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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째붕이 Mar 21. 2023

지겨워 죽겄어
다 지난 일인데 아직도 그랴

미움, 그 지겨움에 대하여

 한 글자도 쓰지 않고는 넘겨지지 않는, 두꺼운 책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날들이 있었다. 내 반 토막도 안 되던 내가 지금 내 키만큼 자랄 동안, 지금만큼 자랐을 땐, 손바닥에 올릴 만큼 작던 우리 강아지가 어미가 되어 새끼를 낳고 그 두 녀석 모두 당아래 복숭아 나무 밑에 묻힐 시간 동안, 나는 오래 울었다. 그러니 그를 마주보고 웃고 떠들 때, 마음 한켠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을 지난 시절 수많은 나에 대해 나는 때때로 배반자가 된 듯한 죄책감을 느낀 것이다. 한때는 자주 분열되어 아빠를 미워도 했다가, 좋아도 했다가, 나몰래 사랑도 하고 그랬으면서. 


 생전 격렬하게 달리는 법이 없던 해리와 새벽이는, 죽기 전 100m 달리기를 막 끝낸 사람처럼 헐떡이며 죽었다. 해리와 새벽이는 내 팔뚝만한 요크셔였다. 해리는 엄마, 새벽이는 딸. 해리가 먼저 헐떡였다. 고통의 끝에 삶이 조금은 남아 있을 거라고 믿고 싶던 내 간절한 손가락이 그 작은 입을 억지로 벌려 영양제를 욱여 넣었다. 이태 후, 새벽이가 헐떡이기 시작했을 땐, 나는 그저 가루약을 간식에 개어주며 하루빨리 그녀가 죽길 바랐다. 오래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그러잖아도 오래도록 떨면서 살아왔으니 마지막은 편히 갔으면 했다.


 해리와 새벽이는 소리에 예민했다. 간식이 있는 찬장에 손끝만 대도 방에서 뛰쳐나와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커다란 소리엔 더더욱 예민했다. 큰소리가 나면 내 방으로 달려와 방문 칠이 다 벗겨지도록 닫힌 문을 박박 긁었다. 문이 열리면 침대 밑으로 쏜살같이 기어들어가 사시나무 떨듯 온 몸을 떨었다. 장판에 내 한쪽 볼이 벌겋게 눌릴 때 까지 애타게 불러야 겨우 침대 밖으로 나왔다. 바닥에 납짝 엎드려 있는 두 녀석을 한아름에 안고 한참을 어르면, 녀석들은 울음 멈추듯 간헐적으로 부르르 떨다 가까스로 떨림을 멈췄다. 집 안에서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고함이 울렸으므로 이런 일은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일어났다. 슬픈 일은, 녀석들이 큰소리와 박장대소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개그콘서트가 방영되던 일요일, 녀석들은 이태선 밴드 못지 않게 부지런히 몸을 떨었다. 개그콘서트는 우리 아빠의 최애 프로그램이었다. 부모님은 티비를 향해 조그맣게 낄낄대다가 어느 순간 박장대소를 터뜨렸고, 그때마다 내 방을 향해 전력질주 하는 두 녀석을 향해 아빠는 웃으며 소리쳤다. “이 바보들, 아빠 화난 거 아니야.” 나는 웃지 않았다. 나 역시 스치는 큰소리 한번에도 심장이 얼어붙는 처지였으므로. 우리는 아빠의 분노에 자주 부둥켜 안고 떨던 동지였으므로.


 정도 많고, 화도 많은 사람이었다. 우리 아빠는. 조금 전까지 사람 좋게 웃고 있다가도 얼굴이 벌게지도록 화를 내는 일은 내가 지겹도록 봐 온 일이었지만 지겹도록 적응하지 못한 일이기도 했다. 예측이 불가능했으므로 대비할 수 없었다. 샤워 중에 나긋한 목소리로 '속옷 좀 문 앞에 놔 줄래?’ 하던 아빠는 몇분 후, 엉뚱한 속옷을 갖다 줬다며 고함을 치기도 했고, 여름휴가를 앞두고 아침까지 신이 나 있다가도 출발 직전 휴가는 니들끼리 가라고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어떤 날은 종일 다정했다. 아빠는 가족이 최고인 사람이어서 자기 삶을 희생하며 성실하게 가장 노릇을 했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궂은 일도 할 수 있을 사람 같았다. 그는 내가 만난 어떤 어른보다도 탐욕없고, 따뜻한 사람이기도 했다. 주변에 손이 필요하면 사심없이 팔 걷어붙이고 돕는 사람, 이웃에 사는 다운증후군 꼬마에게 유독 마음쓰고 예뻐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분노 한번에 그는 다른 사람이 됐다. 브루스 배너 박사를 만난 적도 감마선에 노출된 적도 없지만, 그는 분노 한번에 얼굴이 새빨개지던, 변종 헐크였다. 우리의 머리꼭지에 분노를 잠그는 수도꼭지가 있다면 그의 것은 필시 고장이 난 것 같았다. 한번 치솟은 분노는 종종 잠기지 못한 채 콸콸 쏟아져 내렸다. 이틀 걸러 하루, 술에 전 날은 그 고장난 수도꼭지 마저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그런 날에 나는 이불 속에서 눈을 감고 웅크린 채 떨기만 했다. 해리와 새벽이처럼.


