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란
과거가 달랐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바람을 포기하는 것
지금까지 제법 많은 책을 읽었다.
진정한 활자 중독자들의 세계에선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할 양이겠지만.
그래도 독서량이 축적되다 보니 마음에 크로 작은 글귀가 쌓이게 된다.
그것은 아주 성긴 체로 문장을 걸러내는 것 같아서, 실제로 쌓인 글귀는 한 줌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걸러낸 문장들은 엄선된 만큼 오랫동안 살아남아 영향을 미친다.
물론 그 문장들은 오직 나에게만 작용하는 문장들이다.
전력으로 부딪쳐와 내 마음을 뒤흔들거나.
참선 수행 중에 죽비로 건드려진 것처럼 별안간 정신을 일깨우는 문장들.
그 문장들 중에서 단연 첫 번째는 이것이다.
트라우마와 관련된 심리학 서적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에서 읽은 문장이었다.
(*책에서 발췌한 문장은 볼드로 강조하였습니다.)
"용서는 과거가 달랐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바람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고통을 여전히 꼭 붙들고 있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물론 이것은 나에게만 일 번이다.
각자 가진 체의 모양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이 글귀를 보고 아무런 감흥이 없을 수도 있다.
나는 오늘 내 마음의 체가 걸러내었던 문장들을 몇 개 적어보고자 한다.
내 마음속 체의 생김새는 이렇다.
첫 번째 문장.
용서는 과거가 달랐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바람을 포기하는 것.
나는 아주 오랫동안 과거가 달랐어야 했다는 가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 과거가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혹은 그때 다른 선택을 했어야 했다는 부질없는 가망에서 오래도록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앞선 글에서 쓴 것처럼, 파증불고.
나는 그릇이 깨진 곳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조각을 들여다보았고, 그 조각을 붙들고 어루만졌다.
처음 책에서 이 문장을 읽던 순간, 나는 비로소 깨진 조각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진 조각을 들여다보며 어루만지는 것 자체가 계속 다른 상처를 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든, 그 누구든 혹은 나 자신이든, 용서가 되었나.
이 글귀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 누구도 용서하지 못한 상태였다.
심지어 브런치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특정할 수 없는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마도 용서하지 못한 가장 큰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계속 붙들고 놓지 못하는 미련한 스스로를 가장 용서할 수 없었다.
아버지 탓도 하고, 어머니 탓도 했지만, 계속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스스로가 한심해 참을 수 없었다.
헌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용서했다.
완전히...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0.001 정도는, 아직 마무리하지 못했다.
이 정도의 미련함이라면 이것은 아마도 나라는 인간의 특성일 것이다.)
"내가 마침표를 찍지 못하면 그 일은 떠나지 않고 언제고 나를 짓누른다는 점을 잊지 말자."
내가 필사해 놓은 또 다른 문장이다.
0.001 정도 부족하긴 하지만 마침표는 찍었다.
비로소.
나는 이제야 마침표를 찍을 마음을 먹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진작에 마침표를 찍고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있을 것이다.
헛똑똑이기 때문에 이제 와서야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래도 너무 자신을 닦달하지는 말자.
영영 마음을 안 먹은 것보다는, 이제라도 마음먹은 것을 칭찬해 주자.
(마음이 절름발이지만, 어쩌겠나. 이게 나다.
절뚝거리면서도 나아가려고 하니 기특하다고 머리라도 쓰다듬자.)
"계속 벽(과거)만 바라보고 있으면, 다가올 미래를 등지고 있는 셈."
온점을 찍어 버리니, 등을 돌리는 것은 쉬웠다.
등은 단호하게 돌린 참이다.
지금껏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니, 안타깝지만.
이제라도 앞도 보고, 옆도 보고, 풍경도 보면서 나아갈 때다.
벽을 바라보고 있던 그 긴 시간도 절대 돌아보지 말고, 아쉬워하지도 말자.
"성인이 된 후 자신을 피해자로 느낀다는 것은, 아직 유아적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민망하고 부끄러움을 넘어 수치심을 느꼈다.
내가 얼마나 미숙한 어른인지를 바로 이 문장이 적나라하게 폭로해 주고 있었다.
"너, 생각 잘해라. 똑똑히 봐. 네가 어떤 사람인지."
문장이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직시하라고.
오랜 습관처럼 당장에라도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회피하지 않았다.
내가 미숙한 어른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성숙시켜야 한다는 과제가 남았다.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그런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나이는 많이 먹었지만 그도 미숙한 어른이라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특히, 술에 취한 아버지의 레퍼토리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수만 번 반복된 레퍼토리 속에서 아버지는 늘 피해자였다.
