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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Sep 21. 2020

인생은 살이 쪘을 때와 뺐을 때로 나뉜다.

심각한 오류를 발견했다.

한 손에는 망고 오렌지 주스를 들고 길을 걷고 있었다. 20년은 족히 더 되어 보이는 허름한 건물 현관 유리 위에 적힌 표어 하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인생은 살이 쪘을 때와 뺐을 때로 나뉜다.’
 
문구가 강렬했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보니 헬스장이었다. 관장이 적었는지, 직원이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 같은 중년 아재의 관심을 끌었으니 반은 성공했다. 설탕 덩어리 주스를 잡은 오른손이 마구 흔들렸다. 그 진동의 여파로 뱃살도 덩달아 춤을 추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살이 급속도로 늘었다. 원래도 살이 잘 찌는 체질인데, 점심때 꾸준히 했던 탁구도 장소 자체가 폐쇄되었다. 일 특성상 온종일 의자에 앉아있다 보니 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목욕탕에 가지 못하니 체중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살을 빼야지 하면서도 퇴근하고 집에 오면 냉장고 안에 넣어 둔 맥주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시원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그 달콤 씁쓰름한 맛을 어찌 거부 하리오. 거기다 케첩을 가득 품은 소시지 야채볶음과 함께라면 지금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지 않을까. 이미 부을 때로 부은 배를 부여잡고 꿀잠 속으로 빠진다.
 
주말에 저녁을 먹는데, 아내가 내 얼굴을 보더니 한마디 했다.
 
“오빠. 얼굴에 달이 떴네.”
 
그 말은 내 폐부를 찔렀다. 밥을 다 먹고 화장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오. 마이 갓. 큰일이다. 그대로 운동복을 갈아입고 안양천으로 향했다.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뛰기 좋은 날이었다. 이미 많은 인파가 마스크를 쓴 채 운동하고 있었다. 스마트 워치를 ‘러닝’ 상태로 설정하고 운동장을 뛰었다. 한 바퀴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두 바퀴부터 그간 찐 내 살들이 반격을 시작했다.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에 숨이 막히도록 폐에 공기를 주입하고,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가득 담았다. 아. 안 되는데. 발은 내딛는데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수시로 방향을 이탈했다. 땀은 비 오듯 떨어졌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할 수 있어. 소 되새김질한 듯 맘속으로 되뇌었다. 결국, 뛰기 반, 기기 반으로 목표했던 바퀴를 채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눈과 발이 모두 풀렸다.
 
이 지긋지긋 한 찜과 빠짐의 반복은 언제쯤 끝날까. 20대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근 20년이 넘었다. 그냥 평소에 덜먹고 꾸준히 운동하면 안 되는가. 이 단순한 논리가 나에게는 왜 이리 어려운지.
 
내 삶에 비추어 헬스장 표어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발견했다.
 
‘인생은 살찔 때와 빠질 때 그 중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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