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 루틴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의미
〈패터슨〉이 언어로 일상의 리듬을 기록했다면, 〈퍼펙트 데이즈〉는 그 리듬을 몸으로 살아내는 영화다. 짐 자무쉬의 도시가 '쓰는 공간'이었다면, 빔 벤더스의 도쿄는 '닦는 공간'이다.
두 영화는 모두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인간이 세계와 다시 연결되는 방식을 보여주지만, 벤더스는 여기에 시간의 층위를 더한다. 카세트 테이프가 돌아가는 아날로그의 시간과,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디지털의 시간 사이에서.
도쿄의 한 남자, 히라야마(코지 야쿠쇼). 그의 하루는 늘 같다. 새벽 햇살에 눈을 뜨고, 이불을 정돈하고,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에 루 리드의 "Perfect Day"나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건다. 자동판매기 'Boss' 커피를 마시며 밴을 몰고 시부야의 공공화장실로 향한다.
그는 화장실 청소부다. 'The Tokyo Toilet' — 안도 다다오, 쿠마 켄고, 반 시게루 같은 건축가들이 설계한 예술적 공공화장실을 하나씩 순회하며 닦는다. 변기를 닦고, 거울을 닦고, 타일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문지른다. 점심에는 늘 같은 공원 벤치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위를 올려다본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빛과 그림자의 '코모레비(木漏れ日)'를 컴팩트 필름 카메라에 담는다.
저녁이면 단골 목욕탕에서 하루를 씻어내고, 작은 이자카야에서 맥주 한 잔.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문고본 소설을 읽다 잠든다. 야스지로 오즈의 〈도쿄 이야기〉처럼 정적인 카메라 앞에서, 그의 하루는 완벽한 원을 그린다.
하지만 이 단조로운 원 안에는 무수한 차이가 숨어 있다. 매일 찍는 코모레비 사진들은 벽 한편에 콜라주처럼 쌓여가는데, 같은 나무의 같은 자리지만 빛의 각도와 잎사귀의 떨림은 매번 다르다. 히라야마는 안다. 어제의 빛과 오늘의 빛은 같지 않다는 것을.
이 완벽해 보이는 루틴에 균열을 만드는 것은 타인의 존재다. 수다스러운 동료 타카시는 히라야마의 침묵을 불편해하고, 갑작스레 찾아온 조카 니코는 그의 고립된 세계에 질문을 던진다. "삼촌은 왜 혼자 살아?" 니코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스미다 강변을 달리는 장면에서, 히라야마의 얼굴에 잠시 다른 표정이 스친다. 선택된 고독과 주어진 고독 사이의 미묘한 경계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특히 과거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여성과의 짧은 재회 장면은, 그의 현재가 어떤 과거의 선택 위에 서 있음을 암시한다. The Animals의 "House of the Rising Sun"이 흐르는 차 안에서 그가 보이는 복잡한 표정은, 단순한 만족이 아닌 체념과 수용이 뒤섞인 것이다.
벤더스는 카세트 테이프라는 오래된 매체를 통해 시간의 물질성을 강조한다. 히라야마가 매일 아침 테이프를 고르는 행위, A면이 끝나면 뒤집어야 하는 수고, 때로 엉키는 테이프를 연필로 감아야 하는 번거로움. 이 모든 것이 디지털 시대가 잃어버린 '과정의 시간'이다.
루 리드, 파우스트, 오티스 레딩, 패티 스미스 — 그가 듣는 음악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의 내면을 드러내는 창이다. 특히 영화 제목이기도 한 루 리드의 "Perfect Day"는 아이러니하게도 헤로인 중독에 관한 곡이다. 완벽한 하루란 환상일 수도 있다는 이중적 의미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히라야마의 청소 행위는 단순 노동을 넘어 일종의 명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벤더스는 이를 낭만화하지 않는다. 그의 허리는 굽어 있고, 손은 거칠며, 돈을 세며 계산하는 모습에서 경제적 현실이 드러난다. 일본의 '장인 정신'이나 '오모테나시' 문화로 포장될 수 있는 이 노동은, 실은 도시의 가장 낮은 곳에서 행해지는 고단한 서비스업이다.
그럼에도 히라야마가 자신의 일에서 찾아내는 의미는 진정성을 갖는다. 그것은 체념적 수용이 아니라 적극적 선택이다. 그는 노동 속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 안에서 세계를 감각한다. 이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천사가 인간의 감각을 갈망했던 것처럼, 벤더스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감각의 복원'과 맞닿아 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평범한 순간에 온다. 히라야마가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웃다가 울고, 다시 웃는 마지막 장면. 코지 야쿠쇼의 놀라운 연기는 대사 한마디 없이 인생 전체를 얼굴 위에 펼쳐낸다. 기쁨과 슬픔, 후회와 수용, 고독과 충만이 교차하는 이 표정은 '완벽한 하루'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낸다.
완벽한 하루란 완벽하게 행복한 하루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하루, 기쁨과 슬픔을 모두 품을 수 있는 하루다. 벤더스는 정적인 롱테이크와 자연광의 미세한 변화를 통해, 이 평범하면서도 숭고한 순간을 포착한다.
〈퍼펙트 데이즈〉는 속도의 시대에 던지는 조용한 저항이다. 더 많이 가지려 애쓰기보다, 지금 있는 것을 더 깊이 바라보라는 제안. 하지만 이것이 현실 도피나 체념은 아니다. 히라야마의 루틴은 자기 삶을 스스로 구축하는 능동적 행위이며, 그의 고독은 세계와 연결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영화가 끝나고 조용히 물방울이 바닥을 맴도는 소리가 들린다. 그 리듬은 우리를 다음 공간으로 이끈다. 이제 우리는 미술관으로 간다.
그림 앞에 멈춰 선 사람처럼, 아무 말 없이 무언가에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만나기 위해. 히라야마가 매일 올려다본 코모레비처럼,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무한한 차이를 발견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