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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 소래에서 부활하다

by 최재효 May 04. 2023

[에세이]














소서노, 소래에서 부활하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날, 나는 인천 소래를 찾았다.  울적하거나 숙고할 일이 있으면 나는 늘 소래로 향하곤 했다. 포구에 서서 서해로 이어지는 물길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원함과 함께 육신의 홀가분함도 느낄 수 있다.   


   

 잠시 후 나는 10년 체증에 걸린 듯 답답한 심정을 달래 수 없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길게 한숨을 내쉰다. 내가 언제쯤이면 이 같은 우울한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나는 어느새 또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며, 그리운 할머님의 이름을 애타게 외치고 있었다.      



 660년 3월 당 고종 이치(李治)는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을 부총관으로 삼아 백제를 정벌하게 했다. 소정방이 산둥반도의 래주(萊州)를 출발하여 당나라 수군 13만 명을 이끌고 황해를 건너 덕적도로 향했고, 김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소정방을 맞이하였다.           



 나당연합군은 지금의 금강 하구인 기벌포(伎伐浦)를 거쳐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가 부여 사비성으로 향했다. 사비성이 함락되고 660년 7월 18일 의자왕과 백제의 지도부는 최후의 보루였던 공산성(公山城)에서 항복한다.


          

 한 고대사 연구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의 소래(蘇萊) 지명에는 소래(蘇來), 소래(蘇萊), 소래(召來)라는 3가지 의미가 숨어 있다고 한다. 춘추전국 말기에 제(齊) 나라와 노(魯) 나라에 쫓긴 우리의 조상의 일부인 소성족(蘇姓族)과 래이족(萊夷族)이 BC 480년경 서해를 건너 소래 지역에 진출하였기 때문에 소래(蘇來)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그는 산둥반도에서 래무(萊蕪)라 불리는 사람들이 대거 소래 지역으로 들어와 소래(蘇萊)라는 지명이 생겼고, *어하라(於瑕羅)에서 황해를 건너온 소서노가 소래 지역에 들어왔다는 의미에서 소래(召來)라고 한다는 등 다양한 소래의 유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소서노 일행이 소래 지역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 지역을 소래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 어하라 – 현, 산둥반도와 요동반도 사이 친황다오[秦皇島] 주변으로 비정.   


  

 조선 중기 학자 격암 남사고 선생의 대표 문집은 격암유록(格庵遺錄)이라 할 수 있다. 아래는 격암유록 중 말운론에 나오는 일부 문장이다.   



       

 非山非野仁富之間 人山人海萬姓聚合 小木多積之中, 三神山人出生地 女古老人草魚. 禾艸來 相望對坐地. 三神帝王始出時 善者多生惡者死 可笑可歎奈何 嗟乎.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비산비야의 인부(仁富 - 인천과 부천) 사이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산과 바다를 이루네. 감나무를 따르는 소목(小木)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네. 삼신산의 주인인 삼신대왕이 출현하는 땅이며 삼신산의 불사약이 있는 곳이네.


 노고산(老姑山)과 소래산이 서로 바라보는 땅에서 삼신제왕, 곧 천상(天上)의 왕이 출현하네. 착한 사람은 살고 악한 사람은 죽게 되네. 가히 웃을 수밖에 없고 탄식할 수밖에 없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격암 선생은 역학, 풍수, 천문, 복서(卜筮), 관상의 비결에 도통한 도인으로 앞일을 정확히 예언했다. 여기서 천상의 왕은 곧, 소서노(召西弩)를 의미한다. 소서노는 마고(麻姑) 여신, 즉 마고할미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주요 길목마다 하늘에 제사 지냈다.           



 마고 여신은 우리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분으로 고조선, 고구려, 고려, 조선 시대 역대 왕들은 마고 신을 받들어 모셨다. 격암록은 마고 여신의 대변인으로 소서노가 소래포구를 통해 소래산과 노고산을 지나 한강 유역의 위례로 진출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위 문장에서 ‘草魚禾艸來(초어화초래)’는 소래(蘇萊)의 파자가 된다.  


          








 



 소서노는 동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망명한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 일조한다. 세월이 흘러 주몽과 예 씨(禮氏) 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琉璃)가 찾아오자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책봉한다. 소서노는 자신의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주몽의 뒤를 이어 고구려 태왕이 될 것을 기대했다.         


