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1학년 생의 첫겨울방학
내 그림일기 그림 중 가장 다채롭게 표현된 일기이다. 친가 친척들이 잔뜩 모인 날이 아니었을까 싶다.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는 경북 군위 의흥이라는 외딴집에 (그러니까 걸어서 15분은 가야 이웃집이 나오는 그런 집들이 드문드문 있는 과수원 농가였다.) 사셨다. 낡고 오래된 시골집에 8남매가 복닥거리며 살다가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두 분만 농사지으며 지내셨다. 겨울 농한기에 자녀들 집에 한 번씩 들르곤 하셨는데 서울에서 자리 잡은 맏이는 둘째 아들인 우리 아버지여서 종종 우리 집이 실질적 김가네 식구 헤드쿼터 같은 곳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푸근하고 사람이 좋다기보다 웃음이 적고 어디 가서도 절대 속지 않는 명민한 분이셨다.
돌이켜보면 겨울에 특히 잦았던 친척 모임에 엄마는 시가 손님치레하느라 매번 힘이 드셨을 것이다. 그래도 엄마는 할머니와 다르게 수더분하고 낙천적인 편이라 그런 시가를 웃음으로 견뎌내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게 다 어디 가지 않는다.)
아! 나는 그 와중에 어떤 포지션이었나 하면 그냥 조용하고 무던한 아이였다. 내가 어떤 관심의 중심이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바쁠 땐 안방에서 적당히 멀뚱히 있었다.
내가 살던 아파트 동 근처에는 언덕에 가까운 야트막한 야산이 있었다. 산을 깎아 계획도시로 아파트를 짓다가 군데군데 그런 언덕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동과 동 사이를 가르는 나무가 우거진 단지 내 오솔길이 있는가 하면 야산을 통해 다닐 수도 있었다. 여름에는 그곳에서 아카시아꽃도 따먹고 할 일 없이 풀을 훑으며 다녔다. 겨울에 눈이 오면 비닐포대나 대충 미끄러질만한 것을 들고 야산에 올라 미끄럼을 탔다.
도통 다정한 면이라고는 없는 3살 터울의 오빠였지만 그나마 사춘기 전에는 좀 괜찮은 사이였던지 같이 놀러도 가고 했었다니 놀랍다. 예나 지금이나 놀이기구라던가 눈썰매라던가 스키라던가 속도감에서 느껴지는 즐거움을 잘 못 느끼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그땐 또 순순히 따라갔었다니 의외다. 아마도 심심한 하루에 선택의 여지없이 따라나섰을 것이다.
그림일기 내용의 절반 정도는 뭘 먹었다는 내용이다. 빵과 우유처럼 흔한 것부터 고구마, 새우깡, 국수 등. 이 날은 좀 특별한 것을 먹어 적어둔 모양이다. 그렇다. 애나 어른이나 사람은 밥만 먹고살 순 없다. 주전부리는 식간의 활력이다. 탄수화물, 단당류, 트랜스지방 섭취를 줄여야 한다느니, 혈당스파이크를 조심해야 된다느니 하는 그런 말이 없던 때였다.
정민이 언니는 나와 7살 차이가 나는 이모의 딸, 외사촌 언니이다. 언니네는 사당역에 가까운 방배동 주택가에 살았다. 내가 살던 과천과는 버스로 30-40분 걸리는 곳이었지만 서울에 사는 엄마 자매는 둘 뿐이라 왕래가 잦았다. 이북 출신의 이모부는 다복한 가정을 원해 쉽지 않은 살림에도 세 남매를 두었다.
정민이 언니가 그중 유일한 딸이었다. 언니는 k-장녀 스타일로 맞벌이하는 부모님 대신 어려서부터 리틀 주부처럼 씩씩하게 지냈다. 언니는 한참 동생인 데다가 리액션이 많지 않아 데리고 놀기 썩 재밌지가 않은 나를 잘 챙겨줬다.
중학생이었던 언니는 초등학생인 나를 데리고 공책을 함께 사자며 반포에 있는 뉴코아(New Core)까지 데리고 간 것이다. 다운타운 반포의 매캐한 공기와 함께 문 닫힌 뉴코아를 봤을 때의 실망감이 되살아난다.
사교육이라고는 모르도 살던 때, 토요일에 가는 성당은 나에게 있어 매우 큰 의미였다. 성당은 대학생 선생님들이 노래도 하고 얘기도 해 주는 일종의 교육, 엔터테인먼트, 보육, (어쩌면 효도?) 그리고 아주아주 약간의 사교기관이었다. 성당을 성실히 다녔던 건 성당 가는 것을 삶의 제1원칙으로 삼으셨던 엄마의 영향이었다. 한창 어린이가 넘쳐나던 시절이라 미사 시간에 성당은 어린이들로 꽉 찼다. (일기는 교리 방학이라 교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재밌지도 않았을 그 시간마저 아쉬워한 과거의 나)
내가 다닌 과천성당은 1986년 말에 지어진 신축성당이었다. 오빠와 성당을 가려면 안내양이 있는 버스를 타고 사람들 사이에 치여가며 대여섯 정거장이나 가야 됐지만 당시엔 다들 그런 모험정신쯤은 장착되어야 일상의 무료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루함이 디폴트, 재미 그게 뭔가
그냥 하루하루 그냥 그냥
엄마가 차려준 밥 먹으며 사는 거야
그런 날들이었다.
새삼 사촌과 친지들과의 교류가 소중했고, 겨울철 간식거리로 이것저것 내어준 엄마가 감사하다.
그 긴 시절의 지루함의 강을 건너
어른이 된 던다야
지금은 네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어른으로 자라 너무 대견하다.
-> 다음 화: 글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2학년의 일기가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