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쓰레기는 아닙니다

by 키다리 아빠

감옥은 쓰레기장입니다.

감옥은 흡사 우리 사회의 쓰레기가 모인 쓰레기장을 방불케 합니다. 그야말로 온갖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 악취가 진동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완전한 쓰레기와 그 보다 덜한 쓰레기로 분류될지라도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 쓰레기장에 한번 던져지면 한때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은 한 줌의 까만 재로 환원되는 것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수사기관은 곳곳에 널브러진 쓰레기를 밤낮으로 수거하고, 법원은 쓰레기에 등급을 매깁니다. 그러면 감옥에서는 실려오는 쓰레기를 다시 분류하여 각 방마다 칸칸이 차곡차곡 쌓아둡니다. 훗날 이들이 재생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쓰레기는 알지 못합니다. 쓰레기에게는 그럴 권리도 의지도 없습니다. 마치 매일매일 감옥이 설치한 컨베어벨트 위에 편안히 눕혀서 감옥의 여기저기를 이동하다 밤이면 각자의 방에 시체처럼 차갑고 딱딱하게 눕혀있을 뿐입니다.

감히 쓰레기가 자유의지를 가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니 차라리 그런 것이 없는 것이 쓰레기에게는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이 곳에서 하루, 이틀, 사흘... 한 달... 몇 년... 그러다 몇십 년, 종신토록 보내다 보면 자유의지란 것이 있기나 한 건지, 아니 있다고 느끼는 자에게는 오히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란 것을 알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이 곳에서 ‘나만 쓰레기인가’ 라며 자위를 해본들 고통만 더해 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지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감옥 밖의 우리들도 감옥 안의 그들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평생 다니던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믿었던 가족마저도 돈도 못 벌어 온다며 어느 쪽으로부터도 용도폐기 처분되는 현실이라면 이미 그 사람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버린 재와 같이 사랑은 식은 지 오래고, 쇠창살만 없을 뿐 감옥과 같을 테니 말입니다. 시계추처럼 이곳에서 저곳으로 무의미하게 지하철이나 버스에 실려 왔다 갔다 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고 휑한 거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 TV나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내일이면 어제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일상들을 맞이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쓰레기라고 부르는 감옥 안의 그들과 감옥 밖의 우리도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감옥 안의 그들은 강제로 감옥에 갇힌 사람일 테고, 감옥 밖의 우리는 스스로 감옥 아닌 감옥에 갇힌 것이 다를 뿐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니까요. 탐욕에 눈이 멀지 않고 상대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일에만 올인하지 않고 소중한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지금 그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무슨 일이 발생하면 그 결과를 가져온 원인을 알려고 합니다. 범죄자로부터 범죄의 원인을 알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범죄의 원인을 알려고 하는 것은 나중에 다시 유사한 범죄가 발생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통제하기 위한 일입니다. 범죄의 원인을 그 사람의 내부(소질)에서 찾기도 하고, 그 사람을 둘러싼 외부(환경)에서 찾기도 하나 대체적으로 내부와 외부의 복합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내부적 요소(소질)로는 유전형질, 체질과 성격이상, 연령, 지능 등이, 외부적 요소(환경)로는 사회구조, 경제변동, 전쟁, 가정해체, 교육 부재 등이 해당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부(소질)와 외부(환경)라는 기본적인 틀 안에서 범죄의 원인론과 그 통제론에 대한 각종 논의가 18세기 근대 이후 현대까지 다양하게 발전, 전개되어 오고 있는 양상입니다. 일반적으로 범죄통제의 방식에는 형벌을 통한 범죄 억제, 범죄자의 치료와 갱생을 통한 사회복귀, 사회환경의 개선을 통한 범죄예방을 들 수 있는데, 이에 따라 교정행정 분야에서도 대체적으로 이와 같은 원인론과 통제론의 관점에서 각종 제도가 구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교정현장에서 이러한 관점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면을 살펴보면 적잖은 불만이 터져 나오는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교정행정도 사회의 변화 추세에 부응하여 새로운 제도 개선과 수용자 인권신장 등 눈부신 발전적 노력을 해온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출소 후 재범률이 떨어지지 않는 현상을 바라보면서 국민이나 교도관 자신조차도 과연 제대로 교정행정을 운용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넘어 회의감마저 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우리의 교정행정에 대한 문제의식이 근본적인 것에서 멀리 떨어진 너무 지엽말단에 매달려 씨름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래 뜻은 우직한 사람이 꾸준히 노력하면 나중에 그 성과를 낸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만일 그 산을 잘못 옮기면 어떻게 될까요? 국립공원 지리산을 깎아서 아파트를 짓는다거나, 아름다운 4대 강을 마구 파헤쳐 시멘트로 덧씌운 운하를 만든다면 말입니다.




