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석주 Jan 31. 2020

사랑, 사랑, 사랑.

단편 소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사랑이라는 말에  발작적 거부감을 받았다. 아마 그중 가장  이유는  친구들 때문이었으리라. 지어진지 15년이 넘은 아파트, 아파트 뒤쪽에 떡하니 서있는 관리되지 않는 뒷산, 수시로 들리는 뭔지 모를 비명소리. 이런 환경에서 누군가 올바르게, 그것도  그럴싸한 윤리적 관념을 갖고 성장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친구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술과 담배는 물론 종종 도박에도 손을 댔다. 술과 담배는 부모님 심부름이라는 변명만 있다면 언제든 동네 ‘슈퍼마켙에서   있었고, 도박은 동네 형들이 가지고 있는 화투 패를 가지고 뒷산의 정자亭子에서 치는 ‘섯다 일컫는 말이었다.
머리가 커감에 따라, 친구들은 동네 여자애들과 어울렸다. 물론 그전부터 여자애들과 노는 것은 종종 있었던 일이었지만,   때부터는 성적인 무언가를 곁들이기 시작했다. 지갑 사이에 콘돔을 구비해놓는 것은 필수였고, 종종 어디서 났는지 모를 ‘따위를 가지고 다니는 애들도 있었다.  애들의 거사가 끝나면, 남자고 여자고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한데 모여 그걸 무용담처럼 떠들곤 했다.
나는 그런 것들에 본능적 역겨움 같은  느꼈다. 특히 내가 얼굴을 한껏 구겨가며  밖으로 씨발, 이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쓰레기 같은 무용담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실컷 포장할 때였다. 걔네 역시 그런 나를 참을  없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앞에서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내뱉은 씨발, 이라는 말의 뉘앙스라도 파악한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모종의 순수한 사랑을 믿은 것도 아니었다. 이런 애들 중에서도 무언가에 감화되어 운명적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하는 애도 있었다. 전형적인 소년의 사랑.  풋풋함과 약간의 어색함을 보고 있자면,  욕구와 사랑도 구분 못하는 머저리들도 종종 부러움 섞인 비난을 던져대곤 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이런 사랑 역시 구역질이 올라와서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나는 수첩에 쓰던 글을 마무리하고, 이내 수첩을 한쪽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 필요한 세면도구와 최소한의 옷가지들, 그리고 1L짜리 조니워커 블랙라벨을 가방에 넣었다. 넣은 것이 얼마 없음에도, 가방은  묵직했다.  묵직함이 부담스러워서, 나는 가방을 백팩에서 부피가 적당한 메신저백으로 바꿨다. 그리고 내용물도 절반으로 줄이기 시작했다. 세면도구에서 기초화장품과 선스크린을 빼버렸다. 옷가지에서도 속옷을 제외한 모든 옷들을 빼버렸다. 하지만 1L짜리 조니워커 블랙라벨은 빼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이 깨질까 봐 속옷 사이에 넣어서 가방 깊숙이 넣었다.
살고 있는 오피스텔의 두꺼비집을 내리고, 나는 택시를 잡았다. 목적지를 묻는 기사님의 말에, 주춤거리다 근처 해수욕장 이름을 말했다. 지나가는 동안 보이는 도시의 불빛은  예뻤다. 대교의 점멸하는 초록색과 전구색 불빛도, 고층 건물에서 쏘아대는 네온사인도, 살짝 바이올렛 빛이 도는 이름 모를 카페의 조명도. 이걸  지금에서야 봤지, 라며 나는 기사님 몰래 중얼거렸다.
날씨가  쌀쌀한 초봄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래사장에 있었다. 폭죽을 쏴대는 외국인들, 삼각대에 휴대폰을 고정시키고 타이머에 맞춰 스냅샷을 찍는 커플들, 파도가 가져온 쓰레기를 대단한 보물인 마냥 손에 움켜쥐려고 하는 아이까지, 사람들은 각자 다른 풍경들을 만들어내며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런 풍경들을 장관인 마냥  훑으며, 바닷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중간쯤 도착했을 , 주머니에 있던 이어폰을 꺼내 검정치마의 <International Love Song> 듣기 시작했다.
