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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소설을 넘어선 건축의 설계도

by Jwook

만약 오늘 밤, 당신이 올려다본 하늘에 달이 하나 더 떠 있다면, 그것은 구원일까, 재앙일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는 그 한 줄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1984년과 거의 같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난 세계 — 바로 '1Q84년'.


스포츠 트레이너이자 암살자인 아오마메, 그리고 소설가 지망생인 수학 교사 덴고는 서로 다른 길 위에서 이 세계의 균열을 걷는다. '리틀 피플'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와 종교집단 '선구'의 어둠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향한 단 하나의 리듬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1Q84』는 단순한 서사나 연애가 아니다. 이 작품은 공간의 건축, 청각의 건축, 윤리의 건축이라는 세 개의 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조물이다. 그리고 그 구조 안에서 무라카미는 끊임없이 묻는다.

"이 건축의 최종 설계자는 누구인가?"


[스포일러 주의: 이 글은 작품의 주요 플롯과 결말을 포함합니다]


공간의 건축 — 감시당하는 자가 감시하는 역설


아오마메가 머무는 세이프하우스, 고층 아파트의 한 방. 이 공간은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 즉 현실의 질서에서 벗어난 '또 다른 장소'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일방향적 시선은 벤담의 파놉티콘을 역전시킨다. 감옥의 죄수가 간수를 관찰하는 구조. 아오마메는 보호받지만 동시에 갇혀 있고, 세계를 바라보지만 결코 닿을 수 없다.


텍스트는 이 역설을 집요하게 묘사한다. 그녀는 쌍안경으로 공원의 미끄럼틀을 관찰하지만, 그곳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시각은 있으되 청각은 차단된 이 공간에서, 아오마메는 세계의 관찰자인 동시에 세계로부터 추방된 자다. 그녀가 보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세계의 영상이며, 그 영상조차 '리틀 피플'이 통제하는 스크린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텍스트 전체를 감싼다.


한편 종교단체 '선구'의 시설은 오웰의 『1984』가 그린 전체주의를 종교적 형태로 재현한다. 그러나 무라카미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웰의 빅 브라더가 공포로 지배했다면, '선구'의 리더는 구원과 치유의 언어로 지배한다. "우리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공감의 문법이 폭력이 될 때,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자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선구'의 어린 소녀들이 경험한 성폭력이 "영적 각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장면에서, 무라카미는 도식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명확한 선을 긋는다. 이는 특정 종교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완벽함을 추구하는 모든 시스템이 품은 폭력성에 대한 경고다.


현대 기업의 '가족 같은 문화', 자기계발 담론의 '성장을 위한 고통' — 우리는 매일 작은 '선구' 안에서 살고 있다.


청각의 건축 —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기술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가 처음 울릴 때, 아오마메는 택시 안에 있다. 그녀는 "이 음악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고 느낀다. 실제로 그녀는 10살 때, 덴고와 같은 교실에서 이 곡을 함께 들었다. 그러나 소설은 이 사실을 즉각 밝히지 않는다. 대신 《신포니에타》는 두 인물의 장 사이를 오가며, 독자가 먼저 그 연결을 깨닫게 만든다. 음악은 서사의 배경이 아니라 서사 그 자체가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토르넬로를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구축하는 반복의 리듬"이라 정의했다. 새가 노래하며 자신의 영역을 만들듯, 아오마메와 덴고는 《신포니에타》라는 음악적 영토 안에서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리듬이다. 20년이 지난 후에도 같은 멜로디를 기억한다는 것 — 이것이 바로 무라카미가 말하는 사랑의 정의다.


서사 구조 역시 음악적으로 설계된다. 아오마메의 장과 덴고의 장이 교차하는 방식은 푸가(Fugue)의 형식을 닮았다. 하나의 주제(고독, 상실, 리틀 피플)가 제시되면, 다른 성부가 그것을 변주한다. 독자는 두 선율을 동시에 듣지 못한다. 페이지를 넘기며 교대로 듣다가, 어느 순간 두 멜로디가 하나의 화음으로 겹쳐졌음을 깨닫는다.


재즈곡 〈It's Only a Paper Moon〉의 가사는 이 구조를 요약한다. "종이로 만든 달도, 당신이 믿어준다면 진짜가 될 수 있어." 허구는 믿음으로 현실이 되고, 소설은 독자의 리듬으로 완성된다. 문학이란 결국 함께 부르는 노래가 아닐까?


윤리의 건축 — 불완전한 설계도 위에 서다


아오마메가 가정폭력 가해자의 목을 꺾을 때, 서사는 그녀를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 3권에서 그녀는 덴고를 기다리며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는지 끊임없이 자문한다. 이 순간 무라카미는 독자에게 판결을 넘긴다. 법은 살인이라 부를 것이고, 피해 여성들은 구원이라 부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덴고의 대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후카에리의 투박한 문장을 다듬어 문학상을 받게 만든다. 그러나 후카에리는 덴고에게 묻는다. "그 이야기는 이제 누구의 것이죠?" 덴고는 명확히 대답하지 못한다. 창조와 위조, 협업과 착취의 경계는 누가 결정하는가?


무라카미가 여성 인물을 다루는 방식 역시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아오마메는 강인한 암살자지만, 3권의 상당 부분을 세이프하우스에서 덴고를 기다리는 존재로 그려진다. 후카에리는 신비로운 매개자이지만, 그녀 자신의 욕망은 끝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작가의 한계일 수도 있고, 의도적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불완전함이 독자로 하여금 질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당신은 이 인물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늘의 두 개의 달은 이 모든 윤리적 혼란의 시각화다. 같은 하늘을 보고도 우리는 각자 다른 달을 본다. 알고리즘이 맞춤형 현실을 제공하는 이 시대에, 무라카미는 묻는다. "당신이 보는 달은 하나인가, 둘인가?"


'Q'는 Question, 즉 질문할 권리다. 무라카미는 답 대신 질문을 건네며 말한다. "이 설계도는 불완전하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당신이 건축가가 될 수 있다."

『1Q84』는 완성된 건축물이 아니라, 독자에게 열린 설계도다.

소설이 벽을 세운다면, 그 위에 지붕을 얹고 창문을 내는 것은 당신의 몫이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진 자리에서, 우리는 각자의 리듬으로 하늘을 짓는다.


그 하늘에는 언제나 두 개의 달이 뜬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계가 하나의 진실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여전히 질문할 수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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