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한 문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가 되신 분만 읽어주세요.
여그오면 언새끼든
오지 마라 오면누구든죽여버린다
불과 어제 새벽에 아버지에게 온 문자다.
일어나면 가끔씩 그런 카톡이 와 있다.
XX들아잘살아라 나는오늘죽는다
지금느그XX죽인다
오늘밖에 나가서 누구든하나죽인다
새벽 2~5시쯤, 육두문자와 온갖 죽음이 뒤섞인 카톡 몇 개가 와 있는 게, 그 패턴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습관처럼 휴대폰을 확인하는 순간, 나의 의식은 곧장 문자가 와 있는 시간대를 짚는다.
한 밤중도 아침도 아닌 그 새벽 시간을 보며,
그 어투가 가진 잔인함의 척도를 계산하며,
나는 그 밤 사이 엄마가 겪었을 혹은 그저 벌어졌을 그 어떤 일들을 가늠한다.
찰나에 이뤄지는 이 모든 것들은 마치 파블로프의 개채럼 자동반사적이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반사적으로 반응할 만큼 단련된 일이기도 하다.
가끔은 카톡을 보지 않고 즉각적으로 채팅방을 나가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잠깐 동안 스치듯 각인된 글자들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시력과 기억력이 좋은 것도 문제다.
어떤 때는 카톡을 읽지 않고 바로바로 채팅방을 나가버리면, 그게 문제가 되어 화가 돌아오기도 한다.
아버지의 화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형태와 질량을 바꿀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그 점은 그의 문제이기도,
우리 가족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칠순이 넘어서도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발악하는 아이 같은, 일명 금쪽이 같은 행동을 하는 집안의 어른을 보면.
그 어떤 의미로든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의 수양도.
이 괴로움의 끝도.
저런 문자를 보는 아침이면 조용히 뇌까리고야 만다.
"죽어야 끝나. 죽어야."
죽음이 범벅된 카톡이어서인지, 내가 그를 빼다 박았기 때문인지.
나의 언어에도 즉각적으로 죽음이 담기고야 만다.
40대가 되어서도, 아직도 영향을 받고 있다.
원가족과는 정서적으로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도 영향을 받고 있다.
나이는 어른이지만 아직도 미숙한 탓이다.
저런 문자쯤은 그저 덮어버리고 동요하지 않을 깊은 마음의 수양이 쌓였어야 하는데.
아직도 남편이란 이름으로 저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엄마에게도,
엄마를 애초에 놓아줄 마음이 없는 인질처럼 줄곧 붙잡아두고 있는 그에게도 원망의 마음이 솟구칠 때면.
정말 이럴 때마다 이 나이 되도록 헛살았다는 기분이 든다.
나의 부모는 그런 사람들이다.
한평생 생존에 치이고, 생존에 매달린 사람들이다.
당장 오늘의 생존이 벅찬 부모, 하루하루 사는 데 급급한 부모.
가정 폭력이 난무하는 가정의 엄마와 아버지.
그런 부모 밑에서 크는 자녀 중에 가장 슬픈 자식은 똑똑한 자식이다.
물론 내 부모를 비난하고 욕하기 위해 꺼낸 말은 아니다.
그들도 하루하루 벌어 먹고 사는 것이 빠듯한 고단한 삶을 산 불쌍한 영혼들임이 맞다.
하지만 너무 생존에만 급급한 부모 밑에 똑똑한 자식은 조금 더 불쌍한 영혼이다.
앞에 글 '입양을 준비하는 여자가 된 1,2'에서 등장하는 나의 친구들도 생존이 급급한 부모 밑에 똑똑한 자식들이다.
A는 서울 소재 중상위권 대학을 나와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고액 연봉자이고.
B의 학교는 서울 소재는 아니지만, 그녀 역시 IT 분야의 고액 연봉자이다.
A는 앞서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똑똑하고 개인의 능력도 출중하지만, 아버지와 얽힌 돈 문제로 집안에 큰돈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B는 오래 만난 남자 친구와 결혼하고 싶어 했지만, 양쪽 집안이 가진 평탄하지만은 않은 가정사와 경제 사정으로 최근 만나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B는 호쾌한 성품답게 쓰린 이별 후에도, 나와 A처럼 인생을 함께 헤쳐나갈 동반자를 만나 결혼하고 싶다면서, 끊임없이 짝꿍을 찾아 나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정말로 B의 그 호연지기를 닮고 싶다.
내가 그녀의 호연지기를 배울 수 있다면, 미숙한 어른의 테를 조금 더 떨궈 낼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나는.
나 역시 생존이 급급한 부모 밑에 똑똑한 자식인가.
일곱 살이었다.
가정 폭력의 기억이 온전한 영상으로 남아있는 최초의 나이다.
그때 내가 했던 생각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이불이 깔린 장판 위로 날아가듯 크게 엎어지면서, 우습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상황이 마치 드라마 같아서, 믿기지 않고 어안이 벙벙해서, 우스웠다.
그리고 그날 나는, 아무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집안에 세 들어 살고 있어 생생하게 소리를 들었을 옆집도,
그 순간 문을 두드리며 찾아왔던 아버지의 친구도,
가정은 마치 성역과 같아서, 누구도 우리 가정사에 침범하지 않았다.