파도는 잔잔했는데, 신기한 것은 평면이던 파도가 모래사장에 다다를수록  생동감 넘치는 입체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속에 담긴 공허함을 무엇일까, 공허함, 이것만큼 지금의 나를  설명해주는 단어가 있을까,  비어서가 아니라, 너무 가득 차 버려서 공허한  느낌을, 누군가는 공감할  있을까.
그때, 카톡이 왔다. 조금  정확히 얘기하자면, 카톡이 왔음을 확신해서 카톡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연과 민준에게 카톡이 와있었다. 독일산 스파클링을 선물해준 사람에게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서운함을 밀어놓고, 수연과 민준의 카톡에 답장을 했다.
,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정말로.  괴로웠는데 이제야 마음 정리가   같아. 아무튼 지금까지는 미안해. 항상 말로는, 너의 행복을 바란다면서 너의 행복에 내가 이유모를 허들이 된다면, 조용히 비켜주겠다고 했는데.   번도 그러지 못한  같네. 항상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같다.  너무 미워하지는 . 조금 적당히 미워하다가, 시간  지나면 미워하지는 말아주라.  정도면   같아.”
내가 뭔가 진지한 얘기를  , 맞춤법을 파괴하지 않고, 조금은 문어체스러운 말투로, 문장부호를 꼬박꼬박 찍어댔다. 수연과 민준도  사실을 알고 있으니, 지금 내가 얼마나 진심인지  것이라 생각했다. 같은 내용을 복사해서 각자에게 보내고  , 나는 시꺼먼 바다를 향해 휴대폰을 던져버렸다. 바다는 이내   없는  먹물 같은 속내로  휴대폰을 삼켜버렸다. 그러고는 가방에 있는 조니워커를 꺼내 전부 마셔버렸다. 1L 되는 양을 모조리  마셔버린 후에야, 나는 입고 있던 옷가지를 모두 벗어버렸다. 그리고 휴대폰을 던진 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심연으로,  심연으로 온몸을 담가버렸다. 아주 영영 찾을  없게.

나는 중학생과 고등학생 , 볼과 이마에 여드름이 덕지덕지 나있었고, 눈썹은 모나리자를 연상시킬 만큼 옅었다.  어른들은 젖살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또래 애들은 통통하다고 부를만한 살이  곳곳에 붙어있어,  훌륭한 몸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핏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심지어 옷에서도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으니, 외모로서 어필되는 부분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재수를 시작하면서,  많던 여드름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눈썹 역시 눈썹 문신이라는 신박한 기술로 빽빽해졌다. 키는 그대로였지만, 살은  보기 좋을 만큼만 빠져서  핏이 어느 정도 받기 시작했다.
 무렵부터 나를 괴롭히던 재수학원 선생의 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대학 가서 연애해라. 그때 해도 늦지 않는다.’라는 말이었다. 연애를 하면 재수를 망친다는  말의 함축은, 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엄마가 자신의 몸을 갉아먹으면서까지 내준  재수 비용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그저 묵묵히 격언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서영이는 그런 격언이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듯이, 부단히 나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서영이는 아침마다  자리에 초콜릿이나 사탕을  움큼씩과 함께 짧은 편지 같은  놓았다. 사실  당시 나는 서영이에게  어떤 호감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땐 그게 아마 서영이가  스타일이 아니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를 생각해보건대, 그때 나에게  스타일, 그러니까  이상형이라고  만한 것이 없었다(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나는 서영이의 애정공세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이내 사귀게 되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끔찍한 일이었다. 연애는  그럴듯한 이유로 나를 구속했다. 나는  일상의 절반 정도를 서영이와 공유했고, 서영이는 그보다  많은  일상을 원했지만 나는 그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굉장히 버거워서, 나는 종종 잠수를 타곤 했다.  번째 잠수에, 서영이는 잠시 각자의 시간을 갖는  좋을  같다며 일시적 이별을 통보했다. 나는 그때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을 불러다가 현재 내가 겪는 상황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친구들은 나를 미친놈이라며, 네가 지금 연애 같은 팔자 좋은 짓을  때냐며 면박을 주었다. 면박이 강도 높은 비난이 되어갈 즈음, 재상이는 소주잔을  놓으며 말을 시작했다.
, 그냥 네가 걔를 좆도  좋아해서 그런  아니야?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냐. 그냥 헤어지면 되잖아.”
