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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라와 나오키가 그려낸 기억의 힘

20세기 소년이 내게 준 오사카행 티켓

by Jwook


어느날 밤, 나는 오래된 만화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이처럼 미래를 믿던 시절, 세상이 아직 낯설고 반짝이던 그 시절의 감정. 그때 떠오른 이름이 있었다 — 우라사와 나오키(浦沢直樹).

우라사와 나오키의 서사, 시대를 관통하다


나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팬이다. 처음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건 대학 시절, 만화방에서 라면을 먹으며 『몬스터』를 읽었을 때였다. 몇 시간을 몰입하게 만드는 대사와 서사. 그의 만화는 언제 읽어도 이야기의 밀도가 압도적이다. 『몬스터』, 『마스터 키튼』, 『20세기 소년』, 『플루토』— 장르를 넘나들며 인간의 심리를 파고들고, 작은 기억을 거대한 시대의 이야기로 확장해낸다.


특히 『플루토』는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을 리메이크한 작품인데, 최근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보며 또 한 번 놀랐다. 우라사와는 늘 개인의 작은 기억이 어떻게 시대의 기억으로, 거대한 역사적 서사로 변하는지를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은 『20세기 소년』이었다. 그 만화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2025년 오사카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20세기 소년〉 — 우라사와 나오키의 세대를 초월한 서사 어린 시절의 추억, 잊힌 약속, 그리고 인류의 미래를 뒤흔드는 음모

세 번의 엑스포, 하나의 약속


『20세기 소년』 속 주인공 켄지와 친구들이 가장 가고 싶어 했던 곳— 1970년 오사카 엑스포. 오카모토 다로의 ‘태양의 탑’ 아래, 전후 일본이 ‘미래’를 온몸으로 체험하던 순간이었다. 아이들에게 엑스포는 단순한 박람회가 아니라 “우리도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그들의 설렘을 읽으며 나는 깨달았다. 나에게도 그런 엑스포가 있었다. 1993년, 대전엑스포. 고등학생이던 나는 줄지어 파빌리온을 돌며 첨단 기술이 주는 경이로움을 처음 느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무대가 되어 세계와 연결되는 느낌. 그때의 벅참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켄지가 1970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내게는 너무나 익숙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55년이 지난 지금, 그 도시에서 다시 열리는 엑스포는 어떤 얼굴일까?

엑스포남문광장(엑스포시민광장) 방향으로 바라본 행사 당시의 풍경으로, 1993년 8월 7일(개장 당일)의 모습. 출처: 나무위키

2025 오사카 — 미래를 믿는 사람들


올봄, 나는 오사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건축가로서, 그리고 『20세기 소년』의 팬으로서.


비는 쏟아졌고, 입장 예약은 어려웠다. 결국 내부 관람은 포기하고 후지모토 소우가 설계한 거대한 목조 구조물 ‘그랜드 링(Grand Ring)’을 중심으로 둘러봤다. 지름 615m, 둘레 2km. 세계 최대 목조건축물이 일본 전통 누키(Nuki) 방식과 현대기술이 만나 “다양성 속의 통합”을 상징하고 있었다. 숫자로는 감이 오지 않던 스케일이, 비 속에서 압도적인 실재로 다가왔다.

거대 목구조물 "그랜드 링" 전경, 비가 유독 많이와서 날씨가 흐렸다. (출처: 저자)

그리고 그 옆, 17m의 실사 건담이 ‘GUNDAM NEXT FUTURE’ 파빌리온 앞에서 우주를 향해 손을 뻗은 포즈로 서 있었다. 1970년의 아이들이 로봇을 보며 꿈꾸던 미래가 이제는 현실이 된 듯했다.

만화에서 보던 건담을 17m 크기로 만들었다. 건담 팬이라면 엑스포 끝나기 전에 방문을 추천한다. (출처: 저자)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관람객이었다. 지하철에서 엑스포장까지 이어진 긴 통로, 끝없는 행렬의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 그들은 줄을 서며 묵묵히 기다렸다. 파빌리온 하나를 보기 위해 몇 시간을 서 있어도 불평이 없었다. 그들은 ‘기다림’ 자체를 엑스포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래를 함께 기다리는 경험, 그 자체가 일본인에게는 아직 살아 있는 문화였다.


조급해진 우리와 집단적 상상력의 상실


반면 우리는 1993년 이후, ‘엑스포’라는 말을 거의 잊었다. 개인의 성공은 남았지만, 국가가 함께 미래를 상상하던 감각은 사라졌다. 정권이 바뀌면 비전도 바뀌고, 효율만 남은 사회에서 우리는 ‘함께 기다리는 법’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1970년 오사카 엑스포의 주제는 ‘인류의 진보와 조화’였다. 하지만 2025년의 주제는 ‘생명의 빛나는 미래 사회 디자인’이다. 55년 사이에 ‘진보’는 사라지고 ‘생명’이 들어왔다. 정복과 성장의 서사 대신, 공존과 지속가능성의 시대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엑스포의 형식은 변하지 않았다. 각국의 파빌리온, 줄을 서는 사람들, 미래를 함께 상상하는 그 경험. 엑스포는 여전히 ‘미래를 집단적으로 경험하는 장치’였다.

지하철역에서 오사카 엑스포로 이어지는 통로, 수많은 일본인들 (출처: 저자)

마무리 — 다시 피어날 약속을 기다리며


『20세기 소년』의 1970년, 나의 1993년, 그리고 지금의 2025년 오사카. 세 시점이 한 선으로 이어졌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말하듯, 개인의 기억은 결국 시대의 기억과 겹쳐진다. 켄지의 1970년이 나의 1993년과 만나고, 그것이 다시 2025년의 비 속에서 되살아났다. 미래를 함께 꿈꾸던 감정, 도시가 세계의 중심이 되던 자부심, 그 모든 것이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었다.

그랜드링에서 내려다 본 2025년 오사카 엑스포 풍경 (출처: 필자)

비가 내리던 오사카 엑스포의 마지막 날, 나는 그랜드 링 아래서 깨달았다. 엑스포의 본질은 눈부신 기술이 아니라,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며 미래를 함께 기다리는 집단적 상상력 그 자체라는 것을.

유독 이날 비가 너무 많이 왔다. 오사카 엑스포 멘홀 뚜껑/마스코트 먀쿠먀쿠 (출처: 필자)

빈땅은 스스로 빈 채로 있지 않는다. 언젠가 그 자리에도 '미래를 믿던 아이들'의 새로운 약속이 다시 피어나길 바라며, 나는 그 오랜 기다림의 리듬을 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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