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상반기가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순식간에 지나갔다"면 하반기는 아주 복합적으로 흘러갔다.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지는 방식으로 여러 나날이 구체적으로 헤아리기 어렵게 지나간 것이다. 순전히 문화 분야에서의 사건만 따져도 ―김민기(7월 21일)와 송길한(12월 22일)이 죽은 해에 한강이 한국 첫 노벨문학상을 탔고, 민희진과 뉴진스가 케이팝에 투쟁의 이미지를 들여온 해가 곧 라이즈의 팬덤인 브리즈가 케이팝 내 폭력성과 무책임함을 지나치게 일깨운 해이며 또 불특정의 팬덤들이 케이팝 문화와 정치적 행동을 급진적으로 겹쳐버린 해라고 정리하면 어떤가?―그런데, 특히 12월 3일 이후는 하루가 일주일처럼 느껴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좋은 일이 많았는지는 잘 모르겠고, 나쁜 일은 세상에 씨발 문자 그대로 존나 엉엉 울고 구토를 해도 해소가 안 될 만큼 많았다. 하여튼 이번에도 짧은 글 발표나 강연을 했던 내역 등을 여기에 정리해본다. 앞서 말하자면 여기에 쓴 내역 모두가 상반기 작업들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가능하면 위 링크의 포스트를 먼저 읽어주시란 얘기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의무방어전' 느낌으로북토크나 영화제에 참여한 것은 굳이 셈하지 않았다.)
7월 19일
지난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주관한 '2024년 한국영화 100선'의 연장선에서, 이 리스트의 경향 분석 및 여기에 꼽힌 영화들에 대한 여러 필자의 리뷰를 실은 책 『한국영화 100선 : '청춘의 십자로'부터 '헤어질 결심'까지』가 ('아카이브 프리즘 총서' 1권으로) 출간되었다. 나 역시 여기에 리뷰 몇 편을 실었는데, 각각 <그들도 우리처럼>(1990), <남부군>(1990), <경마장 가는 길>(1991), <서편제>(1993), <첫사랑>(1993),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5),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으로 거의 90년대 전반기의 영화들을 맡았다. 사실 내가 여기에 실은 리뷰들이 아주 신통하진 않다고 생각되어 상당히 아쉽지만, 그래도 재밌는 글이 꽤 수록되어 있어서 ―가령 금동현의 <바람불어 좋은 날>과 <최후의 증인> 리뷰는 씁쓸하게 낄낄거릴 수 있는 좋은 글이었다― 책 자체는 읽거나 소장할 만 하지 않은가 싶다. 한편 <서편제> 리뷰는 작품에 대한 얘기보다는 임권택에 대한 나의 평소 관념을 풀어놓는 데에 더 주력한 글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책에는 편집이 좀 많이 들어간 판본으로 실려있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워 <서편제> 리뷰의 초고를 여기에 옮겨둔다.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면, <서편제>는 여러모로 애매한 위치에 서있는 영화다. 임권택의 필모그래피에 있어 비평적으로든 상업적으로든 상상 이상의 성공을 거둔 명실상부한 대표작임에도 불구하고, 요즈음에는 ‘현재적인’ 텍스트로 거의 소환되지 않을 뿐 더러 임권택을 논하려는 이들에게도 상대적으로 덜 언급되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민족이나 전통 같은 담론이 예전처럼 사람(혹은 기관)들을 자극하진 못해서? 아니면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그로써 성립되는 미(美)가 격한 거부감을 일으켜서? 그도 아니면 <서편제>가 사실 그 정도로 대단한 영화는 아니어서? 당장 이 자리에서 확답을 내리긴 어려울 성싶다. 하여 이 자리에선 이 말들의 옳고 그름을 직접적으로 논하는 대신, 다른 말의 가능성을 짧게나마 제기해보고자 한다.
