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코로나19로 호주에서 급하게 귀국한 지 벌써 1년이 넘어 간다. 코로나19가 아직 확산세여서 사회적 거리 두기는 지금도 필수다. 외출 약속은 생각의 뒤편에 놓은 지 오래다. 자발적 격리를 하면서도 집에만 있는 생활이 오히려 나에겐 안성맞춤인 셈이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부터 생활에 변화를 주고 싶던 차였다. 일요일에만 주로 사용하던 자동차를 폐차하기로 했다. 퇴직하고 나서 겨울이면 매년 호주에 사는 딸네 집으로 날아간다. 2, 3개월 뒤에 돌아오면 자동차는 지쳐 보였다. 몇 개월씩 운행하지 않은 차가 딱해 보였다. 할 일을 하지 못할 때처럼 딱한 일이 또 있을까? 보험료에 자동차세, 차령이 오래된 데다 몇 달씩 쉬었으니 고장이 잦았다. 수리비며 기름 값도 떨어질 줄 모른다. 유지비가 늘어가니 차에 대한 애정이 점점 식어갔다.
17년이란 세월을 함께 했던 애마 쏘나타의 고려장을 결심했다. 애물단지로 느껴지던 차였지만 정리하고 나니 시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일찍이 “남녀가 서로 사랑하기 시작하면 거기엔 이미 해피엔딩이란 없다.”라고 단언했다. 옛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스칼릿(비비언 리)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레트(클라크 게이블)임을 깨닫고 그에게로 달려가지만, 레트는 미련 없이 그녀 곁을 떠나는 장면이다. 무심한 척하는 레트도 아쉬운 마음을 가슴에 안고 석양 녘 저 언덕으로 떠났으리라. 어니언스의 <편지>가 나를 달랜다. ‘멍 뚫린 내 가슴에 서러움이 물 흐르면/떠나버린 너에게 사랑 노래 보낸다.’
1980년대 초반까지 자가용(승용차) 보유가 부의 상징이었던 때였다. 경차 티코가 처음 선보인 1991년에만 해도 마이카 시대는 멀다고 생각했다. 준중형 자가용인 엘란트라가 나오고 중형차의 전설인 쏘나타가 관심을 끌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가격 대비 저렴하고 내구성이 좋았던 프라이드를 갖고 싶었다.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한편 ‘휘발유 한 방울도 안 나는 나라에서 자동차는 무슨!’ 하면서 나름대로 자가용차의 불필요함을 주장하기도 했다.
1988년은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한 ‘역사적인’ 해였다. 우리나라는 올림픽을 계기로 ‘코리아’라는 브랜드를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다. 경제 발전과 문화, 체육의 육성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로 성장하던 때였다. 여기저기 고층 건물이 경쟁하듯이 건축되더니 고층 아파트 전성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아파트와 자동차는 나에게 딸 수 없는 먼 하늘의 별 같이 느껴졌다. 내 집 마련이 서민들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녹록지 않던 시절이었다. 자동차에 대한 꿈은 접고 내 가족이 안주할 수 있는 집 장만이 먼저이기에 주택청약 저축에 가입했다.
결혼 초 월세도 살아보고 전세도 들어 눈치생활도 해 보았다. 집 없는 설움을 술로 달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의 집에 가면 ‘왜 난 이렇게 못해 놓고 사나’ 하는 자괴감을 오랜 동안 가지며 살았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삶이 오늘의 나를 만든 마중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지만, 얄밉고 섭섭한 인생의 맛을 느끼며 살았던 추억을 아름답다 포장하고 싶지는 않다.
교사에게 주는 특혜를 받아 학교 앞에 신축한 저층 아파트를 특별 분양받았다. 15평 임대 아파트였지만 5년 뒤에 재분양으로 내 아파트가 된다는 희망이 있었다. 집을 마련하고 나니 다른 꿈이 나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무슨 기념할 만한 날이거나, 특히 명절을 맞아 부모님 뵈러 갈 때면 짜증이 났다. 수원에서 안양까지 버스 타는 일이 만만치가 않았다. 양손에 물건을 바리바리 들고 아내와 딸과 함께 안양의 산 중턱까지 올라가는 일은 힘들었다.
1990년 중반에 생각을 바꿔 결단했다. 갈대와 같은 마음의 변심이었다.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는 잊기로 했다. 소형차를 샀다. ‘경기 나 5950’ 프라이드. 마이카 붐 세대에 발맞추기 위함이라고 자랑 겸 변명을 하면서. 세월이 가면서 집과 차가 조금씩 커졌다. 24평 아파트로 이사했다. 넓은 공간에 내 서재를 만들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여유롭게 살고 싶었다.
‘프라이드’는 겸손과 자긍심을 동시에 일깨워주기도 했다. ‘프라이드 차’로 ‘프라이드’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준중형차, 중형차를 선호하여 너도나도 큰 차로 갈아탈 때도 시류에 흔들리지 않았다. “김 선생, 이제 좀 큰 차로 바꿔야지.”라며 함께 근무하던 선배가 소유하는 차를 양도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중형 쏘나타! 연약한 내 마음을 마구 흔드는 제안이었다. ‘중고라도 괜찮네.’ 하면서 매매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경기 30로 5037’. 내가 타던 프라이드는 ‘프라이드(pride)’를 좋아하는 후배 영어 교사에게 넘겼다. 프라이드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내 마음은 짝 잃은 워낭소리와도 같았지만, 집도 넓히고 차도 큰 것을 소유하니 어깨가 으쓱했다. 소망이 옛 영화에서처럼 내일의 태양이 되어 내 앞에 섰다.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결국, 내일은 또 다른 내일이 오리니!)”
쉽지만은 않은 결정이었지만, 오래 된 쏘나타 차를 폐기하고 나서 소음 공해와 공기정화에 이바지했다는 생각으로 서운한 마음을 달랜다. 한편 자위하면서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하루에 만 보 이상 걷기가 필수처럼 되었다. 호주에 사는 딸네 가족이 우리 집에 왔을 때 편히 쉬다 갈 수 있는 조금 더 넓은 아파트로 지난겨울 이사했다. 바로 앞에 있는 청소년 문화 센터 공원에서 새로운 산책길을 걷고 있다. 오늘도 작은 행복을 가슴에 안고 즐거운 ‘집콕’ 생활을 한다. 아직도 코로나19 확산이 불안하지만, 예방접종 백신을 맞아 코로나를 벗어날 기대와 희망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