(부자였음에도 자식들을 공부시키지 않고 7명의 첩을 들여 재산을 전부 탕진한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런 할아버지를 참지 못해 아버지 나이 12살에 자살한 할머니에 대한 원망과
연대 보증으로 아버지를 파산으로 몰고 간 형제와 가족들에 대한 원망 등등
아버지는 40년의 세월 동안 다른 사람들을 끊임없이 탓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피해자 역할을 도맡는 바람에,
주위에 있던 우리는 늘 죄지은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를 통해 태어난 내가 늘 아버지에게 죄책감을 가져야만 했다.)
칠순인 어른도 유아기적 피해의식에 젖어 있을 수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나이를 먹는다고 그 나이만큼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실제로 그 얕은 배움의 깊이만큼 미성숙한 단계에 오래 머물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배움이 짧다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아는 것이 적을수록 시야가 좁아지는 편이다.
지역 유지인 할아버지를 부모로 두고도 아버지는 간신히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못 배운 것, 그것은 아버지의 한이었다.
그 사무친 한이 아버지의 시야를 더 좁게 했을 것이다.
"과거의 상처를 보상받고 회복하기 위해 헛되이 힘과 열정을 쏟아 노력하며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가로막지 마라. 이미 벌어진 일은 지나간 일이다. 어떤 방법으로도 이를 되돌릴 순 없다."
술을 마시고 내가 조금만 더 배웠더라면 면 서기라도 했을 거라는 한탄은 몇십 년 동안 진행되었다.
과거의 상처를 보상받고 싶은 마음에 부질없이 쏟아낸 헛된 힘이었다.
엉뚱한 데 쏟아부은 그 힘은 아버지의 인생뿐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던 가족 모두의 인생을 가로막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40년간 같은 한탄을 했지만, 어떤 방법도 과거를 되돌리진 못했고.
어느 것도 달라지진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엄마와 우리 자매의 필요 없는 죄책감만 깊어졌을 뿐이다.
"당신의 과거는 핑곗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하나의 설명이 되는 것은 맞다."
아버지의 삶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결코 핑곗거리가 될 수 없다.
성인은 되어서도 계속 핑곗거리 뒤에 숨는다면, 아직 유아기적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이 글귀의 말처럼 하나의 설명이 되는 것은 맞다.
그의 인생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는 왜 그런 마음으로 살았는지... 아버지의 과거는 아버지의 인생이란 이야기의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한 개연성이 되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보며 이해와 용서를 찾으려 하듯, 아버지 역시 자신의 삶을 관조했으면 좋겠다.
이제 보니 이 타임어택이란 것은 나와 아버지, 즉 상대방과의 관계에도 존재하지만,
자기 자신과의 사이에도 존재하는 것 같다.
부디 아버지가 스스로와 화해하고 화합하여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용서했으면 좋겠다.
"세상이 공평하다는 믿음을 단호히 떨쳐버려라. 때론 누군가 이유 없이 횡재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노력하고도 손해를 본다. 세상에는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아버지도 나도 세상이 너무 공평한 곳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우리의 인생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우리는 더 나은 환경을 제공받을 자격이 있다고... 그런 오판을 했던 것은 아닐까.
사실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한 곳 그 자체인데 말이다.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자.
제대로 바라봐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마음먹은 만큼만 행복하다."
여태껏 세상 원망에 한탄만 했는데... 그래도 그럭저럭 순응하며 산다고 살았더니
뒤로 밀려나진 않고 제자리걸음 정도는 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나마 제자리걸음이라도 하게 해 준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뿐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의 덕이다. 내 기질대로 살았더라면...... 상상을 말자.)
세상이 공평하다는 그 환상을 빨리 떨쳐버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 아닐까.
지금에 와서야 제자리를 확인하고 출발선에 선 기분이다.
이제, 진정한 어른이 될 차례다.
나는 이 책의 제목처럼 '아직도 미숙한 어른입니다'에서,
제대로 된 어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추석에 부모님 댁에 갔더니, 테이블 한편에 놓인 낡은 노트에 다소 엉성한 글씨체로 필기가 가득되어 있었다.
신문에서 옮겨 적은 듯, 여러 가지 문장이 뒤죽박죽이었다.
(사족이지만,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지난 40년간 신문 구독에 상당히 집착하는 면이 있었다. 그 역시 못 배운 한에서 온 것일까.)
한눈에 보아도 아버지의 글씨임을 알 수 있었다.
엄마에게 물으니, 아버지가 공부하는 중이라고 했다.
지난 40년을 통틀어 아버지가 뭔가를 공부한다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버지도 먼 길을 돌아 출발선에 선 걸까.
깜지 같은 그 노트 필기 가운데 나는 아주 짧은 문장 하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젊음이 좋다'
아버지의 글씨로 쓰인 그 문장이... 유달리 눈에 밟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