임권택이 스스로의 영화를 논하며 내놓은 키워드인 “인간에의 예의”를 일부러 모른 척하고 그의 영화들을 돌아볼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름아니라 그 속에 가득 찬 실패들이다. 이때의 실패란 이중의 의미를 갖는데, 하나는 대부분의 영화가 인물들이 줄곧 실패하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재현의 실패 혹은 포기라 할 만한 순간들이 있다는 의미이다. 임권택이 인물의 몸에 상처를 입히거나, 인물을 프레임 밖으로 몰아내거나, 상식적으론 연쇄일 수 없는 데쿠파주를 짜거나, 현재와 무관해보이는 플래시백을 삽입하거나, (파졸리니/들뢰즈가 말한) 자유간접화법이라 할 만한 보이스 오버를 쓸 때, 거기엔 무언가로 곧장 호명/재현되는 것에 대한 인간의 실패와 함께 호명/재현의 역할에 대한 영화의 실패가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임권택과 존 쿳시는 서로 유사한 방법을 견지하는 예술가들인 것 같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어째서 <서편제>는 이렇게 애매한 위치에 서있는 영화가 됐는가? 어쩌면 그것은 영화 외적인 담론의 변화 이전에 영화 내적인 담론의 불편함 때문이 아닐까? 여기서 임권택은 실패를 ‘한국적인 것’에 접속시킨다. 그래서 유교가 이용된 역사적인 방식과 유교의 이념이 지닌 차이, 가족이라는 전통적 관습과 그 관습에 어울리지 않는 욕망을 지닌 구성원 사이의 차이, 나아가 결코 하나의 집합적 개념이 될 수 없는 ‘한국적인 것’에 내재된 필연적인 차이가 인물들의 신체를 경유하여 괴이하게 폭발하는 순간을 우리는 끊임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하면 <서편제>의 광기 어린 한(恨)의 풍경은, 그것이 너무 진솔했던 나머지 그 이후의 사람들이 마냥 납득하기엔 너무나 불편하게 다가왔던 게 아니었을까? 임권택은 늘, 그리고 특히 여기에서 더욱 강하게, ‘한국(영화)적인 것’이 애초에 우리가 살아온 모순대로 재현되고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외쳐왔으니 말이다.
늘 그렇듯 짜증난 거 아니다...
7월 29일
지난 6월 부산의 전시공간 오픈 스페이스 배에서 열린 만화가 선우 훈 개인전 Read Game Book: 게임북을 읽어라〉의 도록이 제작 및 공개되었다. 이 도록은 전시 첫 날인 6월 1일에 열린 집담회 「만화, 전시라는 매체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녹취록으로 아카이빙하는 데에 거의 할애되었으며, 바로 여기서 다운로드받고 읽을 수 있다. 여기서 나와 선우 훈, 란탄, 정원교 등은 (전통적인 형태의) 만화와 미술 전시가 만날 필요성과, 또 어떻게 유효하게 결합할 수 있을지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누었다. 집담회 현장이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라이브로 송출되었고 또 한 동안 영상이 안 내려갔던지라 ―한데 선우 훈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이 라이브 영상이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나중에 따로 의견을 더해주셨었다. 그중에는 유튜브에서 영상이 내려가자 아쉬움을 표한 분들도 계셨는데, 이 녹취록으로 그 아쉬움이 좀 해소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말을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 녹취록에는 (아주 심한 비문이나 의도와 달리 잘못 말한 걸 제외하면) 현장의 말이 고스란히 실리는 게 좋다고 생각하여 나의 발언은 거의 수정하지 않은 채 실었다.
