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예술제, 이사 준비, 대구 모험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의 성당의 크리스마스는 그 준비부터 대단했다. 나의 유년기 내내 성당을 아주 성실히 다녔는데 대림절이라 부르는 크리스마스 약 한 달 전부터 부지런히 뭔가를 준비했다. 2학년의 예술제는 임팩트가 그다지 없었던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다 같이 무대 앞에 나가서 모자이크 꾸미기였다가 급히 변경하여 일부 아이들만 나간 게 아닐까 싶다.
이름도 ‘크리스마스 예술제’이다. 예수님 탄생과 예술 파티는 별다른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그냥 앉아서 뭘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뭔가를 직접 한다는 점에서 좋았던 기억으로 남는다.
예술제 끝이었나 미사 끝에는 항상 덩치 큰 주일학교 선생님 한 두 명이 산타 복장을 하고 과자꾸러미를 나눠주는 퍼포먼스를 했다. 셀로판 포장지에 이것저것 넣은 꾸러미였는데 뭐가 됐던 기쁨의 절정 같은 이벤트였다.
국민학교를 1~2년 더 다녔을 뿐인데 일기길이도 많이 늘고 맞춤법도 꽤나 훌륭해진 게 신기하다.
아주 추운 날이었다. 내가 곧 3학년, 오빠가 6학년이 될 즈음이었다. 부모님은 애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를 가기로 큰 마음을 먹으셨던 모양이다. 당시 방배동에 살던 큰 이모와 이모부의 약간의 조언을 얻어 방배동 일대를 물색하셨다고 한다.
(방배동이라고 하면 어쩐지 부촌 같은 느낌이 들지만 사실 부촌이라 할만한 주택가와 값나가는 아파트가 있긴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곳이 훨씬 많았다.)
방배역을 시작으로 남부순환로까지 쭈욱 경사가 져 있는데 역세권은 비싸가 넘기고 계속 올라가다 보니 결국 제일 꼭대기 산아래 아파트를 구하게 됐다. 그 아파트는 율산건설이 지은
아파트였는데 지은 후 부도가 나 아파트값이 주변 시세에 비해 훨씬 낮은 가격이었다고 한다. 그 덕에 우리 집은 서초구 방배동 소재의 아파트, 그것도 가장 인기 없는 1층으로 이사를 갈 수 있었다.
온종일 엄마가 집을 비웠으면 요즘 같으면 아빠가 후닥닥 간단히 국을 데워 밥을 차려주면 되는 것을 당시의 아버지는 간신히 있는 음식 퍼 주는 정도셨던 것 같다. 무거운 공기와 차가운 음식, 엄마가 없는 허전한 집안이 기억에 난다.
과천에서의 이사이지만 그래도 그날의 이사결정은 우리 가족 역사에 꽤나 중요한 일이었다.
우리 엄마는 딸 다섯의 셋째 딸이었고 나에게는 네 명의 이모가 있었다. 당시 엄마와 가까이 지내던 이모는 셋째 이모였고 그래서 이모의 세 자식들과도 대구 서울 거리였는데도 비교적 자주 만났다. 방학이면 이모네 집을 가거나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며칠을 지냈다. 내가 기억하는 셋째 이모는 매우 건강하시고 신앙심이 깊었다. 평생을 쉬지 않고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생계를 꾸리셨다. 그런 걸 생각하면 언니와 조카가 놀러 오는 것조차 부담이었을 텐데 그런 내색 없이 육아와 살림을 억척스럽게 해 나가셨다.
이모네 세 남매는 나보다 한 살 위, 한 살 아래, 세 살 아래로 다 또래라 어울리기 좋았다. 이모가 밥 차려주고 어디론가 가시면 우리는 그 시대 어린이들이 그렇듯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이를 만들어갔다. 왜 그 시절 아이들을 콧물이 많이 났던가. 코를 들이마셔가며 찬바람을 마구 마셔다며 아스팔트가 아닌 길을 걷고 걷다가 땅에 버려진 물건을 주워 놀다가 던지다가 뛰다가 이건 모험이다라고 이름 붙이고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텅 빈 시간과 공간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근면성실의 아버지와 발맞추어 살기 위해선 엄마도 나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했다. 방학인데
왜 새벽 6시에 날 깨우셨을까? 자는 애한테 왜 물을 붓 는다고 하셨을까. 그 말이 벌떡 일어난 나는 또 뭐지.
내가 아침형 인간형이 된 것은 우리 부모의 30년간의 담금질의 결과인 건가.
곧 3학년이 될 던다야
이제까지는 학교에서의 활동을 잘 못 쫓아가는 것 같았겠지만
열 살이 되면서 조금씩 학교 생활이 익숙해질 거야
심지어 두각을 나타낼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