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사람에게
앞에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남편의 가정환경도 우리 집과 비슷한 편이었다.
다만 남편은 남매로 남편이 집안의 장남이고,
우리 집은 내가 장녀인 자매로 딸뿐이다.
남편은 주먹다짐을 통해 아버지를 조용히 잠재웠고,
집에 여자뿐인 우리 집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휘둘리고 있다.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를 보고 자란 두 형제가 한 명은 알코올 중독과 정반대 성공의 길을 가고, 한 명은 보고 자란 게 그것이라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는 이야기.
(빌 클린턴과 알코올 중독자였던 그의 계부, 또 그의 의붓 동생 이야기와 결이 비슷한.)
아무튼 나와 남편은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상반된 결론을 내렸다.
나는 보고 자란 게 그것이라 그렇게 키울 게 뻔하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는다로.
남편은 보고 자란 게 그런 것이기 때문에, 절대 그렇게 키우지 않고 잘 키울 거라고.
남편은 오히려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더 아이를 원했다.
누구보다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 좋은 아빠가 되는 상상을 키웠던 것이다.
내가 엉망으로 망가진 가정의 형편없는 엄마가 되는 상상을 키우고 있을 때.
결론적으로 우리는 결혼 10주년을 앞두고도, 아이를 갖지 않았다.
나의 두려움이 남편의 희망을 압도해 버린 것이다.
슬프지만 이럴 때면 부정적인 감정의 힘이 더 크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리고 그런 감정에 스스로를 내어준 내가 답답하기도 하다.
결핍이란 삶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남편이 어린 시절 영유하지 못했던 그 결핍은, 내 자녀에게만큼은 그 결핍을 채워주겠다는 형태로 나타났고.
나의 결핍은 오롯이 결핍 그대로의 본질을 형형하게 드러냈다.
내 결핍은 자격 미달이라 스스로 찍은 낙인과 선택의 포기라는 모습으로 현현했다.
결핍은 채워지지 않았고, 공허한 형상을 유지했다.
결핍은 성공이나 목표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며, 또한 삶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나의 결핍은 나의 걸림돌일 뿐만 아니라, 남편 인생에도 중대한 걸림돌로 작용하는 중이다.
나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남편은 그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또 궁극적으로 남편을 위해서라도 나를 많이 발전시켜야 하는 사람이다.
지난 10화의 글을 통해 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하며 아직도 미숙한 어른인지 서술했다.
남편은 미숙하기만 한 나의 삶에 나타난 한 줄기 실버라이닝 같은 존재다.
실버라이닝(silver lining)은.
어두운 구름을 뚫고 나오는 햇살,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영어권에서 사용되는 말로,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
모든 구름은 은빛 자락이 있다. (어떤 어려움에도 희망은 있다.)
silver lining은 대개 희망을 뜻한다.
내게 남편은 암담한 구름을 뚫고 나온 빛이고, 희망이며, 내가 그리던 꿈이다.
남편은 내 숨이 다할 때까지 내게 그런 존재일 것이다.
남편은 나에 대해 나보다도 더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남자다.
남편이 종종 하는 말 중에 숨소리만 들어도 다 안다고 하는데.
정말 나의 아주 작은 버릇, 말투, 눈빛, 표정만 봐도 완벽하게 내 속마음을 짚어내는 사람이다.
(이 어찌나 비상한 능력인지. 아무튼 대단한 남자임은 틀림없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나보다 정확하게 아는 남편에게 나는 자녀가 주는 행복을 주지 못했다.
부모가 된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세상 어떤 행복과도 비할 바 없는, 인생의 선물이고 보물인 그 행복.
그가 내게 희망을 선물하는 동안 나는 그의 인생에 영원한 결핍을 선사했다.
비상한 능력의 소유자이며, 다정다감하고, 나에게 평화와 사랑을 알려 준 그에게 나는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소중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나도 언젠가 그의 silver lining이 되길 꿈꾸며.
그에게 나의 모든 사랑과 존경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