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을 거부하다
"팔자에 자식운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아무리 딩크니 뭐니 해도 자식운이 없으니까 애가 없는 거지, 자식운이 있었으면 애가 없었겠어요?"
나는 마치 중요한 경기의 심판이라도 된 것처럼 부모로서 나 자신의 감점 사유를 발견하면, 바로 스스로에게 가차 없이 점수를 차감했다.
나의 정신 건강과 몸 상태를 체크하고, 말을 검열하면서 부모 자격 결여 상태(아이를 낳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애초에 결혼을 선택하며 남편과 딩크가 되기로 얘기가 된 순간부터, 나의 검열은 조금 더 촘촘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계속 나를 점검하고 검열하는 것은 사실 귀찮고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피곤한 일은 남이 하는 검열에 대응하는 것이다.
"요새는 갖고 싶어도 못 갖는 사람들이 정말 많죠. 제 주위에도 시험관으로 낳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직 안 늦었어요."
라는 흔한 검열 결과 통보는 9년 차 딩크쯤 되면 그야말로 타격감 제로, 아무렇지도 않다.
다만, 9년 경력의 딩크도 팔자와 자식운은 처음으로 듣는 낯선 기준이었다.
검열의 기준이 나름 엄격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생각지 못한 신선한 관점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들은 말이었는데, 평소 생각도 못 해본 주제에 당황한 나는 아무런 답변도 드리지 못했다.
그야말로 오랜만에 입 꽉 다물고 듣기만 했다.
나는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가 되어 많은 검사, 검토, 점검의 말을 들었다.
"결혼을 했어도 자식이 없으면 진정한 가족이 아니에요."
"아이를 안 낳을 건데, 결혼은 왜 했어요? 정말 무책임하네요."
"남편과 상의는 해서 안 낳는 건가요?"
"자식이 없으면 진짜 어른이 아니죠. 평생 애예요."
"아휴. 어째. 결혼했으면 애가 하나는 있어야지. 딱 하나만 낳아요. 요샌 40대에도 얼마나 많이 낳는데. 시험관 하면 하나는 충분히 낳을 수 있겠구먼."
"ㅇㅇ씨가 부족한 게 뭐가 있다고 애를 안 낳아요?"
"부부 사이에 그래도 애가 있어야 이혼 안 하고 원만히 오래가지."
"나중에 늙어서 어쩌려고... 그래도 노후에 돌봐 줄 자식이 하나는 있어야지. 늙어서 외롭기만 하지..."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저런 의견들을 주지 않았다.
대개 업무 관련, 운동, 취미 생활 등을 통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면전에서 한 말이었다.
사실 아무렇지 않다기보다는 상당히 밝은 얼굴빛을 띤다는 게 공통점이다.
표정의 종류에 '내가 하는 게 다 맞는 말인데, 딱 보니 아직 뭘 몰라서 그러네. 이게 다 당신한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금과옥조니까, 잘 새겨들어요.'라는 표정이 있다면, 딱 그 표정이다.
처음에 나는 이런 질문 혹은 의견들에 어쩔 줄 몰라 어리바리한 얼굴로 대처하기 일쑤였다.
나는 당황한 채로 여러 가지 설명을 둘러대기 급급했다.
딩크로 지내도 되는 당위성에 대해서.
"꼭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가족의 종류는 다양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책임지기 위해 결혼한 겁니다. 결혼 자체만으로도 책임을 지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남편과 상의 없이..."
딩크라는 것이 애초에 남편과 상의도 없이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었던 거였나.
남편 몰래 내 생각만으로 딩크를 유지한다고 생각하신 걸까.
나는 결국 띄엄띄엄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남편과 충분히... 상의해서... 결정한 겁니다."
'부부가 가족이 아니면 도대체 뭐가 가족일가요? 자녀가 있어도 이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결혼의 유지나 노후, 노년의 외로움 때문에 자녀를 낳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는 속으로만 삼키고 대답하지 못했다.
저 말을 뱉는 순간 나는 호의로 한 말에 갑자기 성내며 싸우자고 한 사람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몇 번인 가는 저런 대답을 한 적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대답을 안 하고 참는 것보다 더 답답한 결과를 불러오기 십상이다.
어차피 상대는 내 의견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고, 본인의 의견이 보편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결코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에 결국엔 사회의 대세를 따르지 않는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전의를 상실했고 이런 타인의 검열을 오지랖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오지랖이라 생각하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지랖이란 단어가 안쓰럽다.
예전엔 그래도 정말 타인을 위해 순수하게 나서서 행동하는 '정'에 가까운 의미였는데 어쩌다 이런 처참한 신세가 되었는지.
하지만 안쓰럽긴 해도 '불필요한 참견'이라고 길게 쓰는 대신 입에 착 달라붙는 오지랖이 말하기에 편하긴 하다.)
그렇게 조금씩 시간이 쌓여 어느 순간부터 나는 타인의 검열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언제고 그 얘기가 나올까,라고 가슴 졸이며 불편해하지 않았다.
애초에 오지랖을 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고안해 낸 방법이 딩크 선언하기였다.
상대방이 그와 비슷한 뉘앙스가 풍기거나, 혹은 대화나 상황의 흐름 상 자녀 유무를 밝혀야만 할 때.
나는 먼저 선방을 날렸다.
"저는 결혼한 지 N연차고요, N연차 딩크입니다. 앞으로도 쭉 낳을 마음은 없습니다."
선빵필승.
대개는 내가 먼저 단호한 어투로 얘기를 끝맺으면, 그 뒤로 별다른 대꾸가 나오지 않는다.
