고 하면 가서 치킨에 콜라도 사준다고 해야겠다. 곰인형 달린 머리띠도 하나 새로 사줘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