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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험미 Sep 06. 2024

입양을 준비하는 여자가 된 1

그녀를 지켜보는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

내가 브런치에 처음으로 발행한 글.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가 된'이라는 표현은 내가 직접 한 말이 아니다.

그 말은 오랜 친구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그렇게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가 된 거지."


라고 친구 A가 멋진 문장의 마침표를 찍듯이, 명료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친구 A, 그녀가 입양을 준비하는 여자다.


인생을 아우르는 긴 인연에는 부모, 배우자, 형제, 자매, 자식 등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피가 섞이지 않고도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는 오랜 인연의 대표적인 관계라면 친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유독 그런 긴 인연을 가진 친구들이 많은 편이다.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친하게 지내온, 30년이 넘는 친구부터.

중, 고등학교에서 만나 대략 25년 넘게 만나온 친구들이 제법 있다.

물론 스무 살 이후부터 사회 나와서 만난 이들 중에도 10년 넘게 이어진 인연은 있다.

손으로 꼽을 정도의 숫자이긴 하지만.


아무튼 친구 A는 그런 어릴 적 친구 중 한 명이다.

20 몇 년쯤은 된 오래된 친구.


A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에서 만나 친해진 친구였다.

대학을 가고 사회에 나와서도 계속 안부를 물으며, 식사와 수다로 관계가 이어져 왔다.

A와 친하게 지낼 당시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이 더 있었는데, 얼굴을 보는 것은 A 뿐이었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인 2019년도 겨울.

나는 A에게서 B의 소식을 듣다가, B와의 만남을 만들어 볼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등학교 1학년, 그때 당시에 나는 A보다 B와 더 가까운 사이였다.

(물론 이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나만의 생각이다. 그들의 의견은 나와 다를 수 있다.)  

어쨌든, 내 안에는 B와 더 친하게 지냈던 시간들이 선명했다.

1년 내내 같이 붙어 다니며 밥을 먹고, 쇼핑을 다니고, 각자 같은 반의 반장과 부반장으로 나름 고생도 같이하며 서로의 집을 놀러 다니던 시간들.


그런 관계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채, A에게 소식만을 전해 들을 때면 나는 늘 마음이 한 구석이 무거웠다.

B와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은 것은 모두 나의 잘못이라는 부채감이 있었다.

그런 마음의 짐에도 불구하고, 그날따라 왠지 B의 소식을 듣고 있다 보니 B와 불쑥 재회하더라도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뜬금없이, 갑작스러우며 객기 어린 요청을 A에게 부탁했다.


무려 15년 만에, B와의 만남이라는.


나에게는 다소 무모하며 치기 어린 조심스러운 부탁이었는데, A는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흔쾌히 내 요청을 수락해 주었다. 

A는 속전속결로 바로 그 자리에서 B에게 연락했다.  

나는 언제나 차분하고 이성적인 A의 추진력에 다분히 놀랐지만, 결과를 당장 알게 되어 기쁘기도 했다.  

B도 좋다고 했다면서, 우리는 셋이서 같이 만날 약속을 잡았다.

A가 고맙게도 오작교 역할을 해주어 우리는 강남에 있는 한 와인 바에서 거의 15년 만에 만날 수 있었다.


B는 여전했다.

여자치고 큰 키에 시원시원한 생김새, 호탕한 말투도 그대로였다.

보지 못한 긴 시간이 무색할 만큼 우리는 어색함 없이 편안한 사이가 되었다.

긴장한 얼굴로 마음을 졸였던 내게 선물이 될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코로나 기간을 지나 2024년이 된 지금까지 종종 만나 허심탄회하게 술 한잔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A와 B를 만난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A도 B도 상당히 술을 잘 마시는 편이다.

날은 더웠고, 우리는 2차로 시원한 맥주를 쏟아붓고 있었다.

더위는 우리를 조금 더 쉽게 취하게 했고, 우리는 적당히 붉어진 얼굴로 온갖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이야기가 나왔고. 

(대개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났을 때 과거의 추억을 곱씹는 경우가 많듯, 우리도 이런저런 옛날 얘기를 하고 있었다.)

B는 지금도 이런저런 이유로 힘든 것처럼, 고등학교 때도 은근 왕따를 당하며 힘들어했었다고 스치듯 말했다.

B는 그 어떤 의도도 없이 그냥 지나가는 말일 뿐이었지만, 나는 그 말이 몹시 신경 쓰였다.

마치 B가 내게 크나큰 상처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기분이었다.  

나는 비겁하게도 A가 잠시 화장실에 가 B와 둘만 남았을 때.

그동안 내 안에 자리했던 그 부채감에 대해서 고백했다.


"항상 너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었어. 부채감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친했는데, 2학년이 되면서 A와 나는 문과로 가고 B는 이과를 가면서 반이 갈라졌다.