  

 지아비의 태도에 분노한 소서노는 BC 42년 사람들에게서 패대(浿帶)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두 아들과 일행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옛 번조선(番朝鮮)과 진조선(眞朝鮮) 사이의 땅이었던 진번(辰番)의 땅으로 어하라(於瑕羅)였다.          



 어하라는 지금의 요서 지방으로 발해만의 동해빈(東海濱)으로 비정되는데 고조선의 영역에 해당한다. 소서노는 어하라 정착에 성공하였으나 계속되는 한나라의 침입에 국력을 소모해야 했으며, 주몽에 이어 태왕에 오른 유리의 견제를 부담스러워했다.     


소서노는 오랜 고민 끝에 마한(馬韓)으로 가기를 결심한다. 백제의 건국설화에서는 소서노 일행이 남하한 경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소서노 일행은 동해빈에서 출발하여 황해를 건너 한반도 지역으로 남하한다. 그곳에서 직선거리로 닿을 수 있는 곳이 소래포구밖에 없다.          



 위의 여러 예를 들어 인천광역시 소래의 어원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소래에 왔던 적은 없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어느 고서(古書)를 보더라도 소정방은 소래와 인연이 없다. 그러나 인천 시민들 상당수는 소래 지명의 어원이 소정방과 연관해 알고 있는 듯하다. 소정방이 누구인가? 위대한 해상왕국 백제를 멸망시킨 한민족 최대의 공적 아닌가?           



 어떤 몹쓸 인사가 하필이면 아름다운 포구에 더러운 이름을 연관시켰는가. 백제가 역사 속 나라가 된 이후에 누군가 의해 고의로 예전에 소래(召來) 혹은 소래(蘇來)로 불리던 지명에 손질한 듯하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와 소서노를 의식하여 차마 지우지는 못하고 고의로 소정방을 끌어들여 소래의 어원을 소정방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왜곡한 것으로 추정된다.  


    

 얼마 전 인천 남동구에서는 소래포구축제 때 소서노 모자(母子)와 십제(十濟)의 소래 도착을 알리는 거리 행진 행사가 있었다. 그때 인천 사람들은 화려한 행진 행렬을 보고 열렬하게 환영하였다.           



 강화, 시흥, 서울에 노고산(老姑山)이라는 동일 지명이 있다. 강화군 양도면 인산리에 노고산이 있고, 부천과 시흥의 경계에도 노고산이 있으며, 서울 마포에도 노고산이 있다. 이 노고산에서 충분히 소서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먼저 소서노의 첫 자 노(弩) 자와 노고산의 노(老) 자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소서노의 쇠뇌를 뜻하는 노(弩) 자는 소서노가 강력한 무기 쇠뇌를 사용하는 여자 무사이자 무당임을 뜻한다.


           

 노고산의 노(老) 자는 소서노가 하늘에 올리는 제사를 뜻하는 문자로 볼 수 있다. 노(老) 자는 흙토土+삐침별丿+비수비(匕) 자로 이루어진 문자이다. 하늘에서 땅에 별의 기운이 꽂히는 것을 형상으로 하여 만든 문자가 노(老) 자인데, 이때 땅에 꽂히는 별의 기운은 북두칠성에서 오는 기운을 말한다. 따라서 제사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고(姑) 자는 女+古로 이루어진 문자로 마고(麻姑)를 신으로 모시면서 만들어진 문자이다. 따라서 강화, 시흥, 서울의 노고산을 보면 소서노의 이동 경로를 암시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즉, 노고산이란 마고에게 제사 지내는 산이라는 뜻이다. 마고는 여신이므로 남자들이 제사 지내지 않고 여자들이 제관이 되어 제사 지낸다. 소서노가 강화, 소래, 시흥을 거쳐 한강을 통과하면서 제사 지낸 산들이 바로 노고산이다.          



  女古老人草魚禾艸來 相望對坐地 三神帝王始出時       

   

 노고산과 소래산이 서로 바라보는 땅에서 삼신제왕, 곧 천상(天上)의 왕이 출현하네.          



 윗글은 이미 상술한 남사고 선생의 예언서 격암유록 중 말운론 일부다. 소서노 일행이 소래에 도착하여 부천과 시흥 사이에 있는 소래산과 노고산을 통과하여 시흥, 군포, 안양, 영등포, 서초 일대를 정벌한다. 그들은 차차 한강 남쪽 유역의 하남 위례 방향으로 진출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로 볼 수 있다.   

