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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주막

by 최재효 May 05. 2023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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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주막


                                                                                                                                     

      






 [오늘 오후 1시 정각 엉터리에서 번개 칩니다. 술값은 1/n입니다.]

 아침 식사를 하는데 휴대전화가 진동하며 몸부림친다.     



     

 사극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주막은 출입문에 가 쓰인 깃발이나 등을 내걸고 서민들을 상대로 술과 식사를 팔고 잠자리까지 제공하던 곳이다. 주막집 앞에 오동나무가 있으면 ‘오동나무집’, 은행나무가 있으면 은행나무집’, 집주인이 애꾸면 애꾸네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더러는 행화촌이라 하여 고상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옛날에 주막은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있었다. 나루터, 역참, 사람들이 오가는 번잡한 사거리, 길목, 장터 등이 주막이 들어서기에 적합한 장소다. 주막은 행인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하고 전달하는 곳이기도 했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객사는 벼슬아치들이 주요 고객이라 백성들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시골에만 주막이 있던 게 아니었다. 도회지에도 주막은 평범한 행인들이나 과거를 보러 가는 가난한 유생들에게는 꼭 필요한 장소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주막촌을 꼽으라면 한양의 광진 나루와 마포나루, 경상도 문경새재, 충청도 천안 삼거리, 경기도 여주의 이포나루, 경상도 섬진강의 화개장터, 전라도 지역 농산물의 집산지였던 전주 등이 있다.

 



 조선 시대는 한강의 물길을 이용해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지역의 세곡미를 조운선으로 실어 날랐다. 자연히 중간 지역인 경기도 여주 남한강에 있던 이포나루, 양의 광진 나루와 마포나루는 조선 3대 나루터로 유명했다. 이포나루에는 20년전에 이포보(梨浦洑)가 건설되어 무거운 사색에 잠기게 한다.     


 


 조선 시대 이포나루에는 주막, 색주가, 선술집, 식당 등이 성시를 이루었고 그중 고급 주점에는 경국지색 뺨치는 미색이 있어 한양의 한량들이나 파락호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현재는 인근에 있는 천서리 막국수 촌이 색다른 여주의 미각을 알리고 있기도 하다.      



 

 주막은 규모에 따라 다른데 보통의 경우에는 봉놋방 열 개, 창고, 마구간 등이 갖춰져 있어 장돌뱅이, 행상, 보부상이 잠을 자고 그들이 끌고 다니는 말이나 당나귀를 맡아 관리해 주기도 했다. 규모가 작은 주막은 봉놋방 한두 개가 고작이고 마당에 평상이나 탁자 몇 개가 있었다. 방이 적다 보니 양반이 봉놋방을 차지하면 서민들은 평상이나 마루에서 쪽잠을 자야 했다.           




 주막을 꾸려나가려면 주모 이외에 서너 명의 일꾼이 있어야 했다. 주방에서는 주모의 지시에 따라 동자아치와 반빗아치가 부산하게 움직였고, 중노미는 손님들이 타고 온 말이나 당나귀를 관리하거나 잡심부름으로 쉴 틈이 없었다. 또한, 남자 주인은 혹시 손님이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가거나 주인 몰래 술을 더 퍼마시는지 두 눈 부릅뜨고 살펴야 했다.           




 주모는 여색을 밝히는 나그네의 요구에 근처에 대기 중인 들병이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 밖에 허드렛일을 하는 추레한 여인들도 서넛은 있어야 했다. 주막은 돈벌이가 별로 없는 빈곤한 지역의 호구를 책임지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인천역사자료관의 기록에 의하면 인천시청에서 남동경찰서 주변은 조선 말엽에 성리, 구월리(九月里), 지상리, 전자리 등 네 개의 자연 촌락이 있었다. 조선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되면서 네 개 마을은 구월리로 편입되면서 현재의 구월동이 되었다. 막도 있었으리라.



 

 네 개 마을이 구월동으로 통합되기 전에 전자리는 전재울이라는 명칭을 쓰기도 했다. 지금의 남동경찰서 근방에 있던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 남사당과 광대패 등 재인(才人)들이 모여 사는 동네이기도 했다. 이 지역은 대로변에서 떨어져 있고 주로 저층의 공동주택들이 들어서 늘 조용하다.