그 언제가 몇 번 불러보았던 경찰조차 마찬가지였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 공부밖에 살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가정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성공의 길은 오직 개천용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필사적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지금 그 나이 때 자녀를 키우는 친구들은 어린 나이부터 줄곧 책을 끼고 살았던 내 모습을 언급하며 책을 읽지 않는 자녀를 걱정하곤 한다.
그런 내 노력은 중학교까지는 차고 넘쳤다.
초등학교까지 말하면 너무 우습지만, 중학교 때까지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십 대에 마지막으로 한 IQ검사 결과는 143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그때도 지금도 매해 SKY를 30~40명쯤은 보내는 학교에서 줄곧 전교 20등 안팎이었다.
(학교장 추천으로 서울대 수시에 넣었기 때문에, 조금 더 괜찮은 성적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파증불고, 깨진 시루는 돌아보지 않아야 하는데.
내가 이렇다.
이미 깨진 시루를 계속 돌아보며 아쉬워한다.
아주 잠시 한때 명석했던 두뇌를 이렇게나 집착하고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어리석은 어른이고, 중생이다.
이 나이 먹고 저런 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굳이 이렇게 언급하다니.)
하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단 한 가지 결과를 내지 못했다.
수능, 나는 가장 중요한 수능을 망쳤다.
수능을 보고 고사장 밖으로 나오며 울었고, 결과를 보고 망연자실해했다.
나는 그냥 담임 선생님이 점수에 맞춰 쭉 그어준 수능 배치표에 걸린 학교와 학과에 맞춰 대학을 지원했다.
그 결과 나는 서울 소재 중하위권 대학에 생각해 본 적 없는 학과로 진학했다.
차라리 내가 원하던 학과를 장학금 받고 갔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최소한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고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헛똑똑이었다.
똑똑하면서도 멍청했다.
나는 개천의 용이 되지 못했다.
나는 개천의 개구리로 주저앉았다.
열아홉 살의 나는 아주 근시안적이었고, 그런 나를 지도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재수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럴 형편도 아니었고, 나의 멘털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잡아주고 인도해 줄 사람은 없었다.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어릴 때 내가 조금만 더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랐다면.
우리 집이 조금만 더 내 학업에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 줬더라면, 하다 못해 과외라도 한 번 받아 봤다면.
지금의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넓이만큼, 나에게 더 넓은 세상이 있음을 알려줄 수 있는 어른이 있었더라면.
아주 조금만 더 다양한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나에게 긍정적으로 사회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르쳐줄 수 있는 부모가 있었더라면.
생존에 급한 부모들은 이 모든 것을 신경 쓸 마음의 여력이 없다.
설령 마음의 여력이 있어 자녀를 살펴보려고 해도, 안타깝게도 대개의 그런 부모님들은 인생과 미래를 바라볼 시야와 안목이 부족하거나 없는 경우가 많다.
파증불고.
'이미 깨진 질그릇을 돌아볼 필요가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이나 만회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지 않고 깨끗하게 단념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나는 종종 그렇게 깨진 시루를 오래도록 들여다보며, 깨진 조각을 붙들고 어루만졌다.
그때 당시에는 해도 되는 생각이겠지만, 나 스스로를 책임져야 할 이 나이에 하기는 부적절한 생각임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미숙한 어른의 어리석은 미련이 불쑥불쑥 올라오곤 한다.
대학에 입학하고부터 나는 무너져 내렸다.
원하지 않는 대학, 원하지 않는 공부, 내 이십 대 초반은 엉망이었다.
학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사실 나는 수능을 본 순간에, 공부라는 것에 학을 뗀 사람이었다.
공부라면 지긋지긋했고,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원 없이 했다는 마음이 있었다.
사실 진정한 배움과 공부의 시작은 대학부터 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공부는 대학을 들어가는 순간에 끝이 났다.
마지막쯤에 가서 남들 준비하는 자격증과 어학 능력을 부랴부랴 준비했지만,
그런 태도로 좋은 곳에 취직하기란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몸소 사회를 깨닫기 시작했다.
먹고사는 것의 지난함.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톱니바퀴로서 제 몫을 감당하고 산다는 것의 벅참.
'남의 돈을 버는 게 쉬운 줄 아느냐'라고 하는, 그 진부한 고단함.
그런 과정을 통해 나는 부모님이 겪었을 생존의 어려움을 절감하며, 그들의 상황과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욱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가 되어 버렸다.
나도 생존에 급급한 부모가 될 것 같아서.
꼭 똑똑하지 않더라도, 눈치가 있는 자식이라면 안다.
똑똑한 자식들이 더 빨리, 더 잘 알아채는 법이지만.
더 많은 길이 보이고, 어느 길이 더 좋은 길인지, 더 안전한 길인지 알게 되는 법이다.
물질적인 풍요가 주는 기회의 다양성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똑똑한 자녀나, 눈치를 빨리 챈 아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가 어렵다면.
당장 현실의 벽에 막혀 많은 것을 제공하기 어렵다면,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라도 애써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생존에 급한 부모 밑에 있는 또 다른 똑똑한 아이가 슬픔에 잠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똑똑한 자식을 가진 부모님들에게-
부디 아이에게 더 넓은 시야와 시선을 선사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 똑똑한 머리로 마음공부를 더 했어야 하는 건데.
파증불고, 필자는 이제라도 그 애통함과 미련을 끊어내고 정진하기 바랍니다.
헛똑똑이는 앞으로 제 앞가림이나 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