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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rsona Mar 18. 2021

인생·공감 토크

 TV 방송 프로그램 <황금 연못>을 토요일 아침마다 시청한다. 고령 세대들이 출연해서 지난날 삶의 궤적을 더듬으며 인생·공감 토크(Talk)를 한다. 여러 주제에 대해 살아온 경험들을 쏟아낼 때마다 공감할 때가 많다. 

 며칠 전 새벽, 머리맡에 놓여 있어야 할 휴대전화가 없었다. 스프링 튀듯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피고 건넌방의 서랍을 열어보니 지갑과 시계는 온전히 제자리를 잡고 있었다. 선물 보따리도 방구석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하지만 카드 한 장 들어있는 휴대전화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간밤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저녁 시간 졸업생들이 마련한 ‘홈커밍데이’에 초대되어 옛 동료 및 선배 교사들과 인사를 나눴을 테고, 참석한 20여 명의 졸업생과도 즐겁게 지냈을 것이고, 가끔 만나는 제자들도 있고, 30년 만에 보는 제자도 있겠고, 행색들이 무던해지고 몰라보게 자란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생각했을 터이고, 판사다, 의원이다, 대표다 하며 명함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을 것이고. 2차까지 가서 술에 젖어 드는 늦은 시간에 헤어졌을 터인데….

 여기까지 생각이 나면서 결국 내가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가에 머물렀다. 담임을 했던 한 제자한테 전화로 확인하니 택시를 불러 태워 보냈단다. 선생님이 모든 것을 다 챙겼고 특히 휴대전화는 꼭 챙겼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그 택시에 흘렸던 것일까? 아이고, 그럼 어디로 사라진 것이냐? 

 우선 카드사에 분실 신고부터 했다. 아내의 휴대전화로 내 휴대전화에 계속 연락을 했다.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패턴으로 잠금을 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화 소리는 날 텐데…. 오전이 지나면서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휴대전화에 나의 분신과 같은 모든 것들이 저장되어 있었기에. 

 오후에 결혼식에 다녀온 아내가 집에 들어오면서 마지막으로 내 휴대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다. 이런, 기쁜 일이! 택시 기사가 오전에 잠자고 오후에 일하러 나오다 앞 의자 사이에 놓인 전화기를 발견하고 받은 것이다. 그 기사는 친절하게도 어젯밤의 손님을 기억하고 내가 사는 아파트까지 찾아왔다. 아내는 어제 모임에서 받은 선물 보따리를 풀어 더덕 5뿌리와 홍시 5개, 그리고 5만 원의 사례금 봉투를 준비했다. ‘뭐, 그렇게 많이 주려고 해?’ 소리도 못 하고 죄지은 표정으로 멀뚱히 창밖만 바라봤다. 기사에게 나 대신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고 휴대전화를 받아왔다. 내 손으로 돌아온 휴대전화를 받아든 순간 분실로 인한 불안과 스트레스는 안개 걷히듯 사라졌다. 

 오래전 대학 시절 벗과 더불어 봄날 산에 올라 취흥에 젖어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술에 빠진 적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잠자리는 낯선 무덤가였다. 벗은 언제 갔는지 기억조차 없었고 떠오르는 아침 햇살 아래 몽롱한 상태로 산에서 내려와 집에 온 일이 있었다. 취생몽사처럼 내가 사람인지 송장인지 모를 정도의 일이 종종 있었다. 정말 못 말리는 인생이었다.

 황당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학생들에게 한시(漢詩) 한 수를 가르치려고 칠판에 쓰기 시작했다. ‘兩人對酌山花開(양인대작산화개) 一杯一杯復一杯(일배일배부일배) 我醉欲眠君且去(아취욕면군차거) 明朝有意砲琴來(명조유의포금래)’라고. ‘벗과  더불어 대작할 때 꽃이 만발하듯 대화는 무르익고, 한 잔 한 잔 주거니 받거니 또 한 잔. 내가 술에 취하고 자연에 취하거든 자네는 먼저 가시게, 내일 아침에 내가 생각나면 기타 들고 반주하며 해장하세나!’ 시 해석과 함께 나의 대학 시절에 있던 이야기들을 곁들여 학생들과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선생님, 그 시 지은 사람이 누구예요?”라고 질문을 했다. 갑자기 지은이가 누구인지 머리에서 뱅뱅 돌고만 있었다. “허허, 누구긴 누구야, 나지.” “선생님, 진짜예요?” “그렇다니까!” 이렇게 순진한 아이들에게 허풍 치며 거짓말을 했다. 사실 그때에는 아마 숙취 상태가 아니었나 보다. 내가 이백인지, 두보인지, 백거이인지 술과 꿈에 빠져 지냈던 시절과 같이 그때도 그랬다. 할 수 없이 “다음 시간에 분명히 알려 줄게.” 하면서 교실을 나왔다. 잠깐 사이 영혼의 가출이 건망증을 넘어 망각의 순간을 헤맸던 기억이었다. 

 ‘분실과 망각이 치매와 밀접한 운명 관계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문제가 노인성 치매이다. 치매는 다른 질환과 달리 환자 본인의 인간 존엄성도 무너지고 생존까지도 위협받을 뿐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고 통 받는 심각한 질환이다. 대뇌 신경 세포의 손상으로 인해 지능, 의지, 기억이 지속해서 상실되는 병으로 주로 노인에게 나타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노인들의 경우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안경 쓰고 세수하는 사람, 119에 전화하고 소방서 몇 번이냐고 묻는 사람, 목요일이 무슨 요일이야 묻는 사람, 추억의 기억을 더듬으며 옛 친구 만난다고 집을 나가 뱅뱅 돌다 내가 왜 여기 있지 하는 사람이 대체로 그렇지 않을까? 

 오래전 치매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오른다. 이제는 치매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치료 부담으로 인해 어려움도 해소되어 가고 있다. 오늘도 고령 세대들의 인생 공감 토크를 보면서 추억에 남은 분실과 망각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날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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