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시작이야, 내 꿈을 위한 고생!
2018년 6월의 첫 번째 토요일, 한밤중이 되어서야 VICHY에 도착했다.
처음 들어선 내 스튜디오(원룸)는 약간 춥고 고요하며 아늑했다. 건물 제일 꼭대기층에 위치했지만 작은 엘리베이터도 있었고, 작은 창문으로는 공원과 VICHY를 넓게 전망할 수 있었다. 천장이 낮고, 욕실과 침실이 확실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새것이라 인스타그램에서 나올 법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스튜디오로 안내해 준 어학원 직원은 내게 열쇠 꾸러미와 VICHY 지도를 건네주며 주변 마트 위치와 어학원에 오는 방법을 설명해 주고 돌아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이젠 프랑스에 와 있다는 것에 들뜨는 기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설레는 것도 잠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이젠 혼자서 모든 걸 해내야 한다! 유학원 원장님이 일러주신 대로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첫 번째가 ‘원룸 동영상 찍어 놓기’. 작은 스튜디오를 샅샅이 뒤지며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었다. 나중에 이사나 퇴거 시에 집주인과의 분쟁이 일어날 것을 대비한 필수적 조치였다.
이후 간단히 씻은 후 일기를 쓰고 빠르게 잠들었다. 14시간의 비행, 1번의 경유, 택시 1시간, 하루 사이 너무 많은 게 바뀌었다. 스위치를 끄듯 잠들었다.
대망의 월요일, 어학원 첫날이었다. 바짝 긴장한 채로 어학원으로 향했다. 오전 8시부터 레벨 테스트가 진행되었기에 빨리 나와야 했다. 시차적응이 덜 된 얼떨떨한 상태로 레벨 테스트를 치르고 나니 바로 결과가 나왔다. B1 클래스, 대학 졸업 때 B1시험에 떨어지고 그 이후에도 2번이나 불합격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다니. 프랑스어 실력이 그다지 떨어지진 않은 것 같아 안도감이 든 것도 잠시, 바로 본 수업에 들어갔다.
담임선생님인 셀린 Céline은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갈색눈, 갈색머리 여성이었다. 처음 보자마자 오랜만에 치구를 만난 것 마냥 다정하고 따스한 눈길로 바라봐주고 수업에 적응할 수 있도록 챙겨주었다.
그러나 같은 B1반 학생들의 배타성은 수업 시간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미 얼마간 같이 수업을 해서 이미 서로 친해진 무리에 내가 끼어들어간 상황이라 어색했다. 그 와중에 셀린의 에너지 넘치는 수업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천생 내성적이고 내향적인 나는 셀린의 수업 스타일이 죽을 맛이었다. 발표하고, 토론하고, 만들고, 처음 보는 행인에게 설문조사하고.. 그래서 첫 한 달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다가 집에 돌아와 자괴감을 느끼곤 했다.
어학원 생활은 꽤나 빡셌다. 초기에는 시차에 적응하려고 애쓰며 오전 8시 45분에 시작하는 수업에 출석하기 위해 7시에 일어났다. 수업이 시작되면 10분 정도의 쉬는 시간을 제외하곤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오전 수업 선생님들은 한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고, 다채롭게 의견을 표현하게 했다. 매일 수업 주제를 두고 그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면서 말로, 글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으로, 참고문헌을 이해하는 형식으로 수업이 이뤄졌다. 주제는 사회 문제, 세계 이슈, 환경, 세대, 범죄, 역사 등등 폭넓고 다양했다.
프랑스인 선생님들은 프랑스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프랑스인처럼》 생각하고 논쟁하는 법을 가르쳤다. 선생님들이 항상 외쳤던 말은, ‘논리적으로(logiquement) 생각하라’였다. ‘논리적’이라는 말이 굉장히 거창하지만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은 크게 어렵지 않다. 그저 공개적으로 내뱉기가 어려울 뿐이다.
프랑스인들에게 논리적이란 어떤 개념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에서부터 사고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알고 나니 별게 아닌데 알고 실행하기까지 힘들었다. 결국, 프랑스어를 말한다는 건 프랑스인처럼 생각하는 것이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정오부터 오후 2시(14시)까지, 장장 2시간의 점심시간이 주어졌다. 여유를 즐기며 공원에서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긴 개뿔, 나는 한국인답게 부리나케 8분 거리의 스튜디오로 달려가 30분 안에 요리부터 식사까지 마쳤다. 그러고 급하게 숙제를 하거나 낮잠을 자다가 얼굴에 베개자국이 난 채로 오후 아뜰리에(Atelier) 수업에 서둘러 나갔다.
일주일에 4번있는 오후 아뜰리에 수업은 오전 수업보다는 가볍고 즐겁게 이루어졌다. 연수회에 가까운 느낌으로 시간도 1시간 반으로 짧았다. 듣기, 쓰기, 말하기, 단어, 문법, 시험 준비반 등 원하는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고, 오전 수업은 변경하기 어려운 반면에 아뜰리에 수업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었다.
비슷한 수준의 반이 뒤섞인 곳이라 나에겐 좀 더 쉽고 편한 수업이었다. 선생님도 학생들도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어 나는 어학원 생활 초창기에 아뜰리에 수업을 더 좋아했었다. 그래서인지 아뜰리에 수업을 빼먹는 애들도 적지 않았다.
수요일을 제외하곤 오후 3시 반이면 모든 수업이 끝났다. 그 이후에는 도서관에서 숙제를 하거나 집에 가거나 자유였다. 그러나 자취생들은 할 일이 많다. 청소하고 장보고 밥 해 먹고 공부하고 내일을 준비하고- 집안일을 해줄 사람이 없으니 숙제와 공부는 밤늦은 시간까지 미뤄지는 경우가 잦았다. 난 거의 자정에서 새벽 1시쯤 잠들었다. 홈스테이 가정에서 지내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이 바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