 그랬으니 아빠를 향해 여러갈래로 찢어지던, 미워하기도 사랑하기도 했던, 나의 마음은 성장하며 갈라지는 박쥐란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줄기마다 각기 다른 모양의 잎을 달고 있는 몬스테라와 가까웠다. 세대가 다른 각각의 줄기에서 둥그런 잎도 찢어진 잎도 나오는 것처럼, 폭력적인 아빠의 줄기에서는 누렇게 뜬 내가 달렸고, 다정한 아빠의 줄기에서는 반들거리는 내가 달렸다. 누렇게 뜬 나는 아빠를 향해 있는 힘껏 눈을 흘겼고, 반들거리는 나는 아빠를 향해 헤벌쭉 웃었지만, 종국에는 누렇게 뜬 나나 반들반들한 나나 손을 꼭 잡고 함께 울며 약속했다. 있는 힘을 다해 저 사람을 미워하자고. 헤벌쭉 웃다 바보처럼 또 당하지 말자고. 그렇게 오래 울고, 오래 미워했는데, 이제 와 지쳐 버린 거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이. 그 덫에서 계속 허우적 거리는 일이. 그렇게 지치면 이제 그만 좀 하지? 대디 이슈로 징징되는 어른은 좀 꼴 사납지 않나. 하는 내면의 비아냥까지 가세한 후엔, 그래 이제 정말 그만하자 몇 번씩 다짐 했지만, 용서라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일 리 없었다. 여러 명의 아버지와 그로 인해 파생된 여러 명의 내가 차례로 서서 악수 한번하고 헤어지면 좋으련만. 내 뒤로는, 나보다 더 여러 갈래로 갈라져버린 엄마와, 그 엄마들과 관계 맺고 있는, 온갖 무늬의 얼굴을 한 내가 한데 뒤엉켜 있었다. 그 온갖 무늬를 들여다 보자니, 무구하게 웃고 있는 나, 얼굴에서 입이 지워진 나, 비대해진 눈치를 손끝과 뒤통수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나, 그 유형도 다양했다. 대단한 퍼레이드였다. 이것은 한번의 악수로 파하기 어려운, 속된 말로, ‘대환장파티’였다.


 엄마는 참을성이 좋아서, 우리 앞에서 온갖 수모를 다 겪고도 참았다. 엄마가 참지 못한 날에 나는 오이 도시락을 먹었다. 급식이 의무화가 아니었던 초등학교 시절, 책상을 앞뒤로 붙이고 친구들과 모여 앉아 도시락을 까먹는 것이 그 날의 하이라이트 였던 시절, 내 도시락엔 가끔씩 오이스틱과 고추장이 들어 있었다. 친구들은 알았을 것이다. 쟤네 엄마 또 집 나갔대. 어제 쟤네 엄마 잡으려고 쟤네 아빠가 아파트를 다 뒤지고 다녔다던대. 나 몰래 수근거렸을까. 감수성이 새순보다 여리던 시절이었음에도, 사실 부끄러움에 대한 기억은 고추장을 담은 호일 밑에도, 내 도시락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나는 단지 엄마가 빨리 돌아왔으면, 그러고 나면 잘못을 뉘우친 아빠가 우리에게 다시는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면, 바라고 또 바랐을 뿐이었다. 성당도 엄마 손에 이끌려 억지로 다니던 내가 아침마다 무릎 꿇고 손 모아 기도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찬송가까지 불렀다. 내 신앙심 깊은 노랫소리가 하늘까지 가 닿았을까. 엄마는 늘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또 다시 나갔다. 내가 서른이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마지막엔 목이 졸렸댔나. 경찰서까지 맨발로 뛰어 갔댔나. 우리는 변호사를 샀고, 같이 괌으로 여행을 떠났고, 4박 5일 동안 소란스럽게 새출발을 기념했고, 엄마는 또 다시 돌아갔다. 나에게 상의도 없이. 엄마는 돌연, 새 집에서 아빠와 새 출발을 했다. 사실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나에게서 온갖 위로를 다 받다가도 마음이 진정되고 나면 대뜸,  ‘아빠한테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하고 엇박의 왈츠를 추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이제 다시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돌연 또 다시 마음쓰는 일을 지루하게 반복했다. 과연, 그 엄마에 그 딸이었다.


