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라 하면 사진 스튜디오나 적당히 넓은 공방의 수더분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렇지만 프랑스에서는 흔한 주거 형태 중 하나다. 스튜디오를 번역하면, ‘원룸’이다. 원룸의 있어 보이는 다른 말이었던 것이다. 프랑스에 가면 스튜디오에 살게 된다 해서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그냥 자취 원룸에 살게 된다는 뜻이었다.
한국처럼 프랑스도 원룸이 많다. 서울도 그렇듯 대도시인 파리Paris의 스튜디오는 좁고 이상한 모양에다 엄청 비싸다. 치안이 좋은 지역에 월세 100만원짜리 스튜디오를 구했다? 완전 땡잡은 것이다! 그래서 스튜디오 월세는 어학원 코스를 마치고 본격적인 학업을 시작하기 위해 파리로 가는 유학생들의 생활수준을 판가름하는 기준이었다.
한 번은 파리에 위치한 프랑스인의 스튜디오(aka 자취방)를 가본 적이 있다. 정말 좁아서 깜짝 놀랐다. 3평이나 겨우 되려나? 게다가 일반적인 사각형도 아닌 삼각형 공간을 어떻게 나눈 건지 부엌도 식탁도 겨우 있었다. 그는 이 스튜디오에서 에펠탑이 보인다며 자랑스레 얘기했는데, 창문 밖으로 몸을 쭉 빼고 봐야 왼쪽 시야에서 겨우 보였다. 얼마나 어이없고 웃기던지! 어디 앉을 공간도 없어 서서 이야기해야 했다. 파리 스튜디오의 실상이었다.
지방으로 갈수록 스튜디오 월세는 굉장히 싸졌다. 넓고 쾌적하게 잘 빠졌을 뿐 아니라 평균 월세가 50만원 정도(당시 €380)였다. 각 집마다 다르기는 했으나 대략 8-9평 되는 정사각형 방에 주방과 화장실이 분리되어 있었고 좁지 않은 주방과 나름 쾌적한 화장실이 있었다. 깨끗한 침대와 가전 그리고 가구가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많은 건물이 대개 100년은 넘은 프랑스이니 지방에서도 엘리베이터는 절대 기대할 수 없다. 그래도 이만한 지방의 스튜디오 같은 곳을 파리에 구하려고 한다면 얼마를 줘야 할까?
내가 살던 건물은 Residence Astoria로 VICHY의 딱 중심부에 위치한 랜드마크이다. 프랑스의 벨 에포크 시기인 1910년에 지어져 100년이 넘은 건물로 세계 2차대전시기에는 튀니지 대사관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 1970년대까지는 호텔로 사용되다 매각되어 현재는 아파트로 사용되고 있다. 나는 이 사실을 모르고 살다가 나중에 이 건물이 VICHY 기념품 가게에서 팔던 엽서에 떡하니 그려져 있는 걸 보고 나서야 새삼 깨달았다.
깔끔하고 클래식한 외관과 고풍스런 내관이 합쳐진 멋진 건물로 내 스튜디오에 와본 사람들은 모두들 멋진 곳에 산다며 부러워했다. 한 세기가 넘어 이젠 반질반질해진 돌계단, 짙은 목재 패널과 바닥에 깔린 머스터드색 카펫, 노란빛을 뿜어내는 옛 전등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환상적이다.
프랑스에서 보통 건물 1층은 Rez-de-chaussée(헤드쇼쎄)나 0층이라고 부르며 로비 역할을 한다. 엘리베이터에서도 숫자 0이나 Rez-de-chaussée를 의미하는 RZ버튼이 제일 아래 있고, 1층 버튼이 그 위에 있다. 그래서 무작정 1층에 내리면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계단으로 내려가야 한다.
RZ층에는 대개 대문, 중문, 우편함, 로비가 있고, 계단이나 엘리베이터가 있다. 나는 내가 살던 건물의 RZ를 정말 좋아했다. 아주 큰 거울이 있어 드나들 때마다 내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고, 친구들을 초대할 때에는 멋진 로비에 좋은 첫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종종 계단을 이용해 7층 꼭대기에 있는 내 스튜디오까지 올라가곤 했다. 멋스러운 계단과 19세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주는 분위기를 향유하며 올라가는 기분이 굉장했다. 꼭 내가 고전영화 속 주인공같이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게다가 어두컴컴하고 소박한 뒷문도 있어 고풍스럽고 웅장한 대문을 이용하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부잣집 아가씨가 몰래 집을 탈출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쓰레기들을 모아두는 뒷구석 철문으로 나가면 되었다. 사실 시내로 빨리 가고 싶을 때 뒷문으로 나다녔다.