재상이의 말은  설득력 있었는데, 그건 700 정도 사귄 여자 친구 때문이었다. 재상이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사랑에 통달한 , 연애지상주의를 설파하고 다녔다. 그리고 가벼운 관계에 대해 혐오 섞인 말들을 내뱉으며 애들을 꾸짖기도 했다.
아니 헤어지긴  거야. 근데 내가 궁금한 , 보통 다들 이런 식이냐는 거지.”
뭐가 이런 식인데?”
그냥. 가벼운 감정에서 시작한 , 어떻게 무거운 관계가 되냐는 거지.”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서 그런 거지. 진짜 사랑은 애초에 무거워.  미칠  같거든. 바위로 가슴을 짓누르는  같은  사랑이야. 그냥 깃털처럼 가벼워서  훌훌 털어버릴  있는  사랑이 아니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영이와의 관계를 정리했고, 그보다   지난 시점에서  수능에서 생각보다 형편없는 점수를 맞았다.

대학에 들어가자,  외모는 예전보다 중성적으로 변해있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가늠이  되는 키도 이에 한몫을 거들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스타일도 유니섹슈얼하게 변했다. 심지어 매니쉬 한 옷은 기피하고, 페미닌 한 옷을 찾아 입었다. 머리 역시 상당히 길어서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소년인지 소녀인지 도통 구분할  없었다. 다행인 , 선배들이나 동기들은 그런 나를 좋아해 줬다. 물론  중에는 나를 도통 변태 같다며 싫어하는 인간들도 있었는데,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아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에게 일종의 어떤 습관 같은 것이 생겼는데,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평가하지도 정의 내리지도 않는 것이었다. 아마 내가 진학한 철학과의 영향과 나를 가지고 이래저래 떠드는 인간들에 대한 반발심이라고 생각되기도 했지만,  무렵부터 언어가 가지고 있는 모종의 독단에 신물이  것이 제일 컸다. 콘텍스트를 고려하지도 않은 해석이나, 발화의 뉘앙스를 배제한 이해는 너무도 비일비재했다. 나는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그걸 그따위로 받아들이는 인간들이 너무 미웠다.
언젠가 그런 적도 있었다. 선약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  앞에 셀카봉에 휴대폰을 끼워 넣고 돌아다니는 인간이 보였다. 여기가 번화가라는 점과, 종종 즐겨보는 인터넷 방송들에 으레 나오는 곳인 걸을 감안 하면, 필히 인터넷 방송을 하는 사람이었으리라 생각됐다.  인간은 체크무늬의 폴로셔츠와 카고 바지처럼 보이는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눈이 흐리멍덩한 것이   없는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피해 가려고 하던 찰나에,  사람은 나를 발견하고는 순식간에  앞으로 와서 말을 걸었다.
저기 죄송한데, 남자예요, 여자예요?”
나는  질문에 대답하기 싫어서, 애써 눈을 내리깔고  사람을 지나쳤다.  인간과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지자,  인간은 대뜸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탈코한 페미지, 개새끼야?”
그러고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낄낄 거리더니 이내 사라졌다. 나는 패닉 상태에 빠져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개새끼라니, 내가 욕먹을 짓을  건가? 아니면 그냥 운수가 더럽게 없어서 똥을 밟은 걸로 생각해야 하나? 그때 마침 재성이에게 전화가 와서 지금 내가 겪은 일에 대해 설명을 하니, 재성이도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 네가 여간 여자 같아야지. 그냥 칭찬이라고 생각해.  살다 보면 미친놈들 많잖아? 그냥 좋게 받아들여.”
내가 그렇게 이상하냐?”
... 조금? 근데  요즘 세상 사람들은  이상하니까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근데  그러다가 게이 되는  아닌가 모르겠다. 물론 나는 포용적인 사람이니까 네가 게이이든 뭐든 상관없긴 .”
