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그의 입원 날이다
3주에 한 번씩 입원하는 A 씨의 입원 날이 내일이다. 항암화학요법을 하기 위해 입원하는 것이다. 그는 지난 4월에 암을 진단받았으나 이미 말기였고, 그래도 후회가 되지 않도록 치료를 결정하였다.
이미 진단 전부터 잘 먹지 못하고 몸무게는 30kg대 밖에 되지 않았던 그는 첫 입원 당일부터 배우자가 매우 지극정성으로 케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지극정성은 입원을 *겨우 세 번 밖에 하지 않았지만 환자도 피곤하고 본인도 피곤하며 간호사들에게는 매우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입원은 입원예정일 보다 1주일 먼저 응급실을 통해서였다. 먹기만 하면 음식이든, 물이든 도로 나와 집에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CT상 위-식도의 협착으로 음식물이 다음의 소화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으로 보여 내시경적 시술-stent삽입술-을 시행했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 먹게 되었고 두 번째 항암화학요법을 진행하였으며 퇴원이 결정되었다. 퇴원이 결정되면 간호사들은 환자, 보호자에게 필요한 서류가 있는지 확인한다. 보험회사에 제출하여 치료비 지원을 받기 위해 필요할 수도 있고, 다른 병원을 가게 될 경우에 그곳에 제출해야 할 서류가 필요할 수도 있다.
A 씨는 진단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서류를 찾기 위한 신청서에 서명을 받고 내일 집에 가기 직전에 서류를 달라고 하면 매우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니 혹시 더 필요한 서류가 없는지 물었다.
A 씨의 배우자는 대답도 없이 서류 신청서를 내 손에서 낚아채더니 다른 한 손의 볼펜도 달라는 듯 말도 없이 손만 내민다. 그리고서는 넘겨 받은 펜으로 [수술기록지]에 체크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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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분, 환자분은 수술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시술기록지를 가져가셔야 돼요."
"보험회사에서 수술기록지 제출하라고 했어요."
"수술은 [수술방]에서 수술파트 의사가 하는 것입니다. 환자분은 내시경실에서 [시술]을 하셨기 때문에 시술기록지를 가져가시는 것이 맞아요."
"수술기록지 내라고 했다니까! 보험회사에서 스텐트 삽입술도 수술이라고 했어."
"네. 수술실에서 외과적으로 삽입했으면 수술이 맞습니다. 하지만 환자분은 내시경실에서 시행한 시술이기 때문에 시술기록지를 가져가시는 것이 맞아요."
"아니, 왜 말을 못 알아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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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이 누구인가...... 내 목소리도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그러면 일단 제가 시술기록지 카피 해 드릴게요. 보험회사에 제출하시고 추가로 요청하는 서류가 있으면 3주 뒤에 다시 입원하니까 그때 발급받으셔서 제출하세요."
보호자는 서류신청서를 노려보더니 나도 한번 노려 본 후 '하-. 말이 안통하네. 됐고, 어디 누구 말이 맞나 두고 보자. 내 말이 맞으면 가만 안 둘 거야!' 이런 눈빛으로 신청서와 볼펜을 돌려주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그런 의미를 내포한 눈빛을 쏘고 있었다.)
다음 날, 그의 퇴원 시에 **또 다른 이벤트가 있었다는 것을 세 번째 입원일에 알게 됐다. 그 이벤트의 과정 설명은 세 번째 입원의 퇴원준비를 할 때와 퇴원하는 날에 도돌이표로 반복 재생되었고, 결국은 모든 간호사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역시 퇴원 전날의 담당간호사는 나였다. 나는 9시경에 복도를 지나가던 보호자를 불러 퇴원 설명을 한 몰상식한 간호사가 되었다. A 씨는 배우자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 나와 '이제 출근할 시간이라 졸음을 쫓으려 커피를 마신 거다. 밤에 출근하는 사람이니 이해해 달라'라고 오히려 사과를 했다.
'그래. 밤에 일하고 퇴근은 병원으로 해서 쪽잠 자며 환자 돌보고 얼마나 힘들겠어.'