우리 삶은 먼저 ‘방향성’에 있을 것입니다. 무작정 열심이 아닌 생각하는 열심이 필요합니다. 그 생각이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는 방향이 결정되면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한 응집된 ‘고도화’가 필요합니다. 힘이 분산되면 처음의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는 난파선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필요한 것은 ‘균형’입니다. 방향과 힘을 적절하게 조정하는 균형감각이 없으면 정해진 방향으로 가기는 가나 도중에 지쳐 쓰러질 수도 있고, 너무 느리게 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셋을 하나로 결집시켜 앞으로 나아가는 노련한 핸들링에 있습니다. 그러면 노련한 핸들링을 가능하게 하는 추동력은 과연 무엇일까요? 감히 그것을 ‘인문정신’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어떤 사회 시스템에서 부분적으로는 맞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삐걱거리는 구조가 보내는 비상 신호는 ‘보편성(다양성)’의 부재일 것입니다.


인문정신은 어떤 이즘(~ism)이나 관념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전체를 보는 안목을 ‘보편성(다양성)’이라고 하고 이름하여 ‘인문정신’이라고 말하는 것뿐일 것입니다. 이는 나를 둘러싼 세계와 단절이 아니라 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입니다. 또한 개개인 모두가 각자의 실존의 고유성(독자성)을 발현하는 것입니다. 보편성(다양성)의 세계는 범죄자이든 교도관이든 우리들 모두에게 열려있는 세상입니다.

근래 우리 사회의 인문학 열풍에 힘입어 교정현장에서도 출소 후 재범률 증가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심성순화 차원에서 인문학 교육을 강조하며 각종 인성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것은 ‘방향성’ 면에서는 환영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결코 ‘고도화’ 내지는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 교정현장에서 실시하는 각종 심리치료나 인성교육 현장을 관찰하면 강사 수준 미달, 단편적이고 형식적인 교육, 교육 콘텐츠 부족 등 교육의 질적 저하가 심각함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수용자들이 자비로 구입하는 잡지나 도서를 보더라도 대개 말초적 감각을 조장하는 내용에 편중되어 있는 것도 인성교육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일면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감옥의 컨베어벨트는 잘도 돌아갑니다. 아무리 범죄성을 씻어내기 위해 인성교육을 해도, 출소 후 사회정착을 위해 직업훈련을 받아도,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가 심리치료를 받아도 잘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마치 고장도 없이 안전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정작 위험한 것은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하는 것, 감옥 시스템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형식에 그치는 교육이 순종적인 수형자를 만드는 데는 성공할지 몰라도 사회에 나가서 당당한 주체로 홀로 서게 하는 데는 아직도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재범방지라는 기치 아래 감옥 안에서 교도관과 수용자에게 공히 능률, 효율, 비용을 강조하는 경향은 순종적 인간형을 양산하는 만큼이나 위험한 생각입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자본주의에 충실한 인재를 양산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을 부채질하고, 획일화, 규격화된 학교교육의 폐해로 사회에 나와 끝내는 ‘번 아웃’되어 자의든 타의든 폐기 처분되는 현상을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떠한 연유로 감옥에 들어와 다시 만나는 것들이 그러한 뻔한 교육들의 반복이라면 결과는 또한 뻔하지 않을까요?

또 다른 측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은 과거보다 수용자 인권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얼마나 더 인권을 보장해줘야 되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감옥 안의 흉악한 범죄자 인권 챙겨주지 말고 감옥 밖에서 인권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일하라며 원망을 쏟아냅니다. 피해자에 대한 일말의 반성의 기미도 없이 범죄자 주제에 기초생활 수급자보다 감옥 안에서 더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도 모자라 반찬이 짜네 싱겁네 방이 차네 덥네 온갖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교도관에게 눈을 부라리며 대드는 꼬락서니를 보노라면 수용자 인권을 보장해준 대가가 과연 이런 것인가라는 깊은 회의와 번민 속에서 날마다 교정의 참담한 실패를 목도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이와 같이 수용자가 순응해도 문제가 되고 순응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는 딜레마가 작금의 교정행정의 현주소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답시고 생각 없이 자식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는 사랑의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듯 현 교정행정의 딜레마의 근본 원인이 인권의 방향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방향성이 잘못 수립된 곳에서 제아무리 기능적 보완을 해도 구조가 바뀌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정치 개혁한답시고 선거제도나 백날 바꿔봐야 정치개혁은 요원합니다. 공부 시간표 백날 짜 봐야 작심삼일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이니까요.

