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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험미 Oct 20. 2024

조지아를 방문한 무신론자의 소감

신실한 믿음의 땅, 조지아 정교회 성당과 교회

조지아 정교회는 조지아에서 가장 큰 기독교 종파로, 국민의 대다수가 조지아 정교회 신자다.

가이드마다 퍼센트가 조금씩 달랐는데, 84~89%가 조지아 정교회로 그 퍼센트가 압도적으로 높다.  

많은 교회와 성당, 수도원이 있는, 조지아.

한 마디로 기독교의 땅이다.


글 시작에 앞서 초 치는 것 같지만, 우리 부부는 종교가 없다.

특히 나는 남편보다도 더욱 메마른 사람이라서, 그저 아무런 믿음이 없는 남편에 비하면 무신론자에 가깝다.

믿음은커녕 사사건건 의심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인 영적으로 메마른 사람이 나다.


즈바리 수도원(성스러운 십자가상의 교회)
즈바리 수도원에서 본 므츠헤타 풍경
케이블 카에서 보이는 트빌리시 성 삼위일체 대성당
시그나기 정교회
보드베 수도원
보드베 수도원


보드베 수도원은 조지아에 처음 기독교를 들여온 성녀 니노가 잠든 수도원이다.

4세기 초중반에 성녀 니노의 활발한 선교로 기독교가 퍼졌으며, 5세기에 기독교 왕국으로 인정받는다.

역사적으로 조지아의 기독교는 그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고 깊다.


조지아 교회의 역사와 그 의미들에 대해서 솔직히 잘 모른다.

감히 무신론자가 어찌 그런 것들을 논하겠는가.

나는 그저 기독교가 뿌리 깊은 조지아를 여행한 무신론자의 소감을 쓰려한다.


아나누리 성채 성당
트빌리시 올드타운에 있던 교회
멀리 시오니 대성당과 트리니티 대성당 비롯, 트빌리시 시내의 교회와 성당 건물들이 보인다


거의 사진만 놓고 보면 흡사 성지를 도는 순례자 느낌이다.

그렇지만 조지아의 가볼 만한 유명 장소가 전부 교회이거나 성당이라서 그렇다.


본의 아니게 많은 교회와 성당, 수도원을 방문하며 나는 진정한 순례자와 신자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혼인 미사 참석을 위해 성당을 방문해 본 적은 있지만, 신자들이 참석하는 미사를 적은 없었는데.

본의 아니게 조지아에서 많은 성당을 방문하면서 미사를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조지아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서 여자는 머리를 가려야 하고, 반바지나 나시 등은 제한된다.

그러나 여름이라 어느 정도 팔다리 노출은 허용되는 분위기다.

나는 매번 성당 앞 바구니에 준비된 스카프로 머리를 가렸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미사가 진행되기도 하고.

신자들이 성화와 성물을 보며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신부님의 경건한 집전 속에 울려 퍼지는 합창단의 목소리에는 소름이 돋기도 했다.

특히, 므츠헤타의 즈바리 수도원에서는 세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온 가족이 아기를 둘러싸고 웃으며 박수를 치고, 한껏 들뜬 표정의 엄마는 우는 갓난아이를 안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므츠헤타의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 정원에 있는 성당 모형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 내부에서 진행 중인 결혼식


믿음 안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이 부부는 평생토록 서로를 믿고 의지할 것이다.

그런 그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 전능한 존재의 품 안에서 말이다.


신부님을 앞에 둔 신랑신부 주위로 어쩐지 한 겹의 보호막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뼛속까지 속물적인 현대인인 나는,

이렇게 험난한 세상에 그것이 존재하는지 확신할 순 없어도, 한 겹쯤 보호막이 더 있다면 남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만다.  


교회에서 제공한 알록달록한 스카프를 두른 이방인은 숨을 죽이고 한편에 서,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본다.

거대한 믿음을 마주한 무신론자의 마음은 어쩐지 촛불처럼 일렁인다.


카즈베기의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
밤에 빛나는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


많은 조지아 인들은 성당을 보면 성호를 긋는다.

(내가 관찰한 바가 맞다면, 조지아 사람들의 성호는 이마에서 시작해 오른쪽 가슴으로 간다. 보통 이마에서 내려온 후 왼쪽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무튼.)

십자 성호 세 번.

꼭 세 번 긋는다.


믿음을 가진 인간은 좋은 방향으로든, 다른 방향으로든 확고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신실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나는 그런 신실한 믿음을 마주할 때마다 불가해와 함께 경외를 느낀다.

절대적인 무언가를 믿는다는 기분과 그 믿음 안에 속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하는.


조지아에서 내가 느낀 일렁임은 마치 섬 전체 구성원 모두가 힌두 신들에 기대어 일상을 이뤄나가는 발리를 처음 방문했을 때 느낀 감정과 비슷했다.

믿음에 기반하여 모든 일상이 움직이는 곳.


종교적 시스템을 통해 행복에 이르는 길을 선사받는다니.

어찌 보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행복의 길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보잘것없는 인간과 전능한 신과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관계에서 오는 행복이니 말이다.


조지아는 발리만큼 모든 일상에 종교가 깃든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 믿음만큼은 확실히 두터워보였다.

다소 살벌한 문신을 하고 있는 청년도.

도로의 무법자처럼 운전하는 볼트의 운전기사도.

성당과 교회를 지나치게 되면, 잠시 성호를 그으며 신께 기도드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모두는 아니지만, 이방인이 의식할 정도로 종교는 그들의 일상에 스며있었다.


조지아 사람들이 겉모습은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있고, 노 프라블럼의 관대한 마인드를 갖게 된 배경에는 이런 뿌리 깊은 믿음이 작용했을까.

우리의 의식을 뛰어넘는 거대한 무엇 앞에서 인간사는 그저 하찮기만 한 것일 테니, 쉽게 노 프라블럼의 마인드를 가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늘 한 치 앞을, 그리고 가야 할 길을 몰라 얼마나 불안해했으며 얼마나 많은 방황을 했던가.


우리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하고,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나가야만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살고 있다.

혹은 메마른 현대인인 나 혼자만 각자도생의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고 있거나.


아무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창공의 성좌가 인도해 주는 것은 확실히 매혹적인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조지아에 있는 내내 무신론자의 마음을 뒤흔들 만큼 말이다.


삼타브로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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