그때부터, 나는   나를 유니섹슈얼하게 가꾸기 시작했다. 옷도, 머리도, 심지어 몸매와 얼굴까지도.  이상  어떤 인간도, 심지어 나를 처음 보는 인간조차도 나에 대해서 뭐라 왈가왈부할  없게끔.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오히려  다양하게 나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것들이 싫어서 몇몇 마음이 맞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이들과 절연했다. 재상이와도  무렵 절연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후로 재상이는 나에게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인간관계의 협소함을 채택하면서 아껴지는 돈으로, 나는  근처 맥주 바의 단골이 되었다.  맥주 집의 좋은 점은, 어디 자리에서 술을 마시든 나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가끔씩 대화 상대가 필요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  대화 상대가 돼준 것이 수연이였다.  맥주 집은 화장실이 남녀 공용이었는데, 마침 남자 소변기에 붙어있던 나를 보고 흠칫 놀란 수연이가 나에게 말을 걸면서 친해졌다. 수연이는 나와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재수를 하지 않아 나보다  학번이 높았지만 나이는 동갑이었다. 수연이 역시 혼자  맥주 집에 들락날락거렸는데,  이유를 물어보니 가끔 혼자 있는 것이 좋아 그렇다고 했다. 자연대 쪽에 재학 중인 수연이는 놀라울 만큼 나와 관심사가 같았는데, 좋아하는 영화나 , 그리고 음악까지 문화적 코드까지 거의 일치했다.
수연이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친해지는 바람에, 나는 혼자 맥주를 마시러 간다는 것이 도리어 수연이와 대화를 나누려고  맥주 집에 가게 되었다. 언제나처럼 맥주를 마시던 날에, 수연이는 자기 집에  괜찮은 버번위스키가 있다며 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너는 호모야, 헤테로야, 아니면 바이야?”
스트레이트로 다섯 잔을 연거푸 털어 넣은 수연이는, 이내 나에게 질문을 했다.
그게 중요해?”
, 그런 말도 있잖아. 동성인 친구와 우정인  알았던 것이 어쩌면 사랑이었을 수도 있고, 이성인 친구와 사랑인  알았던 것이 어쩌면 우정이었을 수도 있다고.”
  되게 기괴하다.”
무슨 말이야?”
애초에 사랑하고 우정을 칼로  베듯이 구분할  있다고 생각한  이상한  아니야? 사랑이고 우정이고   그냥 좋아함의 감정이지. 그걸 구분하는  의미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은  같은데.”
그래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뭐든   있다.  정도면 되지?”
수연이는  대답을 듣고 수줍은 어린애처럼 배시시 웃었다. 수연이는 옆에 있는 박하사탕을 입에 넣고는 나에게 키스를 했다. 나는 예상이라도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키스를 받았다. 박하사탕 덕택인지, 기분 좋은 알싸함이 느껴졌고, 우리는  사탕을 굴려가며 키스를 했다.
 키스 되게 못한다.”
입을  수연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이게  키스야’라는 말을 할까 하다가 이내 삼켜버렸다. 수연이는 그런 나를 보며 야릇한 눈빛을 쏘았고, 나는  모습을 보고 언젠가 재상이에게 얘기했던 ‘가벼운 감정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때 말한 가벼운 감정이란 무엇을 말한 거였을까. 나는 정말  감정을 알고서 얘기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잠자리를 함께 했고, 같이 아침 해를 맞이했다. 로맨스 영화에서 으레 그렇듯이, 나는 수연이에게 모닝키스를 했다. 그리고 결혼한 부부처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각자의 역할을 도맡아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물론 중간중간 백허그를 한다든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각자를 바라봐준다든지, 이런 행위들도 곁들였다. 이후 우리는 누가 먼저랄  없이 각자의 집을 제집 드나들 듯이 들락날락거렸다. 물론 그럴 때마다 섹스는 빠지지 않았고, 부부 소꿉놀이 같은 것도 빼먹지 않았다. 가끔 밖에서 만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에도 항상 벽과 지붕이 있는 곳만 골라 들어갔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귀는 사이, 그러니까 연애를 하고 있다든지 연인 관계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 모종의 합의가 있지는 않았다. 그저 각자의 욕구와 감정에만 충실한 느낌이 강했고, 그런 것에 대해 적어도 나는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수연이 역시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거나 서운하다고 얘기한 적이 없었기에 우리는 이에 대해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급변하게  것은, 수연이가 남자 친구가 생기면 서였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수연이의  남자 친구였다. 수연이는 나를 만났을 , 종종  남자 친구에 대해 얘기하고는 했다.  쓰레기였다고, 자신에 대한 배려는 일체 없는, 악질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수연이를 위로하기 바빴고, 수연이는 달래지기 바빴다. 그렇기에 당연히 내가  사람에 대한 것은 수연이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는 불문율에 가까웠고,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둘의 재결합에,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크게 신경 쓰지 . 그냥 우리는 계속 만나면 되지. 어차피 우리가 무슨 사귀는 사이 같은  아니잖아?”