이 딩크 선언하기의 선방은 상당히 효과가 좋아서 대개 80%는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간다.
외려 아이 없는 게 편하고 좋지요, 라며 다소 긍정적인(?) 반응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70~80%를 제외한 나머지 소수의 분들.
가령 나에게 팔자와 자식운의 기준을 내미신 분처럼, 대략 20%의 분들은 나의 선방을 가볍게 나비처럼 날아 피하고 벌처럼 톡 쏘는 반격을 날리기도 하신다.
이런 경우는 딩크 선언하기가 도리어 역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이 분들은 내가 먼저 이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에, 그것을 검열의 수락(?)이나 합의로 받아들이신다.
그럼 그때부터 본격적인 이야기 지옥(?)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때부터는 정말 상황마다 대응법이 다른데.
경험에 따르면 시종일관 단호한 말투를 시전 하면 조금 더 빨리 대화를 끝맺을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오지랖. 타인의 시선. 눈치.
우리 사회는 나이대에 맞게 무엇을 이룬 인생을 살아야 하고, 어느 정도가 일반적인 기준이며, 어떤 모습이 맞는 모습이라고 암묵적으로 정의되어 있다.
오지랖, 타인의 시선, 눈치 등은 우리 사회가 이러이러해야 한다라고 정해놓은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의식이다.
이 거대한 의식의 흐름에 우리가 언제 동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의식은 거의 '보이지 않는 손'에 필적할 정도로 우리를 조종하고 있다.
(이 사회적 차원의 거대한 의식은 내가 앞 선 글에서 쓴 불행의 프로그램처럼,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디폴트 값으로 깔려있다.)
이 의식의 지배 하에 우리는 사회의 규격 안에 너무 스스로를 가두고 있으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그 규격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죄수고 간수이다.
규격에서 벗어나는 즉시 모두의 시선이 쏠리고, 시선이 쏠리면 우리는 눈치를 본다.
혹은 시선이 쏠리기도 전에 이미 눈치를 보고 있다.
그 시선은 종종 오지랖이란 형태로 우리에게 말을 걸며, 오지랖이 불러오는 온갖 불편한 감정 때문에 우리는 그 시선이 두렵고 꺼려진다.
그 시선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떨 때는 그 시선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동조하기도 한다.
시선의 불편함 때문에 선방을 자처하고 있지만, 선방 자체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이 시선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우리는 모두 다 다르게 생겼다.
세상에 하나부터 열까지 똑같은 사람은 없다.
도플갱어도 아니고.
제각기 다 다르게 생긴 것처럼, 사는 것도 다 제각각 일 수 있지 않을까.
누구는 이렇게 살고, 누구는 저렇고 살고, 모두 각자 하나하나의 이야기인데.
죄다 똑같이 하나의 이야기로 통일하는 건 좀......
나는 지금까지 다양한 책을 읽으며 즐거웠고 인생이 보다 풍부해졌다.
그 책들처럼 사람들 각각의 이야기가 많아지고 다양해지면 재밌지 않을까.
나는 그게 더 재밌을 거 같은데...
붙여 넣기, 표절을 하지 않는 한 같은 책은 없다.
고정되고 편협한 하나의 시선이 아니라 각자의 시선대로.
각자의 삶대로.
제발 무수히 많은 도플갱어와 표절을 양산하지 말고.
서로가 서로의 삶을 복사하고 표절하고, 그러다 상대방이 도플갱어가 아니면 눈총 주고.
좀... 무섭지 않나...
난 성숙한 어른으로 진행 중인 미숙한 어른이라 철이 없어서 그런가, 재밌는 게 좋다.
앞 선 글 타임어택을 지켜보는 여자 3에서 은사님과의 일화를 소개했다.
내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을 거라는 의견을 어렸을 때부터 강력하게 피력했음에도, 선생님께서는 단 한 번도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보신 적이 없으셨다.
내가 말을 꺼내기 전까진 말이다.
무려 삼십 년에 가까운 세월임에도.
나는 은사님의 태도에 각자의 이야기를 지키는 좋은 단서가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직접 말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선 묻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상대의 나이나 학력에 관계없이 상대방을 존중할 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우린 오지랖 혹은 타인에 대한 넓은 정과 관심이란 이름으로 타인을 전혀 존중하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가장 결여된 의식은 존중이 아닐는지.
나와 타인과의 거리를 아주 조금만 더 존중해 보는 것은 어떨까.
가까운 사이라도 무조건 더 가깝게 다가가기만 할 게 아니라, 적절하게 상대의 공간을 지켜주면 같이 또는 각자 더 평화롭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나만의 이야기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공간, 당신의 이야기가 더 넓게 확장되어 나갈 수 있는 공간.
굳이 선방을 날릴 필요도 없는 태도.
오지랖이 아니라 따뜻한 관심과 존중으로 느껴질 태도.
예의 바르고 존중 어린 태도를 갖기란 좋은 취향을 갖는 것처럼 한평생 쌓아 올려야 하는 어려운 일일 테다.
나부터 선방을 날리는 태도를 버리고,
타인의 말을 호도하지 않으며,
무작정 오지랖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거품 물고 달려들지 말 것이며,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도록 애쓰자.
애쓰고 애쓰다 보면, 그 비슷한 무엇이라도 되지 않겠는가.
결국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은 돌고 돌아 나 자신이다.
나를 얼마나 바로 세우고, 그를 위해 변화하고 노력해 나갈 것인가 하는.
오늘도 나는 '나나 잘하세요'로 글을 끝맺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