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사금 Oct 12. 2023

17시간의 낮을 견뎌야 한다

새벽 5시 반부터 밤 10시까지 계속되는 프랑스 여름날 햇빛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일상 루틴이 잡히니, 잠잠한 한 여름의 이 작은 도시에 긴장이 서린 지루함이 엄습했다. 난 지루함과 생존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VICHY를 본격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밤 10시에도 환한 태양빛 그리고 여름 강물처럼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 아직 바캉스에 가지 못한 프랑스인들이 환한 밤을 즐기러 강가로 삼삼오오 흘러나왔다. 그들은 친구 또는 가족 단위로 강가에 자리를 펴 놓고 앉아 저녁식사와 함께 수다꽃을 피웠다.


  강가의 피크닉을 즐기며 떠들고 있는 프랑스인 무리를 보니 외롭고 부러웠다. 덥고, 할 것 없고, 친구도 없는 이방인은 마냥 돌아다니며 시간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TV를 봐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의 드라마들이 나오고, 뉴스를 봐도 뭔 소린지 모르니 무슨 재미람. 켠 지 1분도 안 되어 꺼버린다.



  외로워 미칠 것 같은 시간을 견디다 보면 밤 10시 반이 되어야 비로소 어둑어둑해지는 기적이 찾아온다. 오후 3시처럼 환한 프랑스의 여름밤, 믿을 수 없이 환하고 끝도 없이 긴 낮 시간이 믿기지 않지만 진짜라서 어이가 없다. 내게 끝없는 시간이 주어진 것만 같았다.


  프랑스의 여름, 낮은 미친 태양이 난도질하는 듯했고 밤은 소름 끼치게 적막해서 그립지도 않다. 어떤 여름날에는 새들만 우는 밤이 있었다. 







   나의 일상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어학원의 여름은 어땠을까? 그곳도 혼돈의 카오스였다. 매주 100명 이상의 어학연수생들이  8월까지 밀려 들어왔다. 대개 청소년이었으며 눈썹까지 금발인 독어권 스위스인들과 검은 눈의 스페인인들과 이탈리아인들이  압도적이었다. 멕시코, 브라질 등 중남미에서 온 애들도 많았고, 미국과 중국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단기로 왔던 청소년들 중에서 키프로스(Cyprus, ‘사이프러스’라고도 한다)에서 왔던 15살의 오레스테스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키프로스인을 만난 건 처음이었고, ‘오레스테스’라는 그리스 신화 속 이름을 가진 사람을 볼 거라고 생각조차 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밝은 갈색 눈, 밝은 갈색 머리칼, 상아색 피부를 가진 그는 서유럽인과는 확연하게 다른 얼굴이었다.


  결국, 어학원 건물도 가득 차서 천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방학한 고등학교와 주변 건물들을 빌려 수업을 진행했다. 새로운 임시 선생님들도 늘어났고, 10명 남짓했던 한 반이 가뿐하게 20명에 임박했으며 학생들의 수준 편차가 심하게 나서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나는 미칠듯한 더위와 매주 바뀌는 환경에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수업과 어딜 가든 시끌벅적한 어학원과 도시 분위기에 정말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청소년 어학연수생들은 금방 가버렸다. 정말 짧으면 일주일이었고, 보통 다 2주 단기 코스. 간혹 가다 4주를 머물고 가는 애들도 있었다. 여름 내내 학생들의 교체와 순환이 빠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외국인과 친구 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꾸준히 만나야 친해질 수 있지 매주 사람이 떠나고 들어오는데 친해질 기회가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여름 내내 어학연수 학생들과 관광객들이 VICHY를 채우고 떠나기를 반복했다. 이때 서구권 청소년들은 방학에 외국으로 나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는 기회로 삼기도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국인인 내게 방학은 그저 과도한 학업 경쟁에서 풀려나 그저 잠자며 쉬는 재충전의 기간이었는데 그들에게 바캉스는 휴식일뿐만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대한 도전이며 일상에서의 완전한 탈출이었다.



                     



이전 06화 프랑스 소도시 VICHY의 두근두근 초여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