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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2024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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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Dec 16. 2024

<클로즈 유어 아이즈>(2023)


(아래는 영화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 특집을 위해 작성한  리뷰이다.)





그냥 보기에 <클로즈 유어 아이즈(Cerrar los ojos)>는 '그' 빅토르 에리세의 영화라기엔 좀 빈약하고 평이해 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한밤중에 롤라의 집으로 들어가는 일련의 실외씬은 비가 엄청 많이 오는 데도 빗줄기가 하나도 안 보이게 촬영되었고, 영화의 대부분은 단순한 숏-리버스 숏 구도의 대화 장면으로 이루어져있죠. 우리에게 에리세는 <벌집의 정령>(1973)이나 <생명선>(2002)에서의 고요하고 강렬한 이미지로 보통 각인되어있는 만큼, 이런 특징들은 여러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에 대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제 생각에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일부러 빈약하고 평이해 보이도록 찍은 영화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무엇보다 철저히 '시네필리아에 대한 잔혹극'이기 때문이예요.


훌리오가 노화에 따른 외모의 변화에 괴로워했다는 막스의 말, 훌리오를 다시 기억하려는 것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2012년의) 스페인 영화계가 아니라 TV 탐사보도 프로그램이란 사실, 시네마토그라프 모델로서 영화 외부의 매체(사진, 책, 녹음기, TV, 플립북, 노트북, 그리고 아주 간접적이지만 스마트폰)들이 한참 제시되고 마지막에야 등장하는 (폐쇄된) 영화관, 그리고 거기서 상영되는 <작별의 시선>에 집중하지 않고 줄곧 훌리오의 눈치를 살피는 몇몇 관객… 쉬이 생각되는 것과 달리,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는 (극장, 필름, 그리고 영화에의 숭배를 필수요소로 취급하는) 수구적 근본주의자로서 시네필적 이념이 깔려있지 않습니다. 대사나 홍보용 인터뷰에서 그런 '꼰대스러움' 느낄 수 있다고 해도, 이 영화의 '작가'로서 에리세에겐 그런 게 없어요. 오히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전통적 시네필을 뒷바침하던 역사적 조건들 ―영원한 스타, 자아 탐색의 장소로서 극장, 필름과 극장이 보장하는 경험의 일회성/고유성, 걸작만이 주는 초월적인 에피파니 등등― 을 의심하거나 해체하는 데에 거의 바쳐진 작품이죠. 다만 시네필의 입장을 단단히 고수하면서 말입니다. (이 점에서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 인 예술/매체들써, 혹은 그와 더불어 영화의 당대적 (불)가능성을 타진한 최근의 영화들 ―<마틴 에덴>, <아네트>, <드라이브 마이 카>, <프렌치 디스패치>,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트렌케 라우켄> 등― 과 은근히 공명합니다)


딱 영화 중간, 해변가 마을의 아지트에서 <리오 브라보>의 'My Rifle, My Pony and Me' 장면을 따라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침내 다시 조우한 미겔과 훌리오/가르델이 노래를 주고 받는 후반부 씬과 붙여 놓을 때, 이건 저 위대한 서부극에의 오마주로 그치지 않아요. 함께 노래하는 게 늘 우정의 행위로 성립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직접적인 비교군이 되는 겁니다. (이렇듯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플롯은 의외로 몹시 세밀하게 구조적입니다) 여러 관객들은 "영화에 기적이란 건 드레이어가 죽은 후에 없었다고!"라는 막스의 강렬한 대사를 기억하지만, 그 대사를 쓰고 연출한 빅토르 에리세가 칼 드레이어 사후(1968)에야 <도전과제(Los desafíos)>(1969)라는 옴니버스 영화를 통해 연출자로서 궤적을 시작한 건 잘 모르죠. 에리세는 (적어도 자기가 직접 관통한 영화사에선) 영화가 줄 수 있는 '기적'이 걸작을 (많이? 열심히? 잘?) 본다고 해서 주어지지는 않는단 걸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잔혹하리만큼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열을 올리며 역설하는 게 아니라, 줄곧 터벅터벅 걷는 미겔의 걸음걸이처럼 세계를 느슨하게 배회하며 문제들을 수면에 올리는 '산책자적' 법론으로 일관하면서 말이예요. (물론 이런 방법론이 '일반 교양 관객'들에겐 눈을 감고 잠을 청하도록 재촉하는 요소긴 했겠습니다만!)