2학년 때부터 우리는 함께 하는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고3이 되어 나는 B가 같은 반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은근히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너 힘들다는 거 알고 있었는데... 그때 내가 너한테 잘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어. 널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좀 괜찮았을 텐데.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때도 지금도 B는 당차고 자기 색깔이 확실했다.

그래서 아이들의 왕따도 대놓고 무시하는 게 아닌 은근하게 따돌리는 방향이었던 것이다. 

B의 그 당찬 성향은 여전했다. 

판결 선고를 기다리듯 시선을 내린 나에게 B가 호쾌한 어투로 말했다.


"힘들었지. 뭐 안 힘든 건 아니었는데. 그런 것도 지들이 그러든지 말든지 다 지나가. 다 지나가고, 결국엔 아무것도 아니지."


B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볍게 웃으며 맥주잔을 들어 올려 보였다.  


"지금 이렇게 힘든 것도 다 지나간다. 술이나 마시자."


나는 먹먹한 마음으로 어쩐지 맛을 느낄 수 없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화장실에 갔던 A가 돌아왔고, 우리는 술을 더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의 느낌뿐일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우리의 이야기는 전보다 더 깊은 주제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B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주저 없이 내보일 수 있는 사람.

나라면 타인의 시선에 함몰되어 나의 추한 부분, 흉이 되는 부분은 어떻게든 감추고 꽁꽁 싸맸을 텐데.

B는 자신의 상처를 부끄러운 기색 없이 밝힐 수 있는 용감하고 담대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느꼈지만 B는 참 걸크러쉬의 전형 같은 인물이었다.

나는 B의 그런 유쾌함과 호탕함이 늘 부러웠다.


B는 요새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에 관해서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법적 공방까지 얽힌 복잡한 일임에도 B는 처음부터 끝까지 꾸밈없이 솔직했다.

나는 아무리 친구라지만 자신의 상처와 민낯을 타인에게 여실히 드러낼 수 있다는 것에, B가 그 정도로 솔직해질 수 있다는 것에 적잖이 놀랐다.

A와 나는 B의 상황에 대해 한 마디씩 조언과 응원의 말을 보태기도 했다.


그런 B의 문제에 더해져 우리의 대화 주제는 원가족의 가정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알 수 없는 고양감을 느끼며 술기운을 빌렸다.

B의 용기에 감화된 것일 수도, 혹은 내 심리적 방어 저지선이 술기운에 무뎌진 것일 수도 있었다.

지금 이 순간 A와 B라면 괜찮을 것이라고.

남편을 제외하곤 처음으로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내 상처를 내보였다.

지인에게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너희들은 다 우리 집에 온 적이 있었지."


A와 B는 어떤 분위기를 느낀 듯했다.

내 말투와 술자리 내내 우리가 했던 깊어진 이야기 주제들을 통해서.

다들 표정이 진지해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말 한 적 없는데... 우리 집은 정말, 가정 폭력이 너무 심했어."


B는 어쩐지 처연해진 내 분위기를 다독여 주려는 듯, 짐짓 말을 덧붙여 주었다.


"그때 우리 부모님들 세대에 안 그런 집이 어디 있었겠어. 다들 어느 정도 그랬지."


나는 상대방을 다독여 줄 때도 시원시원하고 호방한 B의 그런 기질이 좋았다.

나는 심각하지만 심각하지 않게 말했다.


"그렇긴 한데. 그런 거 말고. 정말 심했어. 아주, 극도로, 심했어."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아서, 황급히 티슈를 집어 눈을 살짝 찍고 말았다.

눈물이 떨어지지 않고, 그저 티슈로 가볍게 닦아 내는 정도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무방비하게 펼쳐진 내 민낯이었다.

나는 내 민낯이 부끄러우면서도 동시에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어쨌든 다들 그런 내 모습에 조용히 담담히 있어 주기만 하는 으로도, 나는 마음의 안정과 위로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증오와 동시에 연민을 유발하는 존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란 존재.

부모란 존재.


"정말 너무너무 증오하면서도, 아직도 그 증오가 불쑥불쑥 올라오고 누그러들지 않으면서도. 그러면서도 하나의 개인으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바라볼 때는 불쌍하고 동정을 느끼기도 해. 자식으로서의 증오와 한 인간으로서의 연민이 동시에 존재한 달까."


나는 꺼져가는 불씨처럼 옅게 타오르는 분노를 연기처럼 뱉어냈다.


"낳아 놓고, 온갖 고통만 줄 거라면 왜 낳았어."


그때 A가 내게 말했다.


"그래서..."


자칫 구질구질하고 뻔한 클리셰 범벅으로 흐지부지 될 이야기에 A가 깔끔하게 마침표를 찍어 주었다.


"그렇게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가 된 거지."


 나는 A의 그 산뜻한 타이밍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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