나는 그런 수연이의 설득에 조금만  시간을 달라했고, 이내 수연이와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나는 곧장 휴학 신청서를 내고, A시로 이사를 갔다. A시에서  괜찮은 오피스텔을 잡을  있었는데, 우리  금전적 상황을 고려할  이는 사실상 불가능이었다. 하지만  무렵 엄마가 만나고 있는 애인은, 우리 지역에서 알아주는 건물을  채나 가지고 있는 부자였다. 그런 부자 ‘엄마 애인  턱에, 나는 살면서 가장 풍요로운 상황이었다.  오피스텔 역시  부자 애인님께서 나의 사정을 듣고 나와 엄마 몰래 계약을 해준 것이었다.
나는 어쩌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예견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엄마의 인생 계획에서, 나는 일어나면  되는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이를 어떻게든 포장시키고 싶었는지, 나를 자신과 아빠와의 불꽃같은 사랑에 대한 결과물이라 설명했다. 하지만  불꽃은 내가 태어나고 2년이  지나지 않아 꺼져버렸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나서부터, 나는 평생토록 아빠를   없었다. 대신, 아빠의 역할을 대리해줄 만한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가끔 엄마가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올 때면, 자고 있는 나를 깨워 자신의 외로움을 한탄처럼 쏟아냈다. 아무리 누구를 만나도 외롭다고, 누구를 만나도 공허하다고. 그런 고백을  때면, 아빠의 대리인은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사를 마치고, 나는 엄마에게 월세를 제외한 나머지 생활비는  벌이로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주는  때문에 엄마의 남성편력이 조금이라도 지장 받는 것이 싫었다. 엄마의 외로움에 대해 누구보다  알고 있었기에, 그것이 얼마나 엄마에게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우울함을 선사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때문에 나는 알바를 구해야만 했는데, 마침  좋게 근처 영화관에서 알바를 구하고 있었고,  정도 벌이면 생활비로 충분히   있었기에 곧장 지원을 했다. 서류 통과를 마치고, 면접을 보러 가자 매니저는 나에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도통 구분이  가는 얼굴이라서, 필요하다면 원래 성별에 맞게 꾸밀  있겠냐며 물었다. 당장 무언가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나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그러나 얼굴 깊게  이성異姓적 무언가를 지울 수는 없었고, 매니저는 그런 나를 눈엣가시인 마냥 싫어했다.
그럼에도 영화관 알바는  즐거웠다. 대부분  또래였는데, 이들과는 깊은 생각과 감정의 교류를 나누지 않아도 됐다. 그저 실없는 조크나 매니저에 대한 험담 같은 것들이 대화의 주를 이뤘다. 게다가 나는 오픈이어서, 관습적으로 행해진 술자리 같은 것에 참여하지 않아도 됐다. 어차피  관습은 대부분 미들과 마감 것이어서, 오픈이라는 타당한 이유로 빠질 수도 혹은 참여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나에게 알맞은 친밀감 정도만 유지할  있었다.
민준이는 그런 나에게 유일할 정도로 살갑게 다가온 사람이었다. 물론 같은 오픈이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민준이의 살가움이 설명되지는 않았다. 민준이는 나보다 일주일쯤 먼저 들어왔음에도,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미들과 마감 사람들과도, 술자리 개근을 통해 다른 파트 알바들과도 모조리 친해진 상태였다. 그런 민준이를 보고 있자면, 스무 살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능글맞음과  나이에서만 나오는 에너지를 동시에 느껴, 나도 모르게 힐링되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민준이에게 매료된 나는, 민준이에게만큼은 이런저런  깊은 얘기 같은 것들, 예컨대 서영이나 수연이에 대한 얘기나,  얼굴에 깊게   때문에 겪게  에피소드 따위를 얘기했다. 민준이도 그런 얘기를 경청해주었고, 나를 위로해주거나  그럴싸한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달쯤 지나자, 민준이는 나에게 퇴사를 하게 되었다고 말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 따로 술이나   할래? 누구랑 어울리는  되게 싫어하잖아.”
