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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금 Oct 15. 2023

프랑스에서 김일성 종합대학교 신입생들과 공연한 썰

프랑스 VICHY에서 만난 사람들 2편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 기묘한 일



  살면서 실제 북한사람을 만날 일이 있을까? 내 인생 기묘한 사람들 중 TOP 1은 VICHY에서 만났던 북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만난 것도 상상 못 할 일인데 그 사람들과 전 세계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8월의 어느 월요일, 어학원에 가니 아침부터 뭔가 소란스러웠다. 여느 때처럼 방학을 맞은 청소년들이 잔뜩 몰려오나 싶었는데 점심시간에 마주친 한국인 친구가 전해주길, 북한 사람들이 어학원에 왔다고 했다! 빨간색 넥타이에 하얀색 반팔 셔츠 그리고 검은색 긴 바지를 입고, 셔츠 주머니 윗부분에 북한 지도자인 3부자 배지를 차고 다니는 걸 봤다고 했다.


  세상에나.. 이 얘기를 듣고 “북한 사람들도 해외를 다니긴 다니는구나.. 근데 왜 파리에 안 가고 이 시골에 왔지?”하고 생각했다. 인구 2.5만 명 정도 되는 이 작은 도시가 무슨 마력이 있기에 이토록 사람들을 끌어당기는지.


  주목받는 일이나 이벤트가 내 인생에 도통 일어난 적이 없었기에 북한 사람들을 본 것만 해도 굉장한 이야깃거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학원 마당발이자 나와 같은 반이었던 한국인 친구, 세웅이 북한 사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게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다가오는 어학원 축제에서 북한사람들과 합동공연을 하자는 것이었다.


북한 사람과 함께 공연하자는 제의를 받으면 이런 말이 나온다. "... 내가?"


  “... 내가?... 왜?”하고 물으니 어학원 측에서 먼저 제의를 해서 사람들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세웅이 나에겐 같이 하자고 졸라댔다. 내가 피아노를 칠 줄 아니 그렇게 설득했던 것이다. 쫄보인 나는 덜컥 걱정이 되었으나 하도 조르는 바람에 하겠다고 해버렸다. 어쩔 수 없는 불안감이 있었기에 세웅은 파리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까지 전화해 북한 사람들과의 공연에 대해 얘기했고, 대사관에서는 별 문제없을 거라 얘기해 공연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6명의 북한 사람들을 인생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2명의 인솔 교수와 4명의 대학교 1학년 학생들. 날 바라보던 한 교수의 살기와 광기가 소용돌이치는 눈동자가 뚜렷이 기억난다. 살기가 딱 이런 거구나 싶었다. 이제 대학교 첫 여름방학을 맞이한 김일성종합대학교 1학년 남학생들은 딱 중고생 같은 앳된 외모를 하고 있었는데 몸짓에는 어딘가 모를 반듯함이 어려 있었다. 성격과 외모는 제각기 달랐다. 굉장히 당찼지만 키가 아주 작은 남학생, 둥글둥글 웃는 얼굴의 남학생, 번듯한 모습에 마른 남학생 등.


  한국 사람들도 세웅의 마당발 능력으로 4명이 모였다. 우리는 《아리랑》을 부르기로 했다. 일단 부르기도 연주하기도 쉬웠고, 한국의 얼을 잘 담고 있는 민족가요이니 별 문제소지가 없을 거란 생각이었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는 내가 반주를 하고, 남한사람과 북한사람이 각각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는 공연이었다.


엄격하게 검열되었던 <아리랑>

  갑자기 결정된 공연에 연습 분위기는 번잡스러웠지만 서로 말이 통하는 게 신기하면서도 다른 표현,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점이 소름 돋게 이상했다. “앞으로 나와”라는 말을 《자리를 차지하라우》라고 하는 건 충격이었다. 말하는 단어들이 패기 있고 힘이 있으며 주체적인 느낌이었다. 70년의 세월 동안 언어표현이 이렇게 달라졌구나 싶었다. 이 북한 대학생들은 겉보기엔 평범해 보였는데 대화를 나누며 같은 공간에 있으니 한국에선 일반적이지 않은 언행에 갑자기 무서워지기도 했었다.


  세웅이 구해온 《아리랑》 악보를 북한 교수에게 보여주니 그 간단한 악보를 뚫어질세라 한참을 보았다. 왜 저리 오래 보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곧 여기 마지막 부분은 우리(북한인)가 모르는 내용이니 빼라고 했다. 국제사회에서도 변덕스럽고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다웠다. 우리는 모두가 기대하고 있는 공연을 위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주었다. 그리고 배타적인 그들을 실제로 대하는 건 진짜 무서웠다.


  퍼포먼싱의 민족답게 북한 사람들은 한 시간여 연습하는 동안, 공연에 이것저것 추가하자고 했다. 여기선 손을 이렇게 하고, 저기선 얼굴을 이렇게 마주하고.. 나는 그냥 아리랑만 부르고 끝날 공연일 줄 알았는데 짧은 연습과 간단한 공연에도 그들은 참 열성적이었다.






  대망의 어학원 축제의 밤. 굉장한 긴장감에 오후수업도 빼먹었다. 우리의 순서는 중간쯤이었다. 엄청난 인파가 모여 강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들이 내뿜는 여름 열기로 뜨거웠다. 다른 나라팀들이 앞서 공연하는 걸 보고 있었지만 집중도 안되고 내 공연에 대한 긴장감만으로 바짝바짝 속이 탔다.


  곧이어 우리의 순서가 다가왔다. 큰 화면에 대한민국 국기와 북한 국기가 나란히 나왔고, 사회자가 우릴 소개했다. 무대로 올라서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내내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단순한 악보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작은 피아노 키보드를 연주했다. 어두운 가운데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이 한 쌍씩 손을 잡고 아리랑을 한 소절씩 부르니 조명이 켜졌다. 조명이 다 켜지며 후렴을 다 같이 부르는 감동적인 공연이었다.


  각 나라 사람들은 이 합동공연에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별 것 아닐 것이라 생각했던 《아리랑》 공연은 그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되어 화제가 되었고, 피아노를 치는 내 모습이 나온 사진이 메인 사진으로 나왔다. 내가 해외신문에 나오다니 세상에나-


당시 지역신문에 났던 기사, 뒤쪽에 피아노를 치고 있는 내 모습이 나왔다


  합동공연이 끝나고 북한 대학생들은 또 다른 개인 공연을 펼쳤다. 수준급의 기타 연주와 가창력, 관객을 휘어잡는 무대 매너를 선보이며 순식간에 관중을 휘어잡았다. 큰 강당을 꽉 채운 여러 국적의 사람들도 일생에 한 번 접하기 어려운 북한 공연에 매료되었고,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고작 19살짜리들의 공연이 이렇게 전문적일 줄이야.



  뜨겁고 즐거운 축제의 열기에 나도 살짝 미쳤는지, 늦은 밤에 한국인 친구들과 2차까지 놀았다. 너무나 즐거운 기분과 엄청난 에너지에 압도되어 새벽까지 놀다 집에 들어왔다. 동갑 한국인 3명만 모인 다음날의 뒤풀이. 전날 미처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한참 했다. 단순한 단번의 선택이 인생에 기억남을 사건을 만든다. 내가 감사인사를 했나 안 했나 기억이 안 나지만 또 전해서 나쁠 건 없지.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게 도와준 세웅, 고마워요!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는 상태로 2차 뛰러 가던 중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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