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비도 의사가 결제한다
프랑스에 온 지 어느덧 100일이 가까워지고 있던 8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부터 몸이 이상했다. 열이 오르고 설사가 멈추지 않았다. 침대와 화장실까지 단 3걸음, 작은 스튜디오에서 오전 내내 그 3걸음을 얼마나 왕복했는지 모르겠다.
십여 차례 설사가 이어지다 마지막엔 녹색 즙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뭔가 잘못되었다고 직감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엉망이었고, 몸에서 쓴 내가 났다. 평안할 줄만 알았던 주말은 완벽한 재앙이 되었다. 뭘 먹을 힘도 없어 계속 침대에 누워 있다가 배가 아프면 화장실에 갔다. 열이 올라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 인터넷으로 증상들을 검색했다. 몇 분의 검색 후에 스스로 내린 결론은 급성 장염이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어제 먹은 케이크? 두 달째 하고 있는 물갈이? 지속적으로 쌓이고 있는 스트레스? 일사병으로 나빠진 컨디션 때문일까? 어쩌면 모두 다 원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계속 열은 오르고 시야는 흐릿했다. 그에 맞춰 정신도 흐려졌다.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말이 안 통하니 응급실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 견뎌야 할 모든 게 싫었다. 타국 병원, 철저하게 낯선 곳에서 고독한 불편감을 느끼며 혼자 있기보다 아파도 집에서 엉망인 채로 있고 싶었다. 고통 속에서 잠들었다.
새벽 3시쯤 불현듯 깼고 계속된 설사로 엉덩이가 아팠다. 아직은 늦은 밤인 한국에 전화해 엄마와 유학원 원장님에게 급성 장염인 것 같다고 연락을 취했다. 그 후 13시간을 내리 자다가 깼고, 드디어 앉아 있을 수 있어서 인덕션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내가 먹을 죽을 만들었다.
그런데 곧바로 엄청난 두통이 몰려와 저녁 내내 아팠다. 근방의 대도시에 잠깐 가 있는 한국인 친구 세웅에게 연락해 돌아올 때 지사제와 두통약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다음날 저녁 8시쯤 고맙게도 세웅이 집 앞까지 와서 약을 전달해 주었다. 거의 좀비인 내 상태를 보곤 핼쓱해졌다고 했다. 먹은 건 이온음료 조금, 소금과 설탕 한 꼬집을 탄 물뿐이었으니 당연했다.
아픈지 3일째 되는 날에도 녹색 설사가 계속되었다. 찾아보니까 쓸개즙이 장에서 흡수가 안되어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내내 먹은게 없어서 설사는 그냥 즙이었다. 장염에는 탈수가 치명적이라 이온음료를 사러 나갔다. 잠깐 나갔다 오는 것도 힘들었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머리는 띵했다. 간신히 간 수업에서는 식은땀을 왕창 흘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 아픈 와중에 도대체 왜 수업을 갔을까 싶다.
사흘간 먹은 게 없으니 몸무게 2.5kg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여전히 자다 깨다 오후 1시 넘어 몸을 일으켰다. 명치가 너무나 아팠고, 계속 설사를 했다. 몸에선 여전히 고약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또 이온음료를 사러 나갔다 오는데 몸에 힘이 없고 계속 식은땀이 났다.
프랑스는 전부다 예약인데 일반 진료 시스템도 예외가 아니다. 아프면 먼저 일반의(généraliste)에게 진료 예약을 해야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이 선에서 치료가 가능하면 다행이다. 만약에 일반의 선에서 치료가 안되면 전문의(spécialiste)에게 가기 위한 진단서를 받고 진료 예약을 해야 한다. 전문의에게도 치료받을 수 없는 중병이어야 대형병원(L’Hôpital)으로 간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일상적으로 병원에 간다는 표현은, 의사네 집에 간다(aller chez le médecin)이다.
유학원에서 곧바로 일반의 진료를 예약해 주었다. 프랑스에서 병원에 가게 되다니, 나도 드디어 의사네 집에 간다. 화요일 오후 6시 반. 아프고 난지 3일째가 되어서야 병원에 갈 수 있었다. 프랑스어도 잘 못하는데 혼자 가서 설명을 어떻게 한담.. 아픈 와중에도 걱정이 앞섰다. 의사에게 뭐라고 말할지 사전을 찾아가며 머리를 굴렸다. 그나저나 이 상태로 혼자서 여기까지 찾아갈 수 있을까?
혼자서는 도저히 못 갈 것 같아 다른 한국인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정을 얘기하고 병원까지의 동행을 부탁했지만 그녀는 어학원 숙제를 해야한다며 거절했다. 혼자서 가야 했다. 간신히 후들거리는 몸으로 유학원에서 알려준 주소로 찾아갔다. 5분이면 가는 거리가 30분이 걸렸다.
병원(이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보다는 작은 사무실에 가까웠던 진료실은 평범한 가정집 사이에 있었다. 처음 가보는 길이라 조금 헤매다 <Docteur>라고 쓰여있는 명판을 발견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나이가 지긋하게 든 중년 남자가 나를 맞아줬다.
한국에서 의사는 보통 하얀 가운을 입고 있으니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평상복을 입고 나를 맞아준 그 남자가 먼저 와있던 대기 환자를 부르기 전까지 의사인지 몰랐다. 사실, 의사가 환자를 직접 맞아줄 것이란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들어가니 작은 응접실이 있었고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응접실은 전체적으로 하얀 톤으로 깔끔한 느낌이 났다. 의사는 내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고, 나는 아픈 와중에도 프랑스의 진료실이 처음이라 긴장되어 쫄아있었다. 십여분쯤 지났을까, 의사가 진료실 문을 열고 응접실을 보며 “Mademoiselle마드모아젤”하며 나를 불렀다.
난생 처음가보는 프랑스 진료실. 이런 곳은 현지인만 오는 곳일 텐데, 나는 프랑스 작은 마을의 병원도 와보는구나. 아픈 와중에도 기분이 이상하고 감회가 새로웠다. 진료실은 아주 짙은 나무색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창문 바로 앞에 짙은 갈색의 육중한 책상이 문을 마주 보고 있었다. 권위적으로 보이는 그 책상엔 잡다한 서류가 잔뜩 올려져 있었다.
의사와 나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한국에서는 의사 옆에 앉았는데 이것 참 생소했다. 나는 어눌한 프랑스어로 3일 전부터 계속 설사했고, 열이 나며 두통이 심해 급성 장염인 것 같다고 얘기했다. 의사는 진지하게 들으며 일단 보험이 있냐고 물었고, 없다고 하니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나선 있는지도 몰랐던 뒤쪽 진료용 침대에 누워보라고 했다. 배 이곳저곳을 쿡쿡 누르고 만져보며 아프냐고 물어봤다.
짧은 촉진이 끝나고 의사와 다시 마주 앉았다. 그는 종이에 빠르게 뭔갈 써 내렸다. 그리고 별안간 진료비는 25유로(당시 3만원 가량)라고 했다. ‘이렇게.. 결제를 하는 건가..?’라고 생각하며 얼떨떨하게 20유로 지폐 두 장을 내밀었다. 의사는 내게 잔돈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사는 잠깐 몸을 들썩이더니 앉은자리에서 뒷주머니의 지갑을 꺼내 15유로를 거슬러 주고, 뭔갈 쓴 종이 두 장을 주며 약국에 주라고 했다. 그리고 나를 문까지 직접 배웅해주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접 경험한, 팔자에도 없던 프랑스 소도시의 내과 진료였다. 나는 여전히 후들거리는 몸으로 의사가 준 종이 두 장을 들고 약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