  되게 싫어하기까지야. 그냥 귀찮은 거지.”
아무튼   할래, 말래. 나는 언제든 좋은데 말이지.”
나는 결국 민준이와  약속을 잡아버렸고, 민준이는 나와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것이 기분 좋은  구체적 시간과 장소를 받아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약속한 저녁시간에 영화관 근처 이자카야에서 만났다. 민준이는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는데, 덕분에 대부분의 대화를 내가 이끌어가야 했다. 민준이는 말하는 대신 술만 계속 연거푸 들이켰고, 나는 그런 민준이를 말려야겠다 생각했다.
,  그만 마셔. 이러다 취하겠다.”
! 말리지 . 너나 취하지 !”
나이도 나보다 어린  이제 아예 반말하네. 웃긴 놈이야 아주.”
민준이는 이내 거나하게 취해서는, 도통 자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나는 그런 민준이를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로 데려왔고, 민준이를 침대에 눕힌  나는 바닥에 대충 이부자리를 펴고 곯아떨어졌다. 자고 있던 와중에, 나는 누군가  어깨를 건드리는 것을 느꼈다.  기척에 그만 일어나고 말았는데, 민준이가 그런 나를 깨우고는 턱을 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지금 몇 시야?”
세시. 우리   마시자.”
 몸은 괜찮아? 아까 많이 취했던데.”
괜찮아. 보니까    있던데,  마시자.”
우리는 이내 다시금 술상을 세팅했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민준이의 눈빛은 조금씩 달라져갔는데, 그건 예전 수연이의 집에서 처음 봤던  눈빛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민준이는 나에게 키스를 했고 나는 수연이한테 그랬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키스를 받았다.

우리는  , 그렇게 섹스를 했다. 물론   술에 취해서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도 모른  진행됐지만, 섹스를  것은 확실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민준이는 나에게 고백을 해왔다. 사귀면  되냐고,   너무 좋았다며. 나는 민준이에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모르겠다고, 그냥 만나기만 하는  어떻겠냐고, 말할 뿐이었다. 민준이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알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매일 같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나는 언젠가 수연이와 했던 것들은 민준이 와도 똑같이 했다.
하지만  인연도 길게 가지 못했다. 민준이와 이런 만남을 시작한 지  달도  되지 않아, 나는 민준이를 우리가 술을 마셨던 이자카야 골목에서 봤다.  골목에서 민준이는, 언젠가 나와 통성명 정도만  마감 파트의 정우와 진한 키스를 하고 있었다. 민준이는  키스에 열중하고 있던 나머지 나를 보지 못했고, 나는  장면을 보고 올라오는 구역감을 참을  없었다. 나는 곧장 집으로 도망쳤고, 곧바로 민준이와의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다음날 당장 영화관 알바도 그만뒀다.
당장 그다음 날부터, 나는 완전히 폐인이 되었다.  밖으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고, 제대로 씻지도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뿐이었는데,  그렇게 울음이 터져 나오는지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생각에 사로잡혀서 헤어나지 못했는데, 그건 바로 사랑이 도대체 뭔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사랑은 도대체 뭘까.  감정은 도대체 뭘까. 나는  감정을 정의 내리지 않는 ,  무엇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좋은 일은 몰아서 온다고  것은 진리인 마냥,  결심을 한지 이틀  되던 날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는 나에게,  사람과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고, 그래서 다음 달까지 방을 빼줘야 한다는 말을 건넸다. 나는 화를 낼까도 했지만 그냥 알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방을 빼야 하기 고작 며칠을 앞두고도  어떤 짐 정리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어쓴  생각만  뿐이었이다.
나는 단지 수연이나 민준이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 회고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서영이나 재상이도 포함됐는데, 그건 그거대로 고통스럽고, 우울하며 공허했다. 나는 도대체 누굴 사랑했나, 아니 어쩌면  누구도 사랑하지 않은 것인가. 도대체 사랑이 하물며 무엇이며, 이것을   있기나  것일까. 나는 예전처럼 그것을 그거대로 내버려 두는 것을 폐기하고 말았다.
방을 빼기 하루 , 엄마에게 전화가 다시 전화가 왔다. 엄마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는 한동안 가득  책장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책장에서 수첩  권을 빼들고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말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