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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현 Jan 10. 2022

예쁘게 꾸며 쓴 우울

우울했던 이야기도 읽어 주시나요?



  갑자기 워드를 켜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글을 쓰고 싶다, 언젠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은 가득했지만 섣불리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완벽하게 완성 지을 자신이 없으니,  발도 내딛지 않겠다는 비겁한 태도입니다. 저의 많은 부분 중에 가장 싫어하는 부분이고, 고치고 싶어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냥 쓰기로 했습니다. ‘그냥’이라는 말이 잘 어울립니다. 이런 글도 읽어 주실지 궁금합니다만, 그걸 알기 위해서는 ‘그냥’ 쓰기 시작하는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울과 부정적인 생각의 팽배, 제 진단서에 나와 있는 말입니다. 이제는 그걸 지우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그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 의미를 찾아가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무언가 몰두하고 집중해 있는 시간, 그 오므려진 미간이, 오랜 집중 끝에 살짝 지끈대는 머리의 통증이 좋아졌습니다. 모두 그런 게 하나씩은 있으시겠지요. 삶에서 좋아하는 시간. 명상과도 같은, 나의 고통을 잠시나마 끊어주는 그런 시간 말입니다. 그게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는 깨달음이 새삼스럽게도 들었습니다.


  첫 기억은 아마 초등학생 때, 또래보다 글씨와 글을 잘 쓰는 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국어 성적도 좋았고, 무엇보다 그 시절 책을 참 좋아했습니다. 책도 좋아했지만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 시키셨던 6가지 독후감 형식과 그에 따라 지급되던 인센티브(…)가 저에게는 참 매혹적인 조건이었고, 그 수집욕과 열정에 불을 지피게 된 것이지요. 1년 간 200권이 넘는 책을 읽었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분량이지만, 당시 조금 급하게 독후감이 필요할 때면 나이에 맞지 않는 얄팍한 동화책으로 몰래 검은손을 뻗던 어린 꼼수를 생각해보면 가능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주 그러진 않았습니다. 맹세코.) 그 덕분에 지금도 글을 읽고, 쓰고, 말하는 일에 크게 어려움을 겪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말을 너무 잘해서 사기꾼 같다는 소리를 들을 지언 정 말입니다.


  그러다가 열두 살쯤 인터넷 소설에 빠졌습니다. 처음 친구가 MP3에 담아준 txt 파일로 된 인터넷 소설 한 두 편을 읽고 그 불닭면보다 자극적인 맛에 어린 감수성은 속절없이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그 뒤로 중학생 무렵까지 1000편에 가까운 인터넷 소설을 섭렵했습니다. 새벽 나절이 되도록 이불속에서 몰래 읽어댔는데 아직 시력이 좋고 가벼운 난시만 있다는 사실은 하늘에 감사할 일입니다. 아마 그때 인터넷 소설에 빠지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2~3센티는 키가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키와, 문학적 능력을 맞바꾼 것이지요. 이걸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는 대체 뭐와 키를 맞바꾼 게 되는 걸까 궁금해지고 씁쓸해지는 밤입니다. 그 소설들 속에는 멋지고 예쁜 사람들이 많이도 나왔습니다.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일진짱에 가슴 설레 하던 수많은 9n년생 소녀들은 분명 공감할 겁니다. 그리고 최근 스물일곱 어느 날 친구와 대화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했던 성교육이 아니라 인터넷 소설에서 처음으로 성에 대해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학교에서 받은 성교육은 정말 겉핥기식에 불과한 교육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인터넷 소설에서 저희는 배운 것입니다. 5~10살 많은 언니들의 경험(?)과 지식(??)을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나누며 얼마나 공감하고 웃었는지 모릅니다. 야, 우리 다 그걸로 배웠잖아.


  그렇게 인터넷 소설을 통해 환상을 가진 채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저는 공고의 전기과를 나왔습니다만, 그곳에 잘생긴 일진짱 같은 건 없었고 로맨틱한 러브스토리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냥 전선과, 전선관, 회로도가 있었을 뿐입니다. 당시 마이스터고라고 해서 이명박 정권에서 밀었던 그 정책의 수혜자입니다. 미스터 리… 그에게 유일하게 감사하는 점입니다. 일반 공고와는 달리 마이스터 고등학교는 100% 취업을 목표로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능이 아닌, 취업을 위한 교육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의 적성이 발휘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PPT 발표와 자기소개서에서 말입니다. 초등학교 때 사탕 몇 개 더 먹고자 부렸던 동화책 꼼수와 중학교 때 열성으로 읽었던 인터넷 소설이 저의 자기소개서를 하드 캐리 해서 지금 다니는 회사 특채에 합격하게 해 줄 줄은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언어의 힘이란 참 신비한 것입니다. 아무리 단순하고 흥밋거리인 글마저도 언어 능력을 향상해 준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 방증으로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께서 토론 수업 직후에 반 친구들에게 저를 향해 “저런 애 조심해야 한다. 딱 사기꾼 스타일이다. 저렇게 말을 잘하는 것 좀 봐라.” 하는 칭찬인 듯 욕인 듯 칭찬 같은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습니다.


  서론이 참 길었지만 결론은, 저는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우울한 이야기도 그 근본에 있지만 귀 기울여 들어봐 주신다면 우울해지지 않게, 즐겁게 해 드려 보겠습니다. 즐거운 글을 쓰는 게 제 특기이고 우울해하기가 취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읽어 주신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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