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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

막내고모

by 던다

1988.1.31


막내고모가 드디어 등장한다. 고모는 팔 남매 중 막내였고 유일하게 서울에서 대학 나온 사람이었다. 고모는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우리 집으로 이사를 왔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 입장에서는 시누이 데리고 사는 것이 꽤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엄마에게는 아마 높은 확률로 선택권이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엄마가 무던하고 베풀기 좋아하고 낙천적이라 그런대로 그럭저럭 잘 지냈다. 놀랄 일도 아닌 것이 상경한 첫째 고모, 둘째 고모에 이어 세 번째로 같이 사는 거였다. 막내 고모 역시 우리 집에 2-3년 살다가 결혼하면서 나가게 되었다.


고모는 어린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에는 내가 그렇게 영향을 받을지 전혀 몰랐다.) 고모는 같은 해 사범대를 졸업하고 바로 중학교 국어교사가 되었다. 교사가 부족하던 때라 한 교과에만도 같은 학교로 세네 명씩 발령받던 때였다. 고모가 대학 때 어울려 놀던 친구들이 고대로 같은 학교에 발령받아 신규교사로 이어서 노는 모습을 보았다.


고모의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행동 양식은 나에게 좀 신선했다. 돌아보면 내가 접촉한 대학교육을 받은 유일한 여자 어른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88년 창간한 한겨레 신문을 읽고 87년 12월에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기호 8번 백기완을 뽑았다고 했다. 당연히 전교조 창단과 함께 가입하고 해직교사를 위해 돈을 보내기도 하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를 즐겨 불렀다.


한 번은 고모가 강남역 언저리에 있는 전교조 모임에 나를 데리고 갔다. 100명 정도는 될 법한 꽤 큰 모임이었는데 앞에서 결의에 차고 우렁찬 목소리로 뭔가를 말하다가 박수를 치고 민중가요를 불렀다. 그러다 “저희 다 함께 주먹 쥐고 손을 들고 부르죠” 제안을 하니 모두가 척척 척척 박자에 맞춰 주먹을 휘두르며 노래를 불렀다. ‘아 이거 아빠가 욕하던 데모 그런 건가?’ 싶었다. 여러 친척들이 고모보고 빨갱이 라고 했었는데 집안에 막내라 그런지 크게 뭐라 하진 않고 어쩐지 귀여워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신문 스크랩을 즐겨하고 이불 깔고 엎드려 책을 읽곤 했다. 당시 한 반에 학생들이 50명은 족히 넘었을 텐데 매번 글쓰기 숙제를 내주고 일일이 다 코멘트를 달아주겠다고 노트 보따리를 지고 집으로 왔다. (훗날 그런 고모의 글쓰기 숙제와 코멘트에 크게 감흥을 받은

제자 한 명은 자라 신문사 기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30대 초반 어지러우던 시절 그 제자와 소개팅을 하기도 했다.)


나와 어떤 긴밀한 교류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좁은 공간에 함께 지내며 알게 모르게 복합적으로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결국 나도 고모와 같은 일을 하게 된 것이아닌가 생각한다.


열 살의 던다야
항상 기도하는 엄마와 회사 일로 바쁜 아버지 말고 또 다른 젊은 어른인 고모랑 가까이 지낼 수 있어서 좋았을 것 같다.
그때는 몰라도 좋았던 기억과 사람, 경험들은 늘 있게 마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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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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