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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금 Oct 11. 2023

수치로 얼룩지는 나의 어학생활

말을 배우는 과정이란 어쩔 수 없는 쪽팔림의 연속이다


프랑스어 수업에서 '성교하다'를 외쳤던 나날




  앞서 얘기했듯 나는 프랑스어 그 자체에 열정적이었다. 프랑스어 실력을 향상시키고, 프랑스어 자격증 DELF B2를 취득하는 것이 프랑스에 있는 이유였기 때문에 어학 공부에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잘하고 싶은 욕심도 컸기 때문에 나랑 비슷한 시기에 온 애들이 더 잘하진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 당시의 일기장을 보면 열등감과 싸운 흔적이 여실하다. 다른 친구들의 오전반 레벨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좀 잘한다 싶은 친구가 있으면 어떤 방식으로 공부하냐고 물어보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경쟁할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니가 잘하네 내가 잘하네 하며 견제를 했다. 그게 뭐라고 참.






  프랑스어가 복수전공이기도 했었고 열심히 하기도 해서 프랑스에서도 금방 잘한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자신감이다. 작문에는 대체로 문제가 없었으나 듣기, 읽기, 특히 말하기에서 힘들어했다.


  듣기 영역은 누구나 힘들어하는 부분이라 어쩔 수 없었다. 발음의 높낮이가 확실한 영어와 달리 프랑스어는 꼭 모노톤으로 단조롭게 들려서 아주 천천히 똑바로 발음해주지 않는 이상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어학연수하는 학생들도 대체로 듣기가 잘 안 되니 스스로를 귀머거리라고 칭했고, 나 또한 그랬다. 우리는 프랑스어가 들린다는 것을 귀가 뚫린다고 표현했는데, 대체로 1년 이상은 지나야 귀가 뚫린다는 게 정설이었다.


가끔은 정말 싫었던 어학원 가던 길


  내게는 읽기 영역도 큰 문제였다.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둘째치고 읽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수업시간에 주어진 지문을 다들 금방 읽어버리는데 난 반 밖에 못 읽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국어 지문도 읽는데 느린 편이라 프랑스어 지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시험에 통과하려면 극복해야 하는 문제였다.


  마지막으로 말하기 영역은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발전이 더뎠다. 틀리기 싫어하는 성향 탓에 머릿속으로 단어 생각하고 문법 맞춰본 후 말하면 늦는 경우가 허다했고, 괜히 틀려서 망신살 뻗칠까 하는 두려움에 아예 입조차 떼지 못했다.


  말은 많이 할수록 느는데 스스로가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꼴이었다. 이 문제는 자신을 내려놔야 해결되는 것이었다. ‘못해도 괜찮아! 배우는 중이니까 틀리는 건 당연한 일이야! 어쩔 수 없는 쪽팔림을 이겨내야 해!’ 수도 없는 다짐을 해도 진정으로 내려놓기까지 3개월이 걸렸다. 그 이후에는 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해 시험의 말하기 영역에서 고득점을 얻는 쾌거를 달성했다. 많은 쪽팔림을 겪고 '나'를 내려놓아 가능했던 일이었다.






시끌벅적해지기 전, 이른 아침의 어학원 뒷문 로비



  하지만 흑역사는 언제나 남는 법. 아직도 《이불킥》하는 일화가 하나 있다. 프랑스에 온 지 한 달 조금 지났을 무렵, 돌아가면서 지문을 읽는 시간. 무슨 주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baisser(내리다, 낮추다) 동사가 자주 나오는 구문을 읽어야 했다. 스스로가 프랑스어 발음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베제”라고 자신 있게 읽었고, 선생님과 학생들 모두 내 발음을 지적하지 않았다.


  이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내가 발음한 ‘베제’는 baiser로 성교하다, 입맞춤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baisser는 “베쎄”라고 읽었어야 했다... s 하나 차이 발음에 이렇게 뜻이 변하다니. 왜 아무도 나에게 틀렸다고 지적하지 않은 걸까. 왜..


  선생님과 같은 반 학생들이 원망스러웠다. 한 달 반이 넘게 저렇게 발음하고 다녔는데.. 미친 사람으로 봤겠지? 아직도 프랑스를 추억할 때 슬프면서도 웃긴 이 일화를 얘기하곤 한다. 내 인생에 기억될 영원한 흑역사 중 하나다. 어흑-






*깨알 상식 : 유럽어의 기준*


   유럽 언어는 기준에 따라 총 6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그 기준은 CECRL(cadre européen commun de  référence pour les langues, 유럽 언어 공통 기준)에 의한 것으로 크게는 A(초급), B(중급),  C(고급), 3가지로 구별된다. 여기서 숫자 1과 2를 붙여 A1(입문), A2(초급), B1(중급), B2(중상급),  C1(고급), C2(전문), 총 6단계로 세분화한다. 여기서 B2는 고등학교 졸업자 수준, C1은 대학 졸업자 수준으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취급해 대개 유럽 대학교 입학기준은 B2, 대학원 입학기준은 C1이다.


공인 프랑스어 자격증 DELF & DALF


   대표적인 프랑스어 자격증 DELF(Diplôme d'études en langue française, 델프)와  DALF(Diplôme approfondi de langue française, 달프)는 프랑스 교육부로부터 발급되는 프랑스어  공인 인증 자격증으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평생 유지된다. DELF는 A1부터 B2까지, DALF는 C1과 C2에 해당하는  시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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