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위암 환자였다. 항암치료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2주간 매일 경구 항암제(=먹는 항암제)를 복용해야 했지만 첫날부터 '항암제를 먹으니 메슥거린다. 속이 쓰리다. 어지럽다. 한기가 든다' 등의 다양한 이유로 항암제를 복용하지 않고 건너뛰기 일쑤였다. 불편한 증상을 조절하기 위해 약을 추가했더니 그 약 때문에 더 불편하다고 역정을 내었다.
그는 항암치료를 시작하니 입맛이 더 없다며 병원 밥을 매 끼니 세네 숟가락 정도만 먹었다. 몸집도 작은 그가 식사를 잘 못하니 더 신경이 쓰였다. 혹시 퇴원하면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지 물었다. 소고기 버섯죽이 먹고 싶다고 했다. 떠오르는 음식이 있다니 다행이었다. 나중에 퇴원하면 소고기 버섯죽부터 드셔보시라고 설명했다.
이틀 뒤, 퇴원일 아침이었다. 오전 11시경 퇴원 예정이었는데 그가 오후에 퇴원하겠다고 계획을 변경하였다. 갑작스러운 스케줄 변경으로 병동에서는 점심 식사 신청에 오류가 생겼고 그의 점심 식사는 나오지 않았다. 식당에 알아봤지만 그날따라 환자 식사 여유분이 없어서 그에게 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에게 잠깐만 기다리시라고 말하고는 지하 2층 푸드코트에 가서 소고기 버섯죽을 포장해 왔다.
"식사 주문이 빠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시장하실 것 같아서 소고기 버섯죽을 포장해 왔으니 맛이라도 한 번 보셨으면 좋겠어요."
라며 손에 쥐어주려 했지만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됐어요. 먹고 싶지 않아요. 버리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라며 서둘러 퇴원을 해버렸다.
3주쯤 후에 그가 항암치료를 위해 다시 입원했다. 그날따라 내 명찰을 유심히 보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다.
"아이고, 지금 보니 나랑 성씨가 똑같으시네?"
"아~ 아직 제 이름 모르셨군요. 네 OOO님과 성이 같아요."
"가만 보자~ 그러면 이게 지금 어떻게 되나? 우리 할아버지는 O자 돌림이신데."
"어머, 저희 할아버지도 O자 돌림이세요."
"그렇구나...... 내 항암치료에 우리 문중이 달려있어요. 어쩐지 교수님이 찬찬하시고 좋으시더라니. 그때 죽도 사다 주셨잖아요."
그의 기억에 새로운 필터를 갈아 끼운 것만 같았다. 지난번 입원기간 내내 불평하고 화를 내던 분이 같은 분인가 싶었다. 그날도 이전과 같은 항암제를 처방하였지만 별다른 불평이 없었다. 몸 상태도 괜찮다며 이번에는 일찍 퇴원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본인이 어떤 발명품을 개발 중이라며 진지하게 설명도 해주었다. 그다음 입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편한 것도 없고 요새 컨디션이 참 좋다고 하였다.
먼 '가족'에 해당하는 나를 보고 안정감을 느껴서일까. 그의 다양한 증상들은 순식간에 흐려졌다. 같은 병원에서 같은 약을 같은 의사가 썼는데 환자의 전신 상태도 태도도 달라졌다.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 내 '이름'을 덕을 볼 줄이야.
학연이든, 지연이든, 혈연이든 또는 그 외의 나의 어떠한 조건이든
환자가 치료를 버티어내는데 힘이 되어줄 수 있다면 다 동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