"저는 여기 패널 분들 중 상대적으로 미술에 친화적인 필자다 보니, 이번 전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다만 만화 전시를 기획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제가 오랫동안 갖고 있던 어떤 물음에 대해 고민해볼 기회가 될 수 있게다 생각이 들었어요. 란탄 작가님께서는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가끔 그림이 걸려 있는 전시 공간을 돌아다닐 때 어느 순간 ‘이것은 굉장히 만화적인데’라는 생각을 종종 받기도 하거든요. 가령 프랜시스 베이컨의 삼면화를 생각해보죠. 베이컨은 양쪽 비슷한 구도의 그림을 배치하고 사이에는 다소 엉뚱하게 보일 수 있는 예외적인 그림을 놓아둡니다. 이에 대해 어떤 미술평론가들은 가운데 그림의 형상성과 표현성이 양쪽의 그림에 의해 잡아당겨져 속도를 발생시킨다고 이야기 했는데요. 저는 만화를 보는 방식이 서로 다르게 나눠진 그림들 사이에 공통의 지평을 유추하는 것이라면, 이런 것 역시 일종의 만화적 경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북해에서의 항해』에서 언급된 미술가 마르셀 브로타스는 샤를 보들레르,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를 마치 추상만화의 방식처럼 기묘하게 추상화시킨 책자를 전시장에 배치해두거든요. 시가 쓰인 행을 지워버린다거나, 특정 문자만 페이지에 배열한다거나 하는 책 작업 같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책자 기획은 제가 보기엔 너무나도 추상만화의 형식과 닮아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만화가 아니라고 순전히 말해도 될까요. 물론 동일한 영상을 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극장, TV, 컴퓨터, 노트북의 스크린 등 다른 기기로 경유하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소화하고 또 다른 장르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저 역시 분명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어떤 만화적인 경험이라는 것 자체가 안 생긴다고 말해도 괜찮을까라는 물음이 항상 있었어요. 당연히 부피가 큰 질문이긴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오면서 이와 관련해 어떤 답이라도 혹시 구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안고 왔습니다."
10월 18일
(2020년 이후 1년에 최소 한 번씩은 들리게 되는) 대구 오오극장에서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기획 및 개최한 "한국 애니메이션 복원전"에 「한국 애니메이션에 있어 독립? <황금철인>과 <은하전설 테라> 사이의 시간」이란 제목의 강연을 진행했다. 처음에 오오극장 측은 (같은 날 연달아 상영했던) <황금철인>과 <은하전설 테라>를 묶을 수 있는 '배경'에 관한 주제를 요청해왔고, 이에 나는 지난 6월 29일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 가졌던 (마찬가지로 <은하전설 테라>를 주제 삼은) 추혜진 인디애니페스트 프로그래머님과의 대담 때 풀지 못한 애기들을 보다 자세히 풀어보고자 했다. 즉 "독자적인 한국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한 그 의지로 인해 오히려 한국 애니메이션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닮아갔다면? 달리 말해 독립의 의지가 '선진문물'의 성격을 사후적으로 바꾼 것이라면?"이라는 질문과 그 역사적 맥락을 논하는 데에 이 강연 자리를 쓴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옛날 한국 애니메이션들은 그 자체로 재밌게 볼 만한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 작품들이 처한 상태를 더 잘, 더 재밌게, 더 진솔하게 논할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당시 질문 시간에 짧게 얘기했던 건데) 1967년 제작된 신동헌의 <홍길동>과 <호피와 차돌바위>는 이 날의 논의에 있어 흥미로운 예외적(이라 오히려 적합한) 사례라 할 만한 작품들이다. 달리 말해 일본 애니와 닮지 않으면서도 독창적이고 걸출한 스타일을 구사한, 그러나당대와 후대에 있어 한국 애니메이션사의어떤 연결도 계승도 이루지 못한 비극적인 사례인 게다. 혹 흥미가 돋으신다면 유튜브나 DVD를 통해 한 번 보시기를 권해본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1990년까지 한국은 애니메이션 매출 규모만 세계 3위였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애니메이션을 생산했어요.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박정희 정부의 어린이 정책도 있겠고, 애니메이션이 일반 극영화가 아닌 문화영화로 분류되어 외화수입 쿼터를 위한 '떨이상품'으로 막 제작된 것도 무시할 순 없겠지만, 무엇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하청 때문입니다. 아까 약간 흘리듯 말씀드렸지만, 당시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는 동화를 그리고 셀에 색을 칠하고 프린트하는 외주업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여기서 동화라는 건 형상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기 위한 프레임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체로 충분히 크고 중요한 산업이었죠. (...) 게다가 박정희 정부가 70년대 후반에 해외 애니메이션 하청 수주를 수출 주력산업으로 밀어주면서, 80년대엔 일본 애니의 웬만한 하청은 다 한국이 도맡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성장했어요. 그래서 당시 한국 애니메이터들은 독자적으로 중산층에 편입될 수 있었고, 또 일본 현지의 베테랑 못지 않은 그림 실력도 얻었죠."
