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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금 Oct 19. 2023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에서 살고자 했던 의지

죽음의 문턱에서 얻은 자신감


해외에서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나 득도하다



  갑자기 급성장염에 걸려 생사를 오가다 3일만에 진료받은 후 의사가 준 두 장의 종이. 그걸 들고 근처의 약국으로 향했다. 어학원가는 길에 매일같이 지나치던 약국. 여기에 약을 타러 오다니.. 약국으로 들어서니 웬 아랍인 여자가 나이 지긋한 남자 약사와 실랑이 중이었다. 사흘간 아무것도 먹지 못해 체력이 딸려서 힘든 와중에 프랑스 약국은 대기의자도 없었다. 서서 오래 기다리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아랍인 여자가 나가고, 나는 약사에게 가서 인사하며 의사가 준 종이 두 장을 건넸다. 그 종이에 있는 바코드를 찍더니 곧바로 몇 가지 약을 꺼내 주고, 복용법을 알려주었다. 의사가 준 종이가 진단서였단 걸 그제야 깨달았다. 약은 17.95유로. 진료비와 합했을 때 대충 55,000원 정도 들었다.



진단서와 받아온 급성장염 약들


  약을 받아오니 늦은 저녁이 되었다. 진이 다 빠졌지만 약을 챙겨 먹고 곧바로 잠들었다. 너무 지치고 새로운 하루였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오른쪽 눈이 정말 심할 정도로 부어 있었다. 장염으로 면역력이 떨어진 탓에 다래끼가 생긴 것이다. 문제는 반대쪽 눈도 똑같이 붓고 있었다. 내일 두 눈이 땡땡 부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면 그만큼 끔찍한 것도 없을 텐데.. 자연치유가 되길 빌었지만 종일 눈이 부어오르고 열감과 가려움증이 심해서 가까운 약국으로 나가 다래끼 약을 샀다.


다래끼약으로 받은 항생제 점안액, 약 4500원


  약 기운인지 오전에는 좀 말짱하고 죽도 먹을 수 있어서 엉망이 된 방을 치웠다. 4일 만에 드디어 샤워도 했다. 그러고 나니 곧바로 지쳐 오후 내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래도 약을 먹은 지 이틀 만에 드디어 설사가 완전히 멎었다. 위장은 여전히 꼬여 있어서 먹는 건 힘들었기에 죽을 만들어 먹었다.


  장염 6일차에 드디어 식욕이 돌아왔다. 마구마구 먹고 싶었다. 몸이 조금 괜찮아진 듯해서 오후 수업에 나갔는데 가는 도중 체력이 딸려서 후회했다. 그 다음날에 거의 일주일 만에 죽이 아닌 식사를 했다. 미친 짓이지만 새콤한 것이 땡겨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라고 행복했다! 혼자서 연신 "맛있어!"를 외치며 행복한 식사를 했다. 프랑스 VICHY에 와서 제일 행복했던 식사였다.


  이후, 나는 정수된 물을 끓인 후 식혀서 먹기 시작했다. 어릴 때 엄마가 보리차를 끓여서 식혀 놓듯, 끓이면 더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더 조심하니 물갈이에서 완벽히 벗어났다. 그러나 조금씩 정수해 1.5L씩 끓여서 식혀 먹는 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여간 귀찮은 일이었다. 그러나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내 몸이 좀 고급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프랑스에서 급성장염을 계기로 다시 태어났다. 열이 올라 의식이 혼미해져 가는 와중에 ‘아,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죽는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팠고, 중간중간 의식을 잃을 정도였다. 정신이 있을 때는 탈수를 막기 위해 이온 음료에 물을 타서 계속 마셨다. 정말 맛없었다. 팔자에도 없던 프랑스 진료실도 다녀왔다. 어거지로 내야 했던 용기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에서 살고자 했던 의지가 내 삶을 바꿨다. 죽을 뻔하니까 두려울게 없어졌다.


  이후 한 주간의 어학원 결석으로 한 단계 낮은 반으로 내려갔다. 오히려 좋았다. 수업이 어렵지 않으니 어학원에 가는 게 더 이상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숨통이 트였다. 수줍고 두려워서 질문 하나 못하던 내 성격이 180˚ 바뀌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수업 진행을 방해하더라도 무조건 질문했다. 일본 도쿄대 애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해할 때까지 물어봤다. 남들이 다 아는 단어도 나 혼자 모르면 분위기 봐서 그냥 넘어가지 않고 무조건 손들고 이게 뭐냐고 물어보고 답을 알아냈다. 하나도 쪽팔릴 게 없었다. 창피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이 중요했다. 더 이상 눈치 보지 않았다. 그렇게 직접 알아낸 것들은 고스란히 내 것이 되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무서울 게 없어졌다.


  먼저 웃으며 인사하고 먼저 말 걸었다. 유치원생처럼 쉬운 단어만 사용해서 말하더라도 창피해하지 않았다. 어학원 생활과 공부에 여유가 생기고 친구도 더 많이 생겼다. 적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하니 다른 학생들이 죄다 싫어하는 까다롭고 염세적인 선생님도 나를 편애하기 시작했다. 왜 나처럼 질문 안 하냐고 다른 학생들에게 질타를 할 정도였다.


  한국에 있는 부모님은 내가 심하게 아팠으니 프랑스는 더 이상 있을 곳이 못 된다고 돌아오라고 성화였다. 유학원 원장님도 내가 귀국하는 편이 좋겠다고 하실 정도였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는 여기서 목표한 바를 다 이루겠노라고, 이제야 진짜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다고 했다.


  갑자기 찾아온 재앙이었던 급성장염은 내 프랑스 생활을 단숨에 바꿔 놓기도 했지만, 내 인생도 아예 바꿔 놓았다. 나는 그 지옥 같은 일주일을 통해 되돌아가기 싫은 강을 건넜고, 새로 태어났다. 새로운 시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정상을 향해 올라가다 옆을 보니 또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더라도 역경을 제대로 이용하면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직접 경험하고 깨달았다. 죽다 살아나니까 낙심이 되기는커녕 오기가 생겼다. 포기하고 싶기는! 죽기 직전까지 다녀왔는데 내가 무서워할게 뭐지? 세상이 달리 보였다. 목표만 보며 올라가느라 숨이 꼴까닥 넘어갈 것 같았는데 강제로 잠시 멈추게된 그 시점에 내 옆으로 펼쳐진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순간만 견디면 된다. 내가 제일 피하고 싶은 것, 외면하고 싶은 것을 바라보니 내가 이것만 달리하면 더 잘 될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들어왔다. 죽음의 문턱을 밟으니, 더 높은 레벨의 반? 남 눈치? 무식해 보일까 하는 두려움? 한 순간에 사라졌다. 두려움만 극복하면 된다. 힘들지만 제일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직면하면 된다.


  상상은 그만하고 현실과 눈 마주치자. 언제나 할 일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거다. 그 순간이 인도할 미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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