  

 






 이때 위 정복지를 잉벌노(仍伐奴)라고 하였다. 잉벌노를 유추해 볼 때 소서노가 온조와 함께 토착세력을 정벌해 나가면서 그가 인솔한 백성들을 살게 하여 잉벌노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잉(仍) 자는 人+乃 합자로 ‘이어 사람을 살게 하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고, 벌(伐) 자는 소서노가 토착민을 회유 또는 토벌했다는 뜻으로도 가늠해 볼 수 있다. 노(奴) 자는 소서노로 본다. 따라서 잉벌노는 “소서노가 정벌하여 얻은 땅”으로 유추가 가능하다.          



 소서노(召西弩 : BC66년 ~ 6년)는 백제건국 설화에서 나오는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이자 주몽의 두 번째 부인이다.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이라는 설과 졸본부여 사람 연타발의 딸이라는 설, 비류국 왕인 송양의 딸이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현재 정설은 《삼국사기》 고구려 건국설화에 나오는 내용으로 ‘주몽이 졸본에 정착하여 졸본 부여왕(이름 미상)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비류와 온조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설화에는 연타발의 딸이며,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인 우태(優台)와 처음에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우태 사후에 주몽과 혼인하여 그를 도와 고구려 건국에 일조했다. 주몽의 장자 유리가 찾아오자 주몽에게 배신감을 느낀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어하라에 정착했다가 한반도로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소서노는 주몽이 비류에게 대권을 물려주자 온조는 갈등한다. 소서노는 온조와 십제로 불리는 신하들을 대동하고 어하라를 떠날 것을 결심한다. 그는 신하 마여(馬黎) 등에게 명하여 대선단을 준비하도록 한다. 소서노와 온조는 어하라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미추홀(지금의 인천광역시 남동구 소래 일원)에 닿는다. 발해만의 동해빈에서 출발하여 직선거리로 닿을 수 있는 곳이 이곳으로 미추홀의 소래 지역이다. 지금까지도 미추홀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역사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미추홀은 소서노가 도착하기 이전부터 불리던 지명으로 볼 수 있다. 미추홀이 마한을 다스리던 목지국(目支國)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보기 때문이다. 소서노가 소래에 도착하여 소래산 일대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후로 미추홀은 매소홀현(買召忽縣)으로 지명이 바뀐다. 매(買) 자의 의미가 돈을 주고 산다는 의미이므로, 소서노가 마한왕(목지국왕)에게 돈을 주고 매입한 마을을 현(縣)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지명으로 보아서, 소서노가 미추홀(소래)에 상륙하여 자기의 영지로 삼은 후에 공식적인 절차에 의하여 미추홀 땅 일부를 매입하여 소서노의 땅으로 확정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지명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매소홀은 소성(邵城)으로 불리게 되었다. 신라 백성이 된 백제인들 현지 정서와 소서노의 존재를 의식한 신라는 소서노의 소(召) 자 대신 고을 이름 소(邵)를 사용하였다. 2천 년 전 마한 연맹 중 하나인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 땅이었던 미추홀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단지 바닷가에 어업을 위주로 살아가는 토착 원주민 촌락이 있었을 뿐이다.           



 인천의 바닷가에 배가 안전하게 들락거릴 수 있는 지역은 소래가 적합하다. 인천의 기타 해안가는 선박을 정박시키기에는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매우 위험하다. 소서노가 이끄는 수만 명이 넘는 유민을 태운 대선단이 운집한 소래포구의 모습은 백제의 태동을 알리는 역사적인 대사건이 분명하다.       


   

 소서노가 어하라를 떠나 황해를 건너 남하하면서 대선단을 이끌고 왔는데, 나라를 세우고 경영할 목적으로 남하하였다면 그 규모는 적어도 수만 명이 넘는 무리였을 것이다. 적어도 배 한 척에 2~3백 명이 탄다고 가정하면 적어도 소서노의 대선단은 백여 척이 넘는 규모라고 짐작할 수 있다. 황해를 내려오면서 소서노는 평안도와 황해도 경기도의 해안에 머물며, 척후를 보내 대선단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도록 했을 것이다.


