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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금 Oct 19. 2023

난, 어쩔 수 없는 불법체류자

꼭 그렇게만 해야 속이 시원했냐아-!



  아이, 별 일이야 있겠어?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마음 한 구석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불법체류자라니!


  학생 비자를 받아 프랑스에 와도 합법적으로 체류하려면 도착 3개월 안에 OFII(오피, 프랑스 장기 체류증)를 발급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체류자 신분이 된다. 프랑스에 도착 후 나는 OFII를 발급받기 위해 필요서류를 등기우편으로 보냈다.


프랑스 등기우편 송부증


  발급기관에서 답장이 와야 했는데 여름은 바캉스 기간이라 대다수의 공공기관이 쉰다. 그러니 아무리 기다려도 서류는 오지 않았다. 프랑스에 온지 갓 3개월, 나는 불법체류자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바캉스가 중요해도 그렇지,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유럽의 행정처리 속도가 늦다는 건 유명한 일이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그 당사자가 되니 미칠 것 같았다.


  불법체류자, 한국에서도 무겁게 다루는 주제인데 의도치 않게 이런 신세가 되다니. 불법체류는 두려움과 불편함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삶 그 자체였다. 괜히 더 사리게 되고, 웬만해선 이 작은 도시 VICHY에서만 있고 싶었다. 괜히 큰 도시에 갔다가 잘못 휘말리게 된다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어학원에도 문의를 해가며 불법 체류자가 된지 열흘정도 지나니 드디어 서류가 와 있었다. 굉장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수업을 마치고 나보다 한 달 늦게 프랑스에 와서 정상적으로 OFII 서류를 수령받은 한국인 친구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옆 도시, Clermont-Ferrand클레르몽페랑으로 향했다.


두근두근 OFII를 받으러 가는 길


  다행히 OFII 사무소에서 무사히 장기 체류증을 발급받았다. 괜히 잘못되거나 뭐 하나 안 챙겼다가 계속 불법체류자 상태로 또 이곳에 와야할까봐 좀 걱정도 됐었는데 다행이었다. 여권에 붙여진 체류증을 받아 들었을 땐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정말 기뻤다. 함께 간 사람들 모두 정상적으로 체류증을 발급받았다.



   이날은 정말 즐거웠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체류증을 받아서 불법체류에서도 벗어났지, 다같이 저녁을 먹으러 간 수제 버거 가게에서 감자튀김 2개도 서비스로 받았지, 큰 도시에서 쇼핑도 했지, 한인마트에서 라면도 3개나 샀지! 중간에 한바탕 비가 내려 쫄딱 젖었지만 행복한 내 마음을 대변하듯 하늘엔 무지개가 떠 있었다.

 

확실히 소도시 VICHY와는 달랐던 클레르몽페랑의 풍경






  프랑스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은행계좌를 개설할 때가 생각난다. 프랑스의 오프라인 문화를 처음 접한 경험이다. 은행 접수처에 가서 은행계좌를 만들고 싶다고 하니 일단 예약날짜와 시간을 정하게 했다. 도와주는 직원은 영어가, 나는 프랑스어가 어색해서 예약을 잡는 것도 한참 쩔쩔맸다.


손에 써서 "맞지?"하며 물어봤다

  언어를 잘못 이해해 혼란이 있을까봐 내 손에 볼펜으로 직원이 알려준 날짜와 시간을 적어 보여주고 맞는지 확인한 후에 예약을 확정지었다. 한국은 번호표 뽑고 기다리면 계좌를 만들 수 있는데, 프랑스는 예약을 해야 비로소 은행원을 만날 수 있었다.


  은행계좌를 개설할 때는 한 칸짜리 사무실에 들어가 100장은 되어 보이는 두터운 서류에 뭔 서명을 그렇게 해야 했던지. 그렇게 서명하고 체크하는데 심지어 통장도 없었다. 또다른 충격이었다. 수표, 우편, 열쇠 등 아날로그식 프로세스를 지향하는 프랑스인데 통장이 없다니 넌센스다.


  입출금 내역은 스마트폰 앱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나 하루이틀은 지나야 처리된 내역을 볼 수 있었다. 신청한 체크카드도 우편으로 받고, 카드 비밀번호도 우편으로 받았다! 한국에서라면 내가 비밀번호를 설정할 수 있는데 프랑스는 은행에서 정해준 비밀번호를 사용해야 했다. 게다가 통장 이자는 커녕 보관료를 출금해갔다. 당시 26세 이하여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더 많은 금액을 은행에 내야 했을 것이다.


  이후로도 한국에선 완전한 구시대적 유물인 수표책과 여러가지 안내사항도 우편으로 왔다. 편지를 좋아하는 나는 사무적인 우편이라도 내게 우편물이 오는게 좋아 차곡차곡 모아뒀다. 자그마한 나무 우편함에 편지가 꽂혀 있을 때마다 얼마나 설렜던지. 우편함 열쇠로 열어 두툼한 우편물들을 확인하던 그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은행 계좌정보, 체크카드, 수표책 등 모든 것이 우편으로 왔다
프랑스 우체부의 자전거. 남색과 노란색의 조합이 인상적.



  바캉스때문에 나를 불법체류자로 만들었던 프랑스. 계좌를 만들 때도 해지할 때도 예약이 필수였던 프랑스. 우편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프랑스. 프랑스는 내 일상을 느리게 만들었다. 천천히 걷는 걸음도, 갈수록 느긋해지는 성격도, 유유히 흘러가는 삶도 죄다 프랑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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