 아빠는 애정결핍이었고, 엄마는 무뎠다. 노상 미온적인 엄마의 태도가 그를 안달나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지독히 슬픈 운명의 조합이었다. 가뜩이나 밑 빠진 독 같던 그의 마음에 애정이라고 붙들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아서인지, 아빠의 애정결핍은 병적인 집착으로 발전했다. 우리 가족은 오랜 시달림 끝에 벨소리 공포증과 연락 노이로제를 후유증으로 얻었다. 엄마는 사회에서 고립됐다. 엄마에게는 아빠 이외에 다른 인간관계가 허락되지 않았고, 우리 남매 역시 오후 7시라는 자비없는 통금에 처해졌다. 애정결핍은 집착을 넘어 자주 분노로 연결됐다. 그는 마음이 헛헛할 때면 참지 못해 화를 내는 것 같았다. 가족이 최고야, 우리는 하나야 하다가도, 별것 아닌 이유로 토라져 화를 냈다. 마음에 분노든 사랑이든 뭔가는 채워져 있어야 되는 사람이었다. 그랬으니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그의 애정결핍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노름하다 알콜중독으로 사망한 할아버지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할머니 밑에서 10살이라는 나이에 고아가 된 불운에서 시작 됐을 것이다. 컴컴한 날 혼자인 게 지금도 무섭다고 고백하던 아빠와, 환갑이 넘어서까지 옆에 누운 엄마 손을 꼭 잡고 자는 아빠는 어쩐지 좀 측은하다. 나는 그를 연민하지만 그의 불행이 나의 불행에 대한 면책이 될 순 없어서, 연민은 노상 연민으로 그친다. 새삼, 미운 사람은 감기도 걸리면 안된다고, 그래야 실컷 미워한다고 말하던 어떤 이의 말이 떠오른다. 마음 쓰이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제는 옆에서 같이 떨어줄 해리도 새벽이도 없거니와, 나도 더이상은 떨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더군다나 아빠의 붉은 얼굴을 보는 건, 이 짧은 몇년 사이에 꽤나 희귀한 일이 되어버렸다. 황혼 이혼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아빠는, 버려질 거라는 충격이 대단했는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정년퇴직을 하고 비닐하우스를 지어 조그맣게 농사를 짓고나서부터는 얼굴까지 편안해졌다. 이제는 유부녀가 된 딸이 데려온 이방인을 앞에 두고서, 천연덕스럽게 정상 가족을 연기한다. 그러니 나도 이젠 그와 얼굴을 마주보고, 웃고, 떠들게 된 것이다. 마음 한켠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을 지난 시절 수많은 나를 향해 얼굴을 붉히며. 한때는 아빠를 미워도 했다, 좋아도 했다, 나몰래 사랑도 해놓고, 미워만 하자 스스로 한 약조가 떠올라 나는 편히 웃지 못한다. 그를 미워하자던 그 약속 때문에 나는 이만큼 단단해졌다. 그를 미워해서, 그가 욕설을 퍼붓던 날도 연을 끊자던 날도 결혼식에 오지 않겠다고 통보하던 날도 울지도 떨지도 않고 단단하게 버텼다. 엄마도 그 누구도 아닌 내 미움이 나를 지켰다. 미움은 불철주야 나를 경호한다. 내 마음에 기쁨과 희망을 멋대로 심어 놓고, 어느 날 돌연, 그가 또 변덕스럽게 낚아채가지 못하도록. 그러니 내가 지겹도록 저어하는 것은 용서 그 자체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름도 안 준 마음에 사랑은 자꾸 잡초처럼 움트고 이제는 미움도 지겹지만, 어떤 날은 이가 떨리게 밉고 또 계속 미워하고 싶어서, 며칠 전 외할머니와 했던 대화를 내게 다시 들려준다.


“현구가 또 온 댄다.”

“누구?”

“내 남동상”

“동생 놀러오면 좋은 거 아냐?”

“지겨와.”

“왜?”

“갸는 나이가 팔십인데 여적지 엄마 욕을 그렇게 지껄인다. 아직도 울어. 지겨워 죽겄어. 거 다 지난 일인데, 아직도 그랴. ” 


 외할머니의 남동생은, 어릴 때 외증조할머니가 막걸리 값으로 부잣집에 머슴살이를 보냈다고 한다. 막걸리 취기만큼 머슴살이도 짧았다고 했지만, 나이가 팔십인 할아버지도 그걸 못 잊고 서러워 운다. 비늘같이 반짝이던 살갗이 쭈글쭈글해질 때까지의 시간도,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엔 부족한 것 같아서 나는 내 미움을 향해 지겨워하는 마음을 거둔다. 대신 나는 다짐했다. 


웬만하면 울지는 않기로, 그래도 미워하고 싶으면 미워할 수 있을 때까지 실컷 미워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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