 

영화의 마지막 씬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보고 들어야 할 겁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이런 거에요: 처음의 야누스 석상은 부분의 닝타임 동안 하나의 몸에 깃든 복수의 얼굴/영혼/정체성/이름의 상징로 기능하지만, 마지막으로 가면 앞으로는 미완의 영화를 보고 뒤로는 현재의 훌리오/가르델을 보는 미겔의 은유(이자 동시에 미겔의 관객성과 훌리오/가르델의 관객성의 공존에 대한 은유)로 문득 변모한다는 것입니다. <작별의 시선>의 결말 속에서 레비는 피아노 연주 때문에 눈을 감았다 뜨며 동요하기도 하고 음악을 음미하기도 하는 딸을 보지 못하지만, 영화를 보는 (두 겹의) 관객은 그걸 볼 수 있죠. 레비는 맨얼굴의 딸을 마주하자마자 쓰러져 죽음을 맞이해 눈을 감게 되지만, 관객은 프랑크와 주디스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또 정확히 그 순간부터 문득 울려퍼지는 영사기 소리를 들으)면서도 영화로부터 튕겨져 나가지 않습니다. 찬가지로, 미겔이 종종 스크린에서 고개를 돌려 훌리오/가르델의 눈치를 살핀다고 해도 <작별의 시선>은 상영을 멈추거나 상상적으로 단절되지 않습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게 되죠.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단지 큰 화면과 두터운 소리를 즐길 수 있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스크린과 스피커에서 펼쳐지는 이미지에 대해 우애나 반목을 나눌 다른 관객들과 잠시 함께 하는 행위 걸 말입니다. 이는 초기영화의 능동적 관객을 논한 영화사 연구와도, 관객이 스크린의 이미지로부터 호명=주체화된다는 스크린 이론과도 다른 궤의 관객성 담론입니다. 이보라 평론가의 아름다운 말씀을 빌리자면, "기적은 당사자의 경험만이 아니라 그의 과거를 공유하는(혹은 독점하는) 목격자들의 수많은 증언으로 달성되므로, 이때 주변인들은 기적의 목격자가 될 것이며 그래야 관객(성)은 도모"되는 것입니다.


'카메라-영사기-극장'의 삼각형이 관객에게 요구하는 수동성은 흔히 생각되는 것처럼 순전한 집중과 몰입만 형성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간격들도 같이 형성하죠. 영화와 나 사이, 다른 관객과 나 사이, 내 몸과 내 정신 사이의 간격들 말이에요. 자크 라캉이라면 이걸 잔여라고 했을 테고요. (이론에 있어 이를 가장 적확하게 지적한 건 응시에 있어 '라캉의 푸코화'를 비판한 조운 콥젝의 『정형심리학적 주체(The Orthophsychic Subject)』니다) 이 모두를 함께 향유하며 허구와 스스로를 가시적인 것으로 경험하는 것, 달리 말해 '세계'들 사이의 차이로써 전체(Tout)가 조각나고 뒤섞이고 다시 조각나는 난잡한 순환을 액추얼하게 경험하는 것에서, 빅토르 에리세는 시네마토그라프 모델로서 영화의 현재적인 가능성을 찾고 있어요. 보다 정확히, 시네마토그라프 모델의 과대표화된 위상을 해체하면서 바로 그 속에서 시네마토그라프 모델의 유효성과 가능성을 탐색하려 한 것입니다. 장 뤽 고다르가 <영화의 역사(들)>에서 제시한 저 유명한 아포리즘, "영화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레디케를 돌아보아도 죽지 않게끔 해준다."를 그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자기 나름대로 소화해본 게 아닐까요? (사실 아닌 게 아니라, 여러 부분에서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의 역사(들)>과 비슷한 아이디어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앞서 말했듯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이 저런 경험과 그에 따른 에피파니를 항상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마지막에 (훌리오/가르델을 연기한) 배우 호세 코로나도가 우리를 바라보다 눈을 감는 건 그 때문이 아닐까요. 눈을 감아도 여전히 들 영사기 소리를 염두에 둘 때, 이건 상영되는 이미지와도 다른 (두 겹의) 관객들과도 분리된 채, 다만 그것을 의식하면서 '나'의 내면을 향하려는 몸짓일 겁니다. 말하자면 각성 상태에서의 꿈 말이죠. 에리세는 이것이 '누구'로서의 몸짓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훌리오인지 가르델인지 프랑크인지, 혹은 아예 다른 누구일지 모를 당장의 관객이 코로나도의 신체를 빌어 침묵을 지키고 자신의 내면을 향할 뿐이죠. <작별의 시선>을 함께 보자던 미겔의 내기는 이 마지막 순간에야 진정으로 시작됩니다. 영화적 '기적'의 현현이란 늘 한치 앞이 안 보이는 내기에 맡겨져있다는 걸 에리세는 이 순간에 아주 희망적으로 긍정합니다. 막스의 말대로 영화는 (필름 영화 쇠락한 결정적 기점이 아이폰 5가 출시되고 <어벤저스>가 개봉한) 2012년 즈음에 이미 거의 "산업의 고고학"이 되었지만, 에리세는 그 고고학이 당적인 유효성을 가질 가능성에 자신의 모든 걸 걸어본 거예요. 그 점에서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오늘날의 신경증·도착증적인 포스트 시네마 상황 속에서 (에리세 본인을 포함한) 전통적 시네필(-리아)가 한 역사적 현상이었음을 받아들이자는, 그리고 그럼에도 그 현상이 우리에게 주었던 '기적'의 가능성을 마냥 포기하진 말자는 필사적인 제안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몹시 곡예적이며 신중한 작업이 아닐 수 없죠.