      

 한강 이북 지역은 땅이 척박하고 날씨가 추워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소서노와 그의 참모들이 선택한 지역은 한강 중하류 지역으로 위례 지역이었다. 소서노 대선단은 강화> 김포 > 위례 코스를 택하지 않았다. 대선단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지역을 관할하는 마한의 군사들에게 적발되어 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소서노의 대선단은 지금의 소래포구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포구의 특징은 거세 파도와 비바람을 막아 선박을 안전하게 보호할 후풍처 역할을 한다.     


     

 소서노 일행의 선택은 탁월했다. 만약 강화와 김포를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면 마한의 군사들과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어 새로운 나라의 건국은 수포가 되었을 것이다. 소래에 도착한 소서노는 잠시 소래 지역에 머물며, 마한왕과 협상을 벌여 소래 일대 지역 땅을 사들인다. 소서노는 세를 불리고 지금의 소래산 > 소사 > 구로 > 양천 > 마포로 이동하며 토착세력을 회유 또는 정벌하면서 서서히 하북의 위례로 이동하였다.           



 그가 거친 주요 지역마다 마고(麻姑) 여신께 제사를 지낸 산들이 있다. 강화도 노고산, 시흥의 노고산, 서울 마포의 노고산이 동명(同名)으로 소서노와 마고 여신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소래 사람들은 오랫동안 소래의 유래에 대하여 잊고 살았다.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소정방의 소래산 주둔설(駐屯說)은 이제 영원히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가 계속해서 소래를 소정방과 연관시키면 중국인들은 소래가 중국의 땅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고구려를 당나라에 속하는 변방의 제후국이었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그들이다.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우리의 역사를 훔치고 있다. 해상 제국 대백제를 개국한 소서노가 소래에 처음 진출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며, 자랑스러운 소래역사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가장 딜레마가 바로 소서노의 존재라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 두 제국을 건국한 주역이 바로 소서노이기 때문이다.          



 소서노는 고구려와 백제를 잇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다. 소서노가 없어야 고구려가 당나라의 제후국이라고 우길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여걸 소서노가 있으니 도저히 고구려와 백제를 당나라의 변방 제후국이라고 감히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서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래포구에 한 손에 강궁(强弓)을 들고 서서 서해를 응시

하는 용맹스러운 여걸 소서노의 거대한 동상이 세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온조나 비류보다 나는 소서노의 위대함에 더 가치를 두고 있다.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다.  중국도 이어도를 자기네 경제적 배타구역 안에 넣고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중·일 삼국이 바야흐로 역사와 영토 전쟁에 휘말리고 있다. 이런 한 때에 소서노는 최선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백제는 최대판도를 자랑할 때 22 담로(擔魯) 제도를 두어 대륙뿐만 아니라 필리핀과 대만, 일본 열도까지 진출하여 광활한 식민지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소서노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인천 소래 지역을 상징하는 새로운 아이콘으로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역사 등 여러 방면에서 수호신으로 또는 외적을 막아내는 방패로 그 존재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더 늦기 전에 소래에 소서노의 동상과 전시관 등을 설치하여 소서노를 인천을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시켜야 한다. 소서노가 소래에 첫발을 내디뎠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은 많다.


      

 얼마 전 TV 드라마에서‘주몽’을 방영할 때 탤런트 한혜진이 소서노의 역할을 맡아 잘 소화해낸 적이 있었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중국인들이 발해만 근처에 소서노 동상을 설치하고 백제까지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기 전에 서둘러 인천에서 소서노를 부활시켜야 한다.         


 

여보, 한 시간 넘게 서서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세요?”

? , 잠시 그리운 할머니를 만나고 왔어.”

 “네에? 할머니 산소는 여주에 있잖아요?”     



 전어를 맛보러 왔다가 잠시 소래포구 선착장에 서서 타임캡슐을 타고 과거 여행을 하고 온 나에게 아내는 이상한 시선으로 보며 말을 건넸다. 비는 그쳤고 어느새 어둠이 내려 향수를 부르는 포구의 야경이 나그네를 위로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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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hn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829     

http://kgmaeil.net/detail.php?number=99865     

http://womannews.net/detail.php?number=92225     

http://jeonmae.co.kr/news/view.html?section=103&category=107&no=123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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