"자, 이제 <황금철인>과 <은하전설 테라>로 돌아가봅시다. 그런데 왜 이 애니메이션들은 질이 확연히 떨어지는 걸까요? 솔직히 말해 <황금철인>은 프레임을 뭐 이렇게 잡았나 싶을 만큼 캐릭터의 형상이 이상하게 잘려 나간 장면이 많고, <은하전설 테라>는 극장판 애니인데도 몇 해 전에 만들어진 <은하철도 999> TVA보다 훨씬 부자연스럽고 액션의 앞 뒤가 안 맞습니다. 후자의 경우 첫 시퀀스에서 공격당하자 환마성주의 수염이 갑자기 자라는 우스꽝스런 장면을 떠올려 주시면 될 것 같아요. 당시 애니메이터들에겐 독립에의 의욕도 있고, 오랜 하청 작업에서 얻은 노하우도 있었을 텐데, 왜 결과물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 주변에 갑자기 사업한다고 나서는 분들만 떠올려봐도 알 수 있듯이, 오래 일했고 많은 명함을 갖고 있고 나름의 노하우도 갖고 있다고 해서 좋은 기업을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한국 애니메이션에는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한 재능도, 기획도, 장비도, 인력도, 투자도 전무했습니다."
"여기서 오해의 여지가 있는 듯하여 부연하건대, 창작 애니가 실패해서 일본 애니 모방으로 우회했다는 애기가 아닙니다. 창작 애니의 불가능성이 곧장 모방으로 육화되었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창작의 실패와 모방이 각각 차례대로 일어난 게 아니라 동시에 이뤄진 거예요. 요컨대 70년대의 애니메이터들은 정말로, 어느 정도 선진화와 독립을 추구하긴 했습니다. 다만 그게 환경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나 너무 이르고 어설픈 독립의 시도였기에, 그 의지는 당대의 선진이었던 일본 애니를 어설프게나마 따라하는 쪽으로 갔던 거죠.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일본 애니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보편적인 것’으로 승인하게 되었고요. 후대의 입장에서 이걸 비판하기는 아주 쉽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얘기를 돌아보면 비판의 타겟을 명확히 잡는 게 어려워지죠. 일본 애니와 한국 애니의 기형적인 관계는 사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90년대와 00년대에 다른 방식으로, 더 기괴하고 요란하게 나타납니다만, (...)"
쪽프레스와 함께 하는 만화비평모임의 6번째 프로그램 <윤아랑의 만화읽기>를 기획 및 진행했다. 쪽프레스의 브랜드인 goat에서 지금껏 출간된 비일본계 만화들 중 일부를 함께 읽고 논한 스터디로, 만화가 아니의 오프닝 렉쳐를 포함해 11월 12일부터 12월 24일까지 이어졌다. 멤버들 다수가 이런 그래픽노블들의 어법이나 형식에 익숙치 않아 처음엔 난항이 예상되었으나(그리고 몇몇 분은 마지막까지 이 어법이나 형식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기도 하셨으나...), 흥미진진한 의견들을 열성적으로 개진하고 나누어주신 멤버들 덕분에 이번에도 너무나 보람차고 즐거운 자리가 되었다. 너무 즐거운 나머지 정해진 시간을 매번 1시간씩 넘기며 모임이 끝나긴 했지만 말이다... 이 자리를 빌려, <윤아랑의 만화읽기>에 참여해주신 멤버분들께 다시 한 번 큰 감사를 전한다. 여기서 내가 기조발제를 위해 쓴 리뷰들은 멀지 않은 때에 공개할 수 있을 터이니 만약 관심이 있으시다면 조금만 기다려주시라.