우리는 무슨 제도가 새로 생기면 그게 무슨 금과옥조나 되는 양 부여잡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세상에 진실은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까요? 수용자를 위해 행형제도를 운용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를 행형제도에 무리하게 끼워 맞추기 한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모습도 없고 아무런 감동도 없습니다. 정작 중요한 수용자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모든 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전가의 보도(傳家寶刀)나 된 것처럼 부득불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무지하거나 전시행정이 아니면 과연 무엇일까요?



근무를 하다 보면 종종 수용자가 병사, 자살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제 야간에도 사망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상당기간 지병으로 몸이 아파서 일반 수용동과는 분리된 의료 수용동에서 치료를 받던 수용자였습니다. 같은 거실에서 생활하던 동료 수용자가 이 사람이 의식이 없는 것 같다며 비상벨을 눌러 직원들이 신속히 출동하여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며 응급차에 태워 외부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였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사망한 겁니다. 교정시설에서 수용자가 사망하면 먼저 사인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검사 지휘를 받아 부검을 실시하고 이상이 없으면 시신을 가족에게 인수하는 절차를 진행하는데요. 60세가 넘은 이 수용자에게 부모님은 돌아가신 지 오래됐고 생존해 있는 유일한 혈육인 친형이 시신 인수 협의 과정에서 직원에게 대뜸 "시신도 인수하기 싫고 나는 동생 어떻게 되는 상관없다. 평생 교도소에만 들락거린 사람 아무렇게나 처리해도 괜찮다."며 싸늘하게 대하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간적으로 그럴 수 있나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도 그럴 것이 평생 교도소를 제 집처럼 드나든 수십 번의 전과 기록만 보더라도 살아생전에 가족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에게는 아무도 인수할 사람이 없어 화장하여 한 줌 재로 뿌려질 행정절차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자신을 추억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처럼 슬픈 일도 없을 겁니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상당수의 재소자의 마지막 모습이 이 사람의 운명과 같다는 것을 익히 알기에 교도관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더욱 무거워지는 날입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문득 학창 시절 배운 한문의 파편들이 귓전을 맴돌다 오늘은 심장에 콱하고 박힙니다.

학자여우모 성자여린각(學者如牛毛 成者如麟角:학문을 하는 사람은 쇠털같이 많으나 이룬 사람은 기린의 뿔처럼 드물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 학문여역수행주 부진즉퇴 욕속부달 견소리즉대사불성(學問如逆水行舟 不進則退 欲速則不達 見小利則大事不成:학문은 물을 거슬러 가는 배와 같아서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나며, 빨리 하려 하면 이루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면 큰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문장들은 얼핏 보면 '많다와 드물다', '쉽다와 어렵다', '빠름과 느림', '작은 것과 큰 것'으로 서로 대칭구조를 이루며 비교하는 것 같지만 숨어있는 행간의 뜻은 이러한 형식적인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 전체를 통섭하는 사고가 가능할 때 비로소 진정한 학(學)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함께 그리고 동시에 존재합니다. 빛과 어둠이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한 몸인 것처럼 어떤 것이 어느 것을 절대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의 사고는 너무 경직되어 있고 기울어져 있으며 빈틈이 없이 예민해지려고 합니다. 이젠 좀 더 부드러워지고 좀 더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물처럼 풀처럼. 그러지 않으면 주체와 대상은 영원히 만나지 못하고 분리된 채로 우리의 삶도 끝이 날 것입니다.


세상에 처음부터 쓰레기는 없습니다. 쓰레기 같은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되짚어 보면 그 마음이 그를 만든 겁니다. 하지만 마음 참 어렵습니다. 알듯 모를 듯, 보일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 확실한 것 같으면서도 불확실하고, 명확하면 도로 갇히고 모호하면 흩어지니 말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노자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고 선언한 것이겠지요.


무엇이 우리를 감옥에 가두는 것일까요?

질문 속에 답이 숨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답을 구하기 위해 끝없이 질문을 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질문이 사라지고 나면 답조차도 말끔히 사라지겠지요. 그 날은 바로 감옥에서 나오는 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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