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고려 제8대 황제, 현종(顯宗 : 재위 1009~1031). 불륜으로 태어나 황제가 되기
까지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답니다. 본 소설은 고려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대량원군 왕순(王詢)이 이모인 천추태후의 온갖 음해를 극복하고 황제가
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작품화했습니다.
- 저자 최재효
대량원군을 암살하라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김은을 황제에 앉히려는데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천추태후의 친여동생인 헌정왕후 소생 왕순(王詢)이었다. 왕순은 두 살 때 아버지 왕욱의 귀양지인 사수로 보내져 배방사란 사찰에서 돌보게 했다. 그러나 아버지 왕욱이 병사하면서 왕순은 그곳에서 지내다 개경 궁궐로 올라와 생활하게 되었다. 황제는 왕순을 대량원군에 봉하고 극진히 보살폈다.
황제에게 후사가 없으니 이대로 간다면 사생아이긴 하지만 왕건의 손자인 대량원군이 다음번 황제의 자리에 앉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정 안팎에서는 황제의 건강이 날로 악화하자 대량원군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 중신들과 백성들의 관심이 대량원군에게 집중될수록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궁궐에 둘 수 없었다. 그녀는 대량원군으로 인해 황제의 권위가 떨어진다며 그를 개경의 숭교사(崇敎寺)로 강제로 출가시켰다. 그러나 조정 중신들과 개경의 민심이 출가한 대량원군에게 집중되자 이에 부담을 느낀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양주의 삼각산 자락에 있는 신혈암으로 보내고 신혈소군이라 부르게 했다.
개경에서 양주 신혈암까지는 이백여 리(里) 떨어진 거리였다. 대량원군을 개경에 머물게 하면 그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형성될 것을 우려한 천추태후의 간악한 조치였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왕순을 강제로 승적(僧籍)에 올려 신혈사로 보내놓고도 안심할 수 없었다. 조정의 신료들이 모두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군부의 인사들이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난잡한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
“백가야, 늙은 중놈과 행자승 목소리만 들리는 걸 보니 불당 안에 신혈소군이 없는 게 분명해.”
“천가야, 요사채를 뒤져보자고. 불당 안으로 들어간 늙은 중이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를 않으니, 여기서 날을 샐 수는 없지 않은가?”
두 자객은 요사채로 접근하여 주위를 살펴보았다. 요사채 밖에서는 대량원군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천가가 밖에서 망을 보고 백가가 요사채 안으로 들어갔다. 촛불이 켜져 있는 요사채 안에는 스님들이 사용하는 옷가지와 이불 그리고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전부였다. 진관은 요사채를 나오면서 일부러 불을 켜두었다.
“요사채 안에는 아무도 없네.”
“그렇다면 신혈암에 소군이 없단 말인가? 불당과 요사채 안에 없다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오늘도 실패하면 우린 죽음 목숨이다.”
두 자객은 염불 소리가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법당과 요사채 주변을 살펴보다가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자객들이 법당 문틈으로 안을 살펴보아도 진관과 사미승의 모습만 흔들리는 촛불에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반시진이 더 흐르고 새벽 예불이 끝났다. 동녘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물들고 있었다. 두 자객은 떡심이 풀린 채 별 소득 없이 물러가야 했다.
“백가야, 불당 안으로 난입하여 저 늙은 중을 닦달해볼까?”
“저 노승은 검술의 달인이라고 알려졌네. 우리는 상대가 안 돼. 자칫 저 늙은 중을 건드렸다가 우리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그럼, 어찌한단 말인가? 몸이 얼어 더는 밖에 있기 힘든데…….”
“할 수 없네. 우복야님에게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수밖에……. 일단 철수하자고. 여기 있다가 얼어 죽겠어.”
동이 터오고 있었다. 진관은 암자 주변을 살펴보았다. 법당과 요사채 앞마당에 사내들의 발자국이 희미하게 찍혀있었다. 자객들이 물러간 것을 확인한 진관은 수미단(須彌壇) 뒤로 돌아가 수미단 아래로 통하는 비밀 문을 열었다. 수미단 아래는 좋이 서너 평 크기의 암굴이 있는데, 그 암굴의 소재는 진관과 경보 그리고 대량원군만 알고 있는 비밀 장소였다.
천추태후에게 모든 실권을 넘긴 채 남색(男色)과 폭음에 빠져 하릴없이 세월을 묵새기고 있던 황제는 점점 몸이 허약해지면서 자주 병석에 누웠다. 천추태후(天秋太后)는 황제의 환우가 점점 깊어가자 노골적으로 정권 탈취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김치양은 인사권을 장악하여 고려 조정의 만조백관을 좌지우지했다.
전국에서 벼슬을 원하는 자들이 뇌물을 바리바리 싣고 김치양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김치양은 거둬들인 뇌물로 삼백여 칸이나 되는 저택을 짓고 정원에 아름다운 정자와 환상적인 연못을 꾸며 밤낮으로 천추태후와 놀아났다. 그는 자신의 사당을 짓기 위해 개경 백성들을 강제로 부역에 동원하여 원성을 사기도 했다.
김치양의 전횡으로 지존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고 조정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자 황제는 김치양을 축출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천추태후의 교묘한 방해로 번번이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권한과 권위를 완전히 상실한 황제는 정사를 소홀히 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그것은 바로 남색이었고 한번 빠져든 황제는 헤어날 줄 몰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