그리고 12월 3일.
하이메 에르난데스의 『사랑에 서툰 사람들』을 다루는 4회차 모임이 있던 날이다. 늘 그랬듯 얘기를 나누다보니 오후 11시가 임박해 어쩔 수 없이 급하게 모임을 마무리하는 와중이었는데, 한 멤버가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폰을 보더니 그 자리에 있던 우리에게 말했다. "지금 친구들한테 계속 카톡이 오는데, 비상계엄이 떨어졌다는데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고, 이어서는 딥페이크거나 가짜뉴스라고 생각했으며, YTN의 생방송 중인 뉴스를 처음 봤을 때는 북한과 교전이 일어났나 싶어 긴장했다. 그리고 30분 사이에 쌓인 기사들을 급히 훑으며,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났다는 걸 제대로 실감했다. 헛웃음과 공포와 당혹감이 뒤섞인 눈빛과 말을 주고 받던 우리는 일단 자리를 파했고, 나는 "우리 체포되지 말고 살아서 다시 만나요!"라고 모두에게 인사를 전했다. 웃음을 섞긴 했지만 거기엔 어떤 과장도 농담도 없었다. 그리고 잠시 집에 들린 후 나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스스로가 90년대 후반생 치곤 힘들고 위험한 시위에 많이 참여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이 날 여의도로 향하는 길에선 (박근혜 탄핵 정국 직전의 광화문 시위 이후) 정말 간만에 목숨이 걱정되는 긴장을 느꼈었다. 다행히 내가 국회의사당 정문에 도착(대략 새벽 1시 30분)하기 직전 비상계엄 해제안이 통과되긴 했지만, 드러나면 드러날 수록 정말로 목숨이 위태로운 시공간에 내가 입회했었다는 게 명확해져 기분이 이상하다. 그런데 이 기분은 공포나 경악보다는 묘한 슬픔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하여튼, 매일매일 새로운 경악스런 말과 행동이 터져나오는 아직까지는 이 비상계엄/쿠데타에 대해 길게 쓸 수 없을 성싶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당신께 말씀드리고 싶다. (얼마 전의 남태령 투쟁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렵기 때문에, 또 잘 알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 알기 위해 시위에 나가고 연대한다. 그러니 "아무것도 우리가 희망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계속 연대해주시기를 당신께 간곡히, 간곡히 부탁드린다.
12월 9일/12월 13일
(2020년은 2020년대가 아니라는 '상식적' 주장을 일부러 모른 체하자면) 2020년대 전반기의 끝을 맞아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2020년대의 영화와 만화를 각각 12편씩 꼽아 탑스터로 리스트를 만들었다. 왜 12편이냐 하면10편은 내게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또 왜 대중음악이나 문학이나 미술 전시는 꼽지 않았느냐 하면 이 두 분야만큼 열심히 디깅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확대하면 작품 제목이 보일 터이니 굳이 여기다 제목을 다시 적지는 않겠다. 참고로 영화 리스트에 (2019년 텔루라이드 영화제에서 공식 월드 프리미어를 가진) 켈리 라이카트의 <첫 소>를 넣은 건 이 영화가약간의 추가 후반작업을거친 이후 2020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돠었기 때문이다. 한편 만화 리스트에 있어, 올해 믿을 만한 안목을 지닌 모두가 극찬한 올리비에 슈라우벤(Olivier Schrauwen)의 <선데이(Sunday)>나 에이단 코치(Aidan Koch)의 <나선과 다른 이야기들(Spiral and Other Stories)>은아직도보지 못했기에 이 작품들을 넣는 게 맞나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못내 아쉽다. 또한 이중 『총체적 과장: 밀트 그로스의 미치광이 코믹 스트립(Gross Exaggerations: The Meshuga Comic Strips of Milt Gross)』과 『나사식(Nejishiki)』 2개는 옛날에 발표된 작품들을 새로 편집하고 묶은 복간 작품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