'아니, 그래도 그 힘든걸 왜 우리한테 투사하는 거야? 환자 충분히 혼자 있을 수 있는데 집에 가서 편히 자다가 일하러 가면 될 것을. 그리고 이런 사람들 이용하라고 간호간병통합서비스 병동이 있는 건데 거긴 왜 안 가는 거야?'
이런 양가감정이 휘몰아치며 퇴근을 했다.
그가 퇴원한 날, 수간호사 선생님은 원무과에 전화를 했다.
"오늘 퇴원하신 A 씨 메모 부탁드립니다. 계속 우리 병동에 입원하시면서 입퇴원 시마다 간호사들에게 퍼붓고 갑니다. 오늘도 역시 그랬어요. 다음에는 2 병동에 입원하도록 배정해 주세요. 그분을 우리 병동에서 안 받겠다는 게 아니에요. 적어도 메인(main)과(科) 병동이 여러 개면 돌아가면서 받아야지 매번 이런 식으로 너무 곤란해요."
그런 전화를 하시는 분이 아닌데 - 우리는 환자 거부하지 않고 다 받는 병동으로 소문났다- 원무과에 부탁 아닌 부탁을 하셨다.
그렇게 A 씨는 배우자 덕분에 우리 병동의 VVIP가 되었다. 이쯤 되면 VVIP가 우리가 아는 very very important person이 아님을 짐작할 거다.
A 씨는 억울하겠지만 병원에서 환자와 보호자는 하나의 덩어리로 기억에 남는다. 우리 병동에서만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게. 다른 병동에 입원했다가 VVIP라는 꼬리표가 전산 프로그램에 달리면 간호사도 사람인지라 색안경 장착 후 대하게 된다. 물론, VVIP로 등록된 때와는 전혀 다르게 아무 일 없이 라포(rapport) 잘 형성하고 퇴원하시는 분들도 많다.
VVIP는 말이 잘 안 통하는 사람. 우기면 다 되는 줄 아는 사람. 욕 하는 사람. 남의 말 듣지 않는 사람.
꼭 병원이 아니더라도 "진상, JS"로 누구에게나 기억될 만한 사람이다.
의료서비스 제공자로서 환자, 보호자들에게 항상 웃으며 친절하게, 전문적인 간호를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내 자신이 입만 웃는 마네킹 같다고 느껴질 때도 많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지만 일단 죄송합니다를 영혼없이 내 뱉어야 하는 순간도 많다. (아, 지금 생각 해 보니 19년 전 면접 때 이 질문을 받았다.)
간호사도 환자, 보호자들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 상처받는다.
어느덧 18년차로 이제는 한귀로 듣고 한귀로 날려 버리며 마음에 깊게 담아 두지 않는 지경에 이르긴 했지만 그 순간 만큼은 '이걸 들이 받을까?' 하는 생각이 휘몰아친다.
가족이 어느 날 갑자기 암을 진단 받아 언제 세상을 등질 지 모르는 절망적인 시간들일 것이다. 함께 한 시간이 주마등처럼 생각날 것이고, 내가 이 사람에게 잘했던 것 보다 못한 일이 더 많이 생각날 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고생했던 삶이 조금이나마 편안 해 진 시간에 갑자기 아픈 걸지도…
그들이 살아 온 시간이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똑같은 상황이 온다면 역시 화가 나고 부정의 단계를 거쳐 갈 것이다.
나는 간호사를 하면서 나라면 어땠을까,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는 순간들이 참 많았다. 오늘도 그러하며 나를 다독이는 하루다.
* '겨우'라고 표현하여 기분 상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항암화학요법은 긴 여정입니다. 몇 회를 진행해야 할지 모르고 3회 cycle로 추적검사를 진행합니다. 그 결과에 따라 항암제가 바뀌는 경우도 있어요.
** 이 얘기도 언젠가 글로 쓸 날이 올 거예요.(내일 우리 병동으로 또 입원하게 되면 다음 주 연재일에 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