 

 이 지역에 십 년째 다니는 단골 주막이 있다. 인천 가천대길병원에서 남동경찰서 중간에 있는 주막으로 구월동 거주 주민이면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다. 주요 고객은 1,2차 베이비붐 세대들이다. 어떤 날은 밀레니엄이나 MZ 세대도 투박한 주전자에 든 탁한 술을 따른다.

 



 빈틈없이 돌아가는 요즘에 내부 분위기가 깨끗해 보이거나 첨단 시설이 가득한 주점은 피하게 된다. ‘엉터리 주점이라는 상호가 마음에 들어 처음 인연을 맺었다. 오장육부가 단단하지 못한 탓에 자주 하얀 침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파란 연령대에는 물 건너온 40도짜리 독주를 무척 선호했다.

           



 위스키와 브랜디는 뱃속에 불을 지펴대기 알맞은 주류다. 한동안 주지(酒池)에서 놀던 결과는 처참했다. 오장육부 중 육부에서 빨간 신호가 왔다. 반은 절제하고 하나는 제거해야 했다. 덕분에 식사하고 나면 30분은 몸을 움직여 인위적으로 소화를 도와줘야 한다.     


 


 비 오는 날이면 휴대전화를 자주 들여다본다. 동갑내기 생체리듬은 거의 비슷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이심전심이 자주 부합되니 말이다. 지표 온도가 내려가면 인체의 체감도도 떨어져 알코올을 부르는 것 같기도 하다. 금방 담근 겉절이 김치와 총각김치가 손짓을 하며  유혹한다.     


 


 엉터리 주막 주모의 손맛은 이 일대에서 소문이 자자하다. 늘 밑반찬이 새롭다. 항상 제철에 나는 재료로 반찬을 만든다. 주모는 웬만한 사내들보다 손이 크다. 스무 평 남짓한 주점에 연탄 화덕을 생각나게 하는 둥근 양철 탁자가 열 개 정도 있는데 하늘이 꾸물대는 날이면 자리가 없다.


      


 5십 중반의 수더분하게 생긴 주모는 늘 똑같은 미소로 손님을 대한다. 손님 대부분이 인천 시민답게 *소성주를 벗 삼고 있다. 머리에 잔설이 내려앉고 장기를 떼어내면서 입맛이 변했다. 고급스러운 주점은 왠지 낯설게만 느껴진다. 엉터리는 번잡한 지역도, 장터에 있지도 않은데 늘 만원이다.    


 

* 소성 – 소성(邵城)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인천의 지명이다. 고구려, 백제에서는 미추홀(彌鄒忽)로 불리다 매소홀(買召忽)로 바뀌기도 했다. 소성주는 인천의 대표적 막걸리 상호다.


      

 옛날처럼 과거를 보러 가는 유생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보부상이나 행상이 존재하는 시대도 아닌데, 항상 주막이 늙숙한 나그네들로 북적이니 신기할 따름이다. 그들도 싱싱한 밑반찬이 마음에 들어서 인연이 오래가는 듯하다. 근처에 구월동 식자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시장이 있기는 하다.

 



 주막 뒤 이면 도로에는 말이나 당나귀 대신 주당들이 타고 온 승용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집 근처를 다니다 보면 초면의 사람들이 인사를 건넨다. 얼떨결에 응대하고 곰곰이 생각해 본다. ‘! 엉터리. 탁주 잔을 기울이다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나는 두부 부침이나 낙지 소면을 주로 주문하는데, 나의 배속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주모는 달착지근하면서 맵지 않게 만들어 내온다. 가을부터 이듬해 늦봄까지 나의 주문은 거의 생태탕에 한정되어 있다. 미나리를 잔뜩 넣은 생태탕 한 그릇이면 만사가 행복하다.

      



 거기에 하루 이틀 숙성된 막걸리 한잔 곁들이면 나는 별유천지비인간의 경지에 빠진다. 비 내리는 초저녁 엉터리에는 엉터리 주선(酒仙)들이 넘쳐나고 땀 냄새 진동하는 사내들의 싱그러운 웃음으로 가득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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