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VICHY에서 만난 사람들 4편
또다시 새로운 한 주의 시작. 월요일에 일본인 친구 유키가 주말 동안 수영장에 다녀온 얘기를 해주었다. 거기서 한 프랑스 소녀가 자신을 소개하며 먼저 말을 걸었다고 했다. 그 소녀는 Coco(코코)라고. 그러면서 코코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며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얼결에 같이 가겠다 대답했고, 어학원이 끝난 후 유키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긴장되었다. 프랑스인이 사는 집에 초대받아간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파리 여행 때 에어비앤비로 프랑스인이 사는 집에 방 하나 빌려 며칠 묵어본 적은 있지만 초대라니! 그래도 내겐 프랑스어를 아주 잘하는 100% 외향인 친구 유키가 있으니 내가 크게 나설 일은 없겠다고 다독이며 집에서 나왔다.
어학원에서 유키를 만나 시내에서 좀 떨어져 있는 주거밀집지역으로 들어갔다. 산책 때 근처에 있는 공원만 가봤지 이곳까지 들어올 일은 없었기에 약간의 생경함이 피어났다.
코코의 집에 도착하니, 코코의 엄마와 그녀의 남자친구 그리고 코코가 우릴 맞이해 주었다. 우리는 곧 응접실로 안내되었고, 나는 이날 처음으로 프랑스인과 프랑스식 인사인 비주(bisou)를 했다. 코코 엄마 남자친구의 까슬한 수염과 입으로 어색한 쪽쪽 소리를 내야 했던 게 기억난다.
코코는 금발에 호기심이 반짝 어린 갈색 눈을 가진 예쁜 여자아이였고,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어 보였다. 코코의 엄마도 금발이었으나 아주 짙은 갈색으로 태닝 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코코가 집 구경도 시켜주어 프랑스인들의 일반적인 가정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코코는 위로 언니와 오빠가 있어 집에 방이 많았는데, 복도가 있는 길고 좁다란 구조로 전형적인 프랑스 아파트였다.
좁고 기다란 복도가 있고, 그 양 옆을 따라 식당, 화장실, 욕실, 세탁실 그리고 각각의 방들이 위치했다. 현관 양 옆은 응접실과 부엌이었다.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었으며 발을 내딛을 때마다 소리가 났다. 조명은 전체적으로 노란색이었고, 내가 방문한 시간도 늦은 오후라 집안은 노란색과 주황색 햇빛의 잔해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식전주(apéritif, 식사 전에 마시는 음료)와 소시지가 잘게 들어간 치즈를 대접받고, 코코와 식당에서 놀았다. 못하는 게 없는 유키가 놀이 콘텐츠로 오리가미(일본식 종이접기) 마련해 왔기 때문에 함께 오리가미를 만들었다. 일본인 유키, 프랑스 소녀 코코, 한국인 나. 긴장해서 뚝딱거리긴 했지만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우린 4시간 동안 정말 즐겁게 놀았다.
나는 코코의 두 달 된 아기 고양이가 귀엽고 신기해서 연신 고양이를 만져댔다. 부드러운 깃털솜같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따뜻한 생명체. 언어가 부족해 말을 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던 시기라 사람 보다 동물을 대하는 것이 훨씬 편하기도 했다.
이후 유키와 나는 코코네 집에 2번 더 초대받았다. 나는 프랑스에 오기 전까지 취미로 캘리그래피를 배웠기에 한지와 서예 붓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날은 붓, 먹물, 한지를 챙겨가 코코의 이름을 한글로 써주고, 한지, 붓, 먹물과 함께 선물로 주었다. 코코는 난생처음 보는 것들에 매료되어 마냥 신기해했다.
유키는 코코를 위해 직접 손으로 만든 작은 카드를 선물로 주었다. 함께한 추억이 담긴 사진과 마스킹 테이프, 오리가미로 손수 꾸며 정성이 담긴 카드였다. 내게도 한 번 보여주었는데 유키의 정성과 손재주에 감탄했다. 공부할 시간도 빠듯했을 텐데 이렇게 정성 들여 만들다니, 그저 대단했다.
코코와의 인연은 유키가 석사 학위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파리에 이사를 가며 끊기게 되었다. 나도 그 이후에는 목표인 어학시험에 매진하였고, 유키 없이는 코코를 만나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파리로 이사 간 유키는 종종 VICHY로 내려가 코코와 만났었다고 내게 전해왔다. 나는 유키의 사교력과 재력, 더불어 체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 사귀는 일도 성향, 돈, 체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느꼈다.
이 일도 벌써 5년 전이니 코코는 중고생쯤 되었을 것이다. 생기가 반짝거리던 그 눈빛과 얼굴이 어떻게 변했을까 문득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