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했던 이야기도 읽어 주시나요?
갑자기 워드를 켜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글을 쓰고 싶다는, 언젠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은 가득했지만 섣불리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완벽하게 완성 지을 자신이 없으니, 한 발도 내딛지 않겠다는 비겁한 태도입니다. 저의 많은 부분 중에 가장 싫어하는 부분이고, 고치고 싶어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냥 쓰기로 했습니다. ‘그냥’이라는 말이 잘 어울립니다. 이런 글도 읽어 주실지 궁금합니다만, 그걸 알기 위해서는 ‘그냥’ 쓰기 시작하는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울과 부정적인 생각의 팽배, 제 진단서에 나와 있는 말입니다. 이제는 그걸 지우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그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 의미를 찾아가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무언가 몰두하고 집중해 있는 시간, 그 오므려진 미간이, 오랜 집중 끝에 살짝 지끈대는 머리의 통증이 좋아졌습니다. 모두 그런 게 하나씩은 있으시겠지요. 삶에서 좋아하는 시간. 명상과도 같은, 나의 고통을 잠시나마 끊어주는 그런 시간 말입니다. 그게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는 깨달음이 새삼스럽게도 들었습니다.
첫 기억은 아마 초등학생 때, 또래보다 글씨와 글을 잘 쓰는 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국어 성적도 좋았고, 무엇보다 그 시절 책을 참 좋아했습니다. 책도 좋아했지만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 시키셨던 6가지 독후감 형식과 그에 따라 지급되던 인센티브(…)가 저에게는 참 매혹적인 조건이었고, 그 수집욕과 열정에 불을 지피게 된 것이지요. 1년 간 200권이 넘는 책을 읽었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분량이지만, 당시 조금 급하게 독후감이 필요할 때면 나이에 맞지 않는 얄팍한 동화책으로 몰래 검은손을 뻗던 어린 꼼수를 생각해보면 가능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주 그러진 않았습니다. 맹세코.) 그 덕분에 지금도 글을 읽고, 쓰고, 말하는 일에 크게 어려움을 겪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말을 너무 잘해서 사기꾼 같다는 소리를 들을 지언 정 말입니다.
그러다가 열두 살쯤 인터넷 소설에 빠졌습니다. 처음 친구가 MP3에 담아준 txt 파일로 된 인터넷 소설 한 두 편을 읽고 그 불닭면보다 자극적인 맛에 어린 감수성은 속절없이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그 뒤로 중학생 무렵까지 1000편에 가까운 인터넷 소설을 섭렵했습니다. 새벽 나절이 되도록 이불속에서 몰래 읽어댔는데 아직 시력이 좋고 가벼운 난시만 있다는 사실은 하늘에 감사할 일입니다. 아마 그때 인터넷 소설에 빠지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2~3센티는 키가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키와, 문학적 능력을 맞바꾼 것이지요. 이걸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는 대체 뭐와 키를 맞바꾼 게 되는 걸까 궁금해지고 씁쓸해지는 밤입니다. 그 소설들 속에는 멋지고 예쁜 사람들이 많이도 나왔습니다.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일진짱에 가슴 설레 하던 수많은 9n년생 소녀들은 분명 공감할 겁니다. 그리고 최근 스물일곱 어느 날 친구와 대화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했던 성교육이 아니라 인터넷 소설에서 처음으로 성에 대해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학교에서 받은 성교육은 정말 겉핥기식에 불과한 교육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인터넷 소설에서 저희는 배운 것입니다. 5~10살 많은 언니들의 경험(?)과 지식(??)을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나누며 얼마나 공감하고 웃었는지 모릅니다. 야, 우리 다 그걸로 배웠잖아.
그렇게 인터넷 소설을 통해 환상을 가진 채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저는 공고의 전기과를 나왔습니다만, 그곳에 잘생긴 일진짱 같은 건 없었고 로맨틱한 러브스토리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냥 전선과, 전선관, 회로도가 있었을 뿐입니다. 당시 마이스터고라고 해서 이명박 정권에서 밀었던 그 정책의 수혜자입니다. 미스터 리… 그에게 유일하게 감사하는 점입니다. 일반 공고와는 달리 마이스터 고등학교는 100% 취업을 목표로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능이 아닌, 취업을 위한 교육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의 적성이 발휘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PPT 발표와 자기소개서에서 말입니다. 초등학교 때 사탕 몇 개 더 먹고자 부렸던 동화책 꼼수와 중학교 때 열성으로 읽었던 인터넷 소설이 저의 자기소개서를 하드 캐리 해서 지금 다니는 회사 특채에 합격하게 해 줄 줄은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언어의 힘이란 참 신비한 것입니다. 아무리 단순하고 흥밋거리인 글마저도 언어 능력을 향상해 준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 방증으로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께서 토론 수업 직후에 반 친구들에게 저를 향해 “저런 애 조심해야 한다. 딱 사기꾼 스타일이다. 저렇게 말을 잘하는 것 좀 봐라.” 하는 칭찬인 듯 욕인 듯 칭찬 같은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습니다.
서론이 참 길었지만 결론은, 저는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우울한 이야기도 그 근본에 있지만 귀 기울여 들어봐 주신다면 우울해지지 않게, 즐겁게 해 드려 보겠습니다. 즐거운 글을 쓰는 게 제 특기이고 우울해하기가 취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읽어 주신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