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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Aug 27. 2024

나는 아침마다 편지를 찢는다

경찰관, 소방관, 선생님.....



도면을 그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식은 땀이 난 걸 보니 악몽이다. 대충 세수를 하고 오니 너저분한 책상 위에 상아색 종이 하나가 눈에 띈다. 이제 기억났다. 서늘한 악몽의 근원.     


  

    아저씨는 절대 안 구해줄 거예요.               
                         - 미래 소방관 -



다시 읽어 봐도 황당한 말이다. 우리나라에 소방관이 너 하나냐. 소방관은 공무원이고 공무원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단다. 하여간 뭘 모르는 초딩이 쓴 글 수준은 한심하다. 이딴 편지는 습자지를 자르듯 가볍게 찢어버린다.


누구한테 말하기 뭐하지만, 요즘 내 아침루틴은 아침마다 편지를 찢는 것이다. 이틀 전에는 경찰관이 보낸 편지를 찢었고 어제는 선생님의 편지를 찢었다. 오늘은 소방관이다. 슬슬 과학이나 건축 또는 예술계도 나올 법도 한데 어째 죄다 공무원들이다. 대체 나라가 어떻게 되려는 거야. 도전정신과 무게감 없는 편지를 찢는 마음은 깃털처럼 가볍다.


여러 번 찢어 날가루가 된 종이를 내 공간에 두는 게 싫어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간다. 우리 가게 옆 건물 술집 주인이 내놓은 주황색 쓰레기봉투가 보인다. 꼼꼼하지 못한 술집 주인처럼 빈 공간이 보여 그곳에 슬쩍 털어 넣는다. 이 쓸데없는 편지가 술집 손님들이 먹고 버린 지저분한 것들과 섞여 썩어버리길 바라며.


등을 돌려 다시 가게 쪽으로 가는데 손끝에서 끈적임이 느껴졌다. 아이 씨. 잘 넣는다고 넣었는데. 주머니에서 물티슈를 꺼내 정체 모를 액체를 닦아낸다. 아침부터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더러워진 기분은 뒷걸음질 몇 번으로 깨끗이 사라진다. 한 발짝 두 발짝 멀어지면 눈앞에 서서히 들어오는 간판과 외관.  

The Block. 나는, 이 완벽한 카페의 사장이다.     


오직 내가 추구하는 건 검이불루 화이불치 (儉而不陋 華而不侈)였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것. 하지만 5년 간 다닌 건축사무소에서 한 일이라고는 사치스런 대형공간을 꾸미는 것 뿐이었다. 최대한 사람들을 모으고 효율적으로 쇼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대놓고 소비를 지향하진 않아야 하므로 중앙에는 항상 도서관을 뒀다. 책을 읽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사진을 찍는 스팟이 되어야 하므로 도서관 한 가운데에는 높은 조형물과 핀 조명을 뒀다. 이건 건축이 아니라 기만이었다.


무엇보다 건축사무소를 그만 둔 건 인간관계 때문이었다. 뻔한 이야기다. 건축보다는 사람이 힘들어서 그만 둔다는 것. 퇴사한 직장인 클리셰에 빠지고 싶지 않았지만 나도 평범한 인간이었다. 다행히 대기업이 모회사인 건축사무소라 퇴직금은 두둑히 챙겼다. 1인 건축사무소 개업을 준비하는 도중 무작정 쉬면 괜히 불안할 것 같아 퇴직금으로 해보고 싶었던 일에 도전하기로 했다. 바로 내가 인테리어를 한 카페를 여는 것. 나로 인한, 나만을 위한, 나를 위한 공간과 향기로운 커피가 맴도는 아늑한 공간을 상상하며 카페 창업을 준비했다.   


녹담동은 딱 내가 원하는 곳이었다. 적당한 카페거리가 형성되어 있어 유동인구가 있는데다 대중교통과 거리가 있어 복잡하지 않았다. 카페를 처음 꾸밀 때 컨설턴트는 입주한 건물의 파벽놀 느낌을 살려 내부도 벽돌로 인테리어를 하고 가구는 원목으로 하길 추천했지만 결국 타일을 선택했다. 나무와 달리 타일은 습기와 온도변화에도 잘 변하지 않아 혼자 관리하는데 더 수월했다.


게다가 크래프트, MDF라면 지긋지긋한 건축 인생 아닌가. 동네 특유의 고즈넉하고 따뜻한 분위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카페 안에 들어왔을 때 다른 세계에 온 느낌을 받고 싶었다.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어지러운 시간이 이 공간 안에서 완벽하게 잊혀지길 바라며.


아침에 커피머신 세팅을 마치고 오픈 준비를 끝나면 마지막 의식을 치룬다. 가게 구석에 둔 나무 간판 2개를 가게 앞마당에 좌우로 진열하는 것. 간판에는 진지하고 엄숙한 글씨체로 같은 문장이 써있다.

ㅡ No kids, On the block. 어린이의 입장이 불가합니다.


내 카페는 노키즈존이다. 13살 이하 어린이들은 내 공간에 들어올 수 없다. 영국에서 공수해온 빅벤모양의 시계나 뉴욕에서 통관을 세 번씩 하며 들여온 블루클린 브릿지 모형을 아이들이 망가트릴 까봐 그런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그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가끔 손님들 중에서는 노키즈존이라 매출이 떨어질 것을 걱정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건 나의 선택이라 감수하면 된다. 아이들이나 부모들의 매출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매출보다 더 중요한 건 내 공간을 지키는 일이다. 잔잔한 음악을 배경삼아 평온한 자세로 점잖은 대화를 하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이니까.


다만 하나 거슬리는 건 같은 건물에 피아노학원과 미술학원이 있다는 점이다. 이 건물에 들어올 때만 해도 피아노 학원 하나였는데 카페 오픈 후에 미술학원이 추가로 들어왔다. 초기보다 초등학생들이 발길이 늘어서 하교시간이 되면 적잖은 아이들이 유리창 너머 보였다.


몇몇 아이들은 카페 안에 있는 조형물에 관심을 보이는 듯 했지만 그럴 때마다 최대한의 혐오를 담아 아이들을 노려봤다. 아이들도 눈치가 있는지 카페입구를 피해 계단 쪽으로만 학원을 다녔다. 역시 인간은 초장부터 강하게 나가야하는 게 맞는데. 그걸 못해서 지금 이렇게 혼자 있지만. 조금 쓸쓸할 때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평탄한 녹담동 카페사장 생활이었다.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그 전화와 함께 아침마다 초등학생들에게 협박편지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시드니입니다. 지금부터 1화입니다. 총 12화 예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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