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북미 대륙에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무슨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그곳을 빠져나와 무작정 걷는다고 합니다.
길 옆에 핀 어여쁜 들꽃도,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버팔로 소떼도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화가 난 자기 밖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은 도저히 억누르기 힘든 감정의 소용돌이가 불기둥처럼 솟구쳐 올랐겠지요.
그렇게 걷다가 어느 순간 그런 감정들이 누그러지고 화가 사라지고 나면 바로 그 자리에 주위에 있는 나무 막대기를 하나 꽂아두고 다시 출발했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다음에도 화가 나면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렇게 말입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종종 화가 나면 그 분노의 감정을 직접 상대방이나 아니면 애꿎은 사람들, 동물들, 물건들에 화풀이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화를 해소하는 삶의 지혜가 남다르게다가옵니다.
저의 집 주변 가까이에는 호수를 빙 둘러 숲이 둘러싸여 있고 호수의 형태를 따라 구불구불 산책길이 있어 천천히 걸으면 한 바퀴 걷는데 세 시간은 족히 걸리는 호수공원이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산책길을 따라 걸으면서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가끔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쌓인 안 좋은 감정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도 제격이니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화를 푸는 방식을 비슷하게 실천할 수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도소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만나 하나하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당수의 재소자들이 순간의 울분이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어둡고 칙칙한 교도소 감방 안에서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가슴을 치며 후회한들 다시는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고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2018년도 경찰청에서 발표한 범죄통계지표를 보더라도 살인범죄자 중에서 남녀 불문하고 범행 동기가 우발적인 경우가 가장 높게 나타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수감생활 기간 내내 싸움, 폭행, 소란 등 각종 관규를 위반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수용자 중에 정신적으로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수용자들이 많습니다. 이들 중에는 소위 묻지마 범죄로 들어온 사람도 있지만 출소 후에도 묻지마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 일반적인 교도관의 경험칙입니다. 분노가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분노의 사회학은 이미 우리의 테제가 된 지 오래입니다.
원시인이나 현대인 모두 감정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분노의 순간들은 있지만 머리가 쥐가 날정도로 복잡다단하고 숨이 막힐 것 같은 속도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감당해야 할 그 스트레스와 분노의 강도가 더욱 높을 것으로 생각은 들지만 한편으로는 분노의 강도라는 것도 상대적인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또한 정답은 아닐 것입니다.
분노를 안으로 꾹꾹 참기만 하면 자신을 죽이는 홧병이 되고, 반대로 분노를 밖으로 분출하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되는 한계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분노를 다스리는 지혜가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분노의 현장을 떠나 화가 풀릴 때까지 계속 걷는다면 몸이 전체적으로 이완되어 리듬을 찾아가므로 홧병은 생기지 않을 것이고, 동시에 분노의 상대방을 잠시 떠나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므로 그를 해치는 일도 없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이런 방법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분노의 현장을 떠나 화가 풀릴 때까지 걷고 싶은, 분노의 상대방을 잠시 떠나 혼자 있을 시간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정도로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마저 송곳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는 너무도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의삶은 돌고 돌아 자신의 문제, 마음의 문제로 다시 돌아옵니다.
“지향성이 없이는 객관과 세계는 우리에 대해 현존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철학자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객관과 세계는 홀로 떨어져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마음의 지향 작용에 의해 현존하는 것일 뿐이라고 지향성(intentionality)에 대해 말합니다. 마치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어야 비로소 꽃이 되듯이 내 마음이 그곳에 없다면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며 말입니다.
후설의 말대로라면 서울시민이 모두 남산을 바라보아도 똑같은 남산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남산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바라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객관적이면서 절대적인 어떤 남산이 존재한다고 믿는 하나의 착각일 뿐이니까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현상 자체일 뿐 그 이외에는 각자의 주관적인 인식과 해석만이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주관적인 인식과 해석에서 나오는 각자의 생각은 모두 옳다는 말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말은 현상을 바라보는 너의 생각도 맞고 나의 생각도 맞다면 역으로 너의 생각도 맞는 게 아니고 나의 생각도 맞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니까요.
후설의 '지향성'이 의미하는 바는 사실 우리 마음의 지향이 유연하지 못하고 어느 한 대상에 들러붙어 고착되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집착, 아집, 고집, 편견, 고정관념, 확증편향 기타 등등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주입하는 교육에, 전체주의 망령인 집단 히스테리에, 종교라는 이름으로 신도들에게 자행되는 교리의 강요에, 불같은 분노로 자신과 상대방 모두를 화염에 휩싸이게 하는 상황에 들러붙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그곳을 빠져나와 천천히 다른 곳을 향해서 나아갈 마음의 여유공간을 갖자는 의미로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금 당장 약물을 사용하거나 뇌의 특정부위를 조작하여 분노의 감정을 아예 싹둑 분리하여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분노와 싸우지 않고 천천히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며 바라볼 수 있게 하루하루 내공을 쌓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분노로 다른 생각들이 들어올 수 없게 꽉 들어찬 마음을 천천히 덜어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때
벌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버팔로 소떼 같은 수많은 막대기와 그곳까지 거리만큼 들꽃처럼 흔들렸던 헤아릴 수 없는 마음들을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기억해야 하냐고요? 그건 바로 그 기억들을 추억하며 힘들었지만 잘 견뎌준 내 마음에 대해 웃음 짓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