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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rsona Mar 18. 2021

계단을 오르며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른다. 12층을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다리 근육에 열이 나고 땀이 솟는다. 첫날은 근육이 갑작스레 굳어 힘들었는데 그것도 운동이라고 이제는 조금 익숙하다. 작년 여름에 길을 걷다 갑자기 왼쪽 다리 종아리에 근육이 파열되어 한 달여 깁스를 하고 지냈던 일이 떠올랐다. 아픔이 또 다른 고역으로 이어진 셈이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두어 달 전부터 “주민 여러분, 4월 초부터 2주간 우리 아파트 단지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공사가 있을 예정이오니 특별히 유념하셔서 통행에 불편이 없기를 바랍니다.”라고 방송하고 안내장도 붙였다. 단지 안에 승강기가 두 개 있는 동은 그런대로 나은 편이지만 내가 거주하는 곳은 한 개라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다.

 한 층 한 층 계단을 밟으면서 생각이 여러 과정과 변화의 단계에 머문다. 자연의 순환 과정도 봄에 씨뿌리고(春生), 여름에 기르고(夏長), 가을에 추수하여(秋殮), 겨울에 폐장하는(冬藏) 단계가 있다. 문명 발전 과정 또한 생명과 역사의 시작 → 생명과 문명의 발전→ 결실→ 휴식의 단계가 있다. 자연과 문명, 시·공간의 변화뿐 아니라 그 속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도 변화의 단계와 과정을 밟아 성숙해진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나의 삶 역시 계단을 밟듯 단계를 지나온 것이 아닌가. 

 계단을 오르며 오늘은 문화인문학 강좌로 발길을 옮긴다. 강좌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철학은 나를 찾아볼 수 있는 학문 탐구요, 지식과 지혜의 숲으로 안내하는 마당이어서 정신 줄을 팽팽하게 당긴다. 철학자들이 인간 본연의 내면 인식과 존재론적 성찰을 구현하려는 몸부림으로 인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을 느낀다. 생각하고 회의하는 나의 데카르트, 독일 관념철학을 집대성한 칸트, 절대지(絶對知)의 경지를 주창한 헤겔, 영원회귀로 자기를 극복하는 초인사상의 니체, 존재의 일반적 의미를 인간의 실존을 통해 해명한 하이데거 등 철학자들 또한 사유의 계단을 오르내렸으리라.

 많은 철학자 중 내 삶에 영향을 준 이는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다. 사람다운 삶에 대한 갈구로 무엇보다도 사람임을 자부하고, 바르고 선하고 합당한 ‘참자기’ 됨을 추구한 실존주의 철학자여서다. 그는 처음 쓴 책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 에서 인간의 삶과 존재를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쾌락적 실존 단계, 윤리적 실존 단계, 종교적 실존 단계로. 나의 경우 2~30대의 쾌락적 단계, 4~50대의 윤리적 단계를 지나 6~70대 이후 종교적 단계의 과정을 밟고 있는 듯하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첫 번째 단계 삶의 모습은 '쾌락적 단계'라고 했다. 인간은 미적 아름다움에 빠지고 감각적 쾌락을 좇아 산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나는 독한 술에 젖어 아름다운 여자에게 손을 내밀기도 하고, 말초적 탐미 추구로 이성을 잃고 방황도 하는 청춘을 보냈다. 이성이 감성을 보듬었을 때 쾌락적 추구만이 인간의 존재를 결코 행복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고, 감각과 쾌락만을 좇는 삶의 결과는 결국 권태와 절망뿐이라는 회의에 빠졌다. “어느 날 난 떨어진 낙엽을 보았죠~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하면서.  

 키르케고르는 두 번째 단계로 '윤리적 단계'를 거론한다. 쾌락만을 좇아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가치와 윤리를 따른 생활을 일컬음이다. 나 역시 삶을 살며 이율배반적 행위, 이중적 자아의 발견, 삶의 회의 등으로 늘 고민했다. 윤리 도덕적 행위만으로는 인간의 삶이 만족스러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고독을 느끼고 방황을 하곤 했다. 더 나아가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머물며 실존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아무리 도덕군자처럼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결국 언젠가는 세상과 결별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했다. “인생이 별거냐고? 그냥 대충 살지, 뭐.” 라면서.

 키르케고르는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삶은 결국 세 번째 단계인 '종교적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실현된다고 했다. 자신의 결심에 따라 진정으로 신을 믿고 따를 때만 인간으로서의 무력감과 허망함을 떨쳐 버리고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관점이다. 또한 키르케고르는 사람들에게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살 것을 말한다. 신은 자신이 존재하는 근거이며, 참된 신앙을 갖지 못하고 절망하는 것이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나 역시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옮겨 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부끄럽고 연약하며 불안한 나를 발견하고 반성과 결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을 갈무리해야 하는 인생의 단계를 살아가면서 더욱 종교에 의지하며 신앙에 깃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그 길이 가없이 멀긴 하지만. 한마디로, “주여, 당신에게 이 죄인을 맡기나이다.”라는 마음이다.

 일과를 끝내고 한 걸음 한 걸음 168개의 계단을 오른다. 1층에서 심호흡을 하고 3층, 5층, 7층, 9층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크게 한숨 쉬고 12층에 다다른다. 평안과 휴식을 주는 내 집에 도착했을 때 안도감과 희열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띠리링~’ 문 여는 소리에 환하게 맞이하는 아내의 얼굴을 대하면 피곤과 땀이 눈 녹듯 사라진다. 늘 가르치는 입장이었던 내가 무엇인가 배우러 다닌다는 것과 무사 귀환이 아내는 대견스럽고 흡족한 모양이다. 그 모습에 답례하듯 시도 때도 없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 독수리 타법이지만 한 번 앉으면 서너 시간은 기본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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