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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작품 앞에서 마음을 열어두는 법

by Jwook
하루가 완벽할 수 있는 이유는, 그 하루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매번 같은 동선을 걸어도, 마음이 머무는 자리는 달라진다. 반복은 단조로움이 아니라, 감정이 새로 쌓이는 구조다. 그래서 다음 글은 ‘반복의 건축학’이자, 기억이 층을 이루는 또 하나의 공간 이야기다.

감정이 머무는 공간, 기억이 순환하는 길


“미술관에서 뭘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오늘 점심 후 커피를 마시며 동료가 꺼낸 말이었다. 그녀는 작품들이 너무 난해하고 뭐가 좋은 건지 모르겠다며, ‘제대로 감상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오히려 감상을 즐길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작품 앞에서 잠시, 아무 생각 없이 서 있어 보세요. 그저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심장이 미세하게 뛰거나, 발걸음이 멈추거나, 알 수 없는 한숨이 새어나올 수도 있어요. 그때 당신은 이미 작품과 연결된 거예요. 그게 전부예요.”


그 대화 이후, 나도 내가 미술관을 대하는 방식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에게 미술관은 ‘몰라도 괜찮지만, 알면 더 풍성해지는 곳’이다. 지식이 감상을 억압하는 공간이 아니라, 감정이 머무는 공간, 기억이 순환하는 길이어야 한다.


반복의 건축학: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나는 건축을 전공했다. 그래서 미술관에 가면 작품보다 먼저 공간의 구조에 눈이 간다. 전시실의 연속, 복도의 리듬, 계단의 순환. 그 반복적인 구조가 관람의 리듬을 만들고, 관람객의 경험을 통제한다. 미술관을 즐기는 가장 첫 번째 방법은, 건물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뉴욕의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설계한 달팽이 모양의 나선형 건축으로 유명하다.


관람객은 경사로(램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오며 작품을 감상하는데, 람프를 따라 경험하는 반복되는 원형의 리듬 덕분에 아래층에서 본 작품을 위층에서 다시 내려다볼 때, 같은 작품이 다른 시선과 맥락으로 다가오게 된다.


건물 자체가 관람객에게 '반복 감상'의 경험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사진: Unsplash의 Nicholas Ceglia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역시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유려한 디자인과 티타늄 외벽이 인상적이다. 티타늄 외벽은 시간대마다, 날씨마다 다른 색으로 반짝인다. 비 오는 날의 은빛, 맑은 날의 금빛, 저녁의 붉은빛.


공간은 건축가의 의도에 따라 기억을 새기고, 빛은 그것을 매번 새로운 색으로 덧입힌다.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사진: Unsplash의Slava Kuzminsky

미술관은 작품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감상의 무대이자 반복의 리듬이다. 우리가 미술관에서 멈춰 서는 순간은, 결국 작품과 공간이 빚어내는 빛과 기억의 교차점이다.


지식과 감정의 궤적: 건축과 미술이 겹치는 순간


물론 최소한의 지식은 감상의 문을 여는 열쇠다. 하지만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서양 미술사의 큰 흐름은 당대의 건축과 공간 관념의 변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어, 건축의 뼈대를 알면 미술이 훨씬 쉽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가 인간 중심의 완벽한 비례를 추구했을 때, 건축 역시 대칭, 비례, 기하학적 질서를 중시하며 이성 중심의 완벽한 공간을 구현했다. 회화의 원근법과 건축의 엄격한 기둥 배열은 하나의 궤를 같이하는 질서의 언어였다.


이후 19세기로 넘어와 인상주의 화가들이 찰나의 빛과 순간을 포착했을 때, 건축은 산업혁명으로 철과 유리라는 새로운 재료를 만나며 기존 건축에서 느낄 수 없었던 가볍고 비정형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모네가 포착한 유동적인 빛과 풍경은 에펠탑이나 수정궁 같은 새로운 철골 건축물에서 느끼는 파리 시민들의 새로운 시각적 경험과 궤를 같이한다. 미술관에서 만나는 작품은 그 시대가 공간과 빛을 해석한 방식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처럼 최소한의 뼈대만 이해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을 반복해 기억해두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름을 마음속으로 반복해 부르는 일은 낯섦을 친숙함으로 바꾸는 작은 의식이 되고, 그 이름이 감정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기억의 나선: 변한 작품이 아니라, 변해버린 자신을 마주하는 일


같은 작품을 반복해서 보는 일은 결국 변한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변해버린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다.

대전의 이응노미술관에서 이응노의 ‘군상’을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 안에서 나의 시간을 발견한다.


처음엔 그저 수많은 인물의 움직임이었지만, 두 번째는 인물들이 서로 기대며 버티는 모습이 보였고, 세 번째는 그 안의 ‘나’가 보였다. 삶의 무게를 나르며 어딘가로 걸어가는 군중 속에서, 나는 나의 일상과 겹쳐진다.

이응노 군상, <출처: 이응노미술관 소장품 (leeeungnomuseum.or.kr)>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연습이다. 같은 공간을 반복해 걷는 것은 낯설었던 예술을 일상의 리듬으로 만든다.


나는 종종 토요일 오전에 이응노미술관을 찾는다. 전시가 바뀌지 않아도 좋다. 같은 작품 앞에서, 같은 벤치에 앉아, 그날의 빛이 다르게 들어오는 걸 바라본다. 그 반복이 내 주말의 리듬을 만든다.


영원회귀의 리듬, 일상으로의 귀환


큐레이터 친구가 말했다. “사람들은 왜 같은 전시를 또 보냐고 하지만, 왜 한 번만 보고 다 안다고 생각할까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예술도, 사람도, 일상도 한 번으로는 다 보이지 않는다.


미술관이 내게 가르쳐준 건 단순하다. 새로운 것보다, 같은 것을 새롭게 보는 눈이 중요하다는 것.


미술관은 졸업하는 곳이 아니라 평생 다니는 학교다. 오늘의 나는 어제와 다르다. 반복과 기억의 리듬 속에서 우리는 매번 다른 사람이 되어 같은 자리에 선다. 그 작은 떨림이 쌓여, 삶의 결이 된다.


빛이 기울어지는 오후, 다시 찾은 전시장, 어제와 같은 자리. 하지만 오늘의 나는 어제와 다르다. 반복의 리듬은 그렇게 일상 속으로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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