프랑스의 스튜디오에 살면 최소 3-4개의 열쇠가 주렁주렁한 달린 열쇠 꾸러미를 필수적으로 받게 된다. 나는 총 4개의 열쇠가 달린 꾸러미를 받았는데, 하나는 스튜디오 키, 또 하나는 우편함 키, 또 다른 키는 건물 중문 키, 나머지 하나는 NFC태그로 들어갈 수 있는 건물 대문 키였다. 그래서 프랑스에선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물건 중 하나가 열쇠다!
유럽인들은 기본적으로 아날로그 방식을 더 신뢰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여기서부터 엄청난 낯설음을 느끼게 된다. 코로나 시국에 “아! 마스크!”하고 다시 집으로 후다닥 들어갔던 것처럼 프랑스 생활 초창기에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아! 열쇠!” 하고 다시 방으로 튀어 들어가기 일쑤였다.
게다가 이 열쇠들은 사용법도 까다롭다. 열쇠를 돌리면서 손잡이도 같이 돌려야 하거나 잠금장치를 조금 받쳐 들고 오른쪽으로 두 번 반 돌려야 한다거나 여간 번거롭지 않을 수 없었다. 문 한 번 열겠다고 문 앞에서 낑낑대다 결국 열받아서 애꿎은 방문만 쾅 친 적도 있을 정도다. 언제 한 번 에어비앤비를 이용해 빌린 파리 숙소에서는 문이 열리지 않아 2시간 동안 패닉 상태였던 적도 있다. 나는 프랑스인의 열쇠 사랑을 이해 못 하겠다. 분명 악령이 들려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런데 프랑스에선 왜 이리 구식인가 싶다가 이상한 데서 최신식이라 한 번쯤 당황하는 순간이 있다. 모두가 내게 부러워했던 것 중 하나가, 이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프랑스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 굉장히 많다. 100년이 넘은 오래된 건물에 기계문명의 혜택이 들어서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으로 작용했다. 3명만 들어가도 완전히 꽉 차서 어색하게 바싹 붙어 있어야 했지만 7층까지 계단을 올라가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또 그 오래된 건물에 대문은 비밀번호로, 중문은 NFC칩을 이용해 출입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 보안을 위해서 대문은 밤과 새벽 동안에는 자동으로 잠겨 있었다. 아침부터 낮 시간까지는 그냥 열려 있었고, 대문을 들어서면 양옆으로 우편함이 있었고, 인터폰과 중문이 있었다. 중문은 밖에서는 열지 못하게 되어있는 구조로 인터폰을 통해서 위에서 열어주거나 NFC 칩을 이용해 열 수 있었다.
이와 관련되어 일화가 하나 있다. 프랑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비 오는 저녁, 심심해서 주변도 둘러볼 겸 털레털레 산책하고 건물에 들어서려고 하니 대문이 열리지 않았다. 와 큰일 났다. 대문 비밀번호도 모르고, 어디 갈 데도 없는데 어쩌지. 특정시간이 되면 대문이 자동적으로 잠기는 것을 몰랐기에 얼마나 당황했던지.. ‘노숙해야 하나?’ 하는 마음에 덜컥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여태껏 그냥 열리던 문이 갑자기 왜 안 열리나 고민하며 심각하게 십여분을 오도카니 서있었다. 그러던 중 한 젊은 남자가 안에서 나왔다! 그가 대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얼른 쏙 들어가 노숙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밤중에 나와준 그 남자에게 너무 고마웠다. 그나저나 구식 외관에 가려진 최신식 시설이라니, 방심할 수 없는 프랑스다.
하지만 이 멋진 건물 꼭대기층에 있는 내 스튜디오에 들어서면 환상이 금세 사라졌다. 혹시 하녀방이라고 들어보셨을라나? 보통 프랑스 건물의 꼭대기 층은 <하녀방>이었다. 과거 하녀들이 사용했던 방으로 건물 내부에 따로 마련된 좁고 어두침침한 계단으로 출입할 수 있고 여름엔 더우며 겨울엔 춥다. 사실상 다락방이자 한국의 옥탑방과 환상적으로 똑같은 환경이다. 내 스튜디오는 이런 하녀방을 개조한 원룸이었다. 처음엔 몰랐다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어떻게 지붕을 개조해 원룸으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지붕층인 7층에는 칸칸이 나눠진 7개의 원룸이 있었다. 이곳이 원래 지붕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 바닥소재로 보통은 바닥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유리였다. 그때 이곳이 하녀방이었음을 알아 차려야 했었는데..
그곳에서 6개월간 살아본 결과, 자신 있게 보증할 수 있다. 프랑스 하녀방에서 산다는 건, 에어컨 없는 한 여름 찜통 프랑스에서 죽는 걸 의미했다. 현실 속의 나는 부잣집 아가씨가 아니라 꼭대기층에 사는 하녀였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