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환상의 경계에서 인간을 지탱하는 것들
이 책은 ‘왜 우리는 노른자를 지키려 하는가’에 대한 사유의 기록이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정에서 출발해, 관계의 거리와 감각의 회복, 기억의 반복과 일상의 리듬으로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나는 묻는다 — 무너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쥐는 것은 무엇인가.
그 믿음이 환상일지라도, 그 손끝의 온도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한 환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달걀 프라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언제나 토스트 한 조각을 들고 다녔다.
노른자가 흘러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단순한 장면은 우스꽝스럽지만, 거기엔 진실이 있다.
그에게 토스트는 빵이 아니라 존재의 기둥이었다. 자신이 부서지지 않기 위해 붙잡은 최소한의 믿음.
우리는 모두 그와 같다. 사랑이든, 관계든, 신념이든, 우리에게도 흘러내리지 않게 붙잡은 무언가가 있다.
삶의 균열은 언제나 말할 수 없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감정이 언어를 앞질러 터져나올 때, 우리는 그 틈을 메우기 위해 토스트를 든다.
‘나는 괜찮다’, ‘이 또한 지나간다’ 같은 자기 암시들이 사유의 첫 장을 대신 쓴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반대편을 향한다. 감정을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 감정이 생기는 이유를 바라보는 일.
그것이 사유의 시작이자,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는 첫 리듬이다.
‘나는 너를 이해해.’ 이 말은 때로 위로보다 폭력적이다. 아렌트가 말한 ‘판단’이란 옳고 그름이 아니라, 타인의 자리를 상상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완벽한 공감 대신, 서로를 지켜보는 거리의 윤리 속에서 살아간다.
너무 가까우면 타인을 소멸시키고, 너무 멀면 냉담해진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내미는 모든 말과 침묵은 그 거리의 조율이다. 토스트를 쥔 손처럼, 관계는 늘 떨리는 균형 위에 있다.
줌토르의 건축은 눈으로 보는 공간이 아니라, 피부로 느껴지는 세계다.
메를로퐁티가 말한 ‘살(la chair)’처럼 우리는 세계를 만지고, 세계는 우리를 만진다.
이 감각의 교차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노른자’의 또 다른 얼굴이다.
도시는 감각을 잃었고, 사람들은 관계를 잃었지만, 몸만큼은 아직 세계를 기억한다.
빛, 온도, 공기, 냄새, 질감 — 그 미세한 감각들이 삶을 다시 붙잡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느끼기 위해 지킨다.
기억은 언제나 반복의 형태로 돌아온다. 들뢰즈의 말처럼, 진짜 생성은 폭발이 아니라 느린 차이의 축적 속에서 일어난다.
같은 날, 같은 길, 같은 말이 반복될 때 그 안에서만 미세한 변화가 생긴다.
삶은 완벽한 직선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는 파동이다. 그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다시 세운다.
지키는 일과 허무는 일은 대립이 아니라 같은 원의 양쪽 끝이다.
지켜야 하는 이유를 모를 때, 허물어야 할 이유가 태어난다.
도시농업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비워둔 자리는 반드시 채워진다.
돌보지 않으면 잡초가 자라듯, 돌보지 않은 마음에도 무언가 자란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지킨다. 삶이 흩어지지 않도록,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지만 때로는 그 자리를 일부러 비워둘 용기도 필요하다.
흙을 뒤집어야 새 싹이 나듯, 믿음을 허물어야 새로운 리듬이 태어난다.
우리가 지키는 모든 것은 언젠가 허물어져야 한다. 허물어지는 순간, 비로소 다음 계절이 온다.
우리는 모두 토스트를 들고 산다. 그건 단순한 믿음의 상징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본능의 형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노른자를 지키는 일은 그 노른자를 결국 흘려보내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믿음을 쥔 손은 언젠가 떨릴 것이고, 그 손을 놓을 때, 비로소 진짜 삶이 시작된다.
이 책이 기록한 모든 사유는 결국 여기에 닿는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관계로,
관계는 감각으로,
감각은 기억으로,
기억은 일상으로,
그리고 일상은 믿음으로 이어진다.
그 순환 속에서 우리는 수없이 무너지고 다시 선다.
지키는 일과 허무는 일은 다르지 않다.
그 둘이 반복되며, 우리를 사람으로 만든다.
우리는 왜 노른자를 지키려 하는가? 그것이 바로 살아 있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노른자를 흘려보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가, 새로운 믿음이, 다시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
이 책은 그 순환의 기록이다. 지키고, 허물고, 또다시 살아내는 인간의 온도. 그 온도 속에서, 나는 여전히 사유의 손끝으로 세상을 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