그런데 제게 의심스러운 건, 여기서 에리세가 종종 현실과 허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식으로 군다는 거예요. 저는 '영화 밖 현실은 이랬지' 같은 대사가 자꾸 나오는 걸 떠올리고 있습니다. 가령 미겔은 훌리오의 실종을 흥미진진하게 상상하다가 왜 굳이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라고 말꼬리를 붙일까요? 어쩌면 그냥 농담이 아니라, 허구의 과잉에 대한 방어기제는 아닐까요? 이는 훌리오/가르델의 경우와 겹쳐 놓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떤 비평에서, 영화 속에서 '기적'으로 상정되는 게 훌리오의 귀환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눙치고 논의를 전개하는 것에 놀랐습니다. 자신이 전세계를 누볐다고 말하는 가르델은 <작별의 시선>의 소품인 주디스/차오슈의 사진과 (레비가 자신을 투영했던) 체스의 화이트 킹을 간직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는 실종 기간 동안 훌리오와 프랑크와 레비가 파편적으로 뒤섞인 삶을 살았던 게 아닐까 싶어집니다. 레비와 주디스가 주고 받는, 바다에게 내 아이 대신 나를 삼키라고 고하는 아버지의 노래에 어느 순간 훌리오는 지나치게 몰입해버린 거죠. (프랑크에게도 딸이 있다는 설정을 이쯤에서 떠올려봅시다) 그리고 미겔은 아나에게 분명 가르델이 자신의 물건들의 출처를, 그리고 옛날의 자신을 영화로써 대면한다면 "아버지" 훌리오로 돌아올 지도 모른다고 했잖아요? 미겔/에리세는 영화를 통해 영화에서 빠져나오는 걸 일단의 '기적'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어쩌면 에리세는 시네필리아의 당대적 불가능성에 천착하면서, 그 불가능성의 이유와 해결이 현실의 우위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오자').


하지만 그건 시네필리아의 조건을 해체하는 걸 넘어 시네필리아 자체를 냉소하는 게 아닐까요? 왜냐하면 시네필리아란 단지 현실보다 영화를 사랑하는 걸 넘어 현실과 영화의 중첩을 과도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광기니까요. OAS(프랑스 군사비밀조직)의 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순간 (모든 정치적 의제를 제쳐두고) 더글라스 서크의 영화떠올렸다가 같이 있던 자크 리베트로부터 반동이라고 욕을 처먹은 고다르나, "[영화]파일의 순환을 초래하는 것은 작가의 의도를 부식시키면서까지 해당 영화들을 보고자 하는 욕망일 것"이라 진솔하게 지적하는『영화도둑일기』의 한민수를 저는 떠올리고 있습니다. 이와 비교하면, 자기 세계의 기원을 영화로써 (문자 그대로) 마주하는 가르델의 관객성이 향해야 할 곳이 (영화 안에선 내기로 끝난다 해도) 이른바 현실이라고 에리세가 바란다는 게 저는 좀 맥이 빠져요. 오해를 피하고자 서둘러 부연하건대, 제가 불평하는 건 이 영화에서 '기적'이 현실로의 회귀로 상정된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현실의 중력을 너무 의식하는 에리세의 태도입니다. 가 <벌집의 정령>이나 <남쪽>에서 펼쳐 보였던 (특히 영화로 표상되는) 허구에의 매혹과 공포, 실재성과 가상성이 상호 간섭하며 뒤섞이는 세계관이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선 교묘하게 현실의 우위라는 ‘도덕적’ 입장의 세계관으로 치환된 건 아닐까요? 달리 말해, '적당히 즐겨라'라는 보편의 명령을 그가 수용해버린 건 아닐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의 중력이 여기서 직시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이 영화 속 대부분의 돈 거래가 아주 은근히 처리된다는 사실을 떠올려 주십시오)


일찍부터 근본주의 시네필을 경계하는 시네필이었던 세르주 다네는 와 다른 양태의 시네필 상을 가늠하며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내가 왜 영화를 입양했는지 안다. 그 대답으로 영화가 나를 입양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카포의 트래블링」) 즉 '나와 영화가 서로사랑하며 이를 표현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정신적 상호 교환의 시네필리아를 그는 논한 것입니다. 그러나 2023년의 (다네보다 4살 연상인) 빅토르 에리세는 그와 달리 시네필(-리아)을 중화해야 한다는 수준의 주장으로 자기도 모르게 향한 것 같습니다. 이 위대한 시네필 감독이 30년만에 장편 영화를 만들면서 얻은 결론이 이런 거라면 우울해지지 않을 수 없어요. 영화 문화가 교양 혹은 "고고학"이  흐름에 저항하려면, 우리는 오히려 에리세가 여기서 보여준 것과 달리 천박하고 게걸스럽고 병적인 시네필(리아)에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삶과 영화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지 않거나 실패한 사람들", 사회의 정상성으로 회수될 리 없는 시네필(-리아)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이렇게 경탄과 의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이상한 영화가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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