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애주가 할아버지, 강낭콩, 낚시
경북 군위에 할아버지가 무슨 일이었는지 집에 오셨나 보다. 군위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가 됐을 만큼 청정지역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 인적조차 드문 깡시골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때 60대 초반이셨을 것 같다. 농촌에 사셨지만 농사나 지으셨나 모르겠다. 왜 그런고 하니 무슨 연유에서인지 술을 엄청나게 많이 드셨기 때문이다. 내가 명절에 할아버지를 볼 때면 거의 항상 취해계셨다. 대구경북에 서 생산되던 금복주 페트병이 오래된 시골집 창고옆에 짚더미처럼 쌓여있던 기억이 난다.
과거에는 부산에서 농기구를 발명해서 큰돈을 버셨다고 하던데 여차저차한 이유로 돈을 잃고 결국 시골에 안착하게 됐다고 했다. 오랜만에 손주들이 오면 반가운 마음에서인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쉬지 않고 연설을 늘어놓으셨다. 혀꼬인 사투리라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고 당시에는 어른이 말씀하시면 그냥 주야장천 들어야 되는 줄 알고 그렇게 힘겹게 듣고만 있었다. 그래도 간혹 신기한 과학 실험 같은 것도 눈앞에서 보여주셨다. 작은 종이를 불에 태우다가 금세 불이 꺼지는 그런 실험이었던 것 같다. 엿튼 할아버지는 매우 똑똑하시고 또 괴팍하셨던 분이셨다. 한마디로 어린이 친화적인 구석은 하나도 없는 분이셨다. 그런데도 어린 시절 오랜만에 보는 사람은 늘 반갑고 설레었다.
저학년 때는 꼭 강낭콩 키우는 수업이 있었다. 선생님 말씀이라면 정말 잘 따르는 나였지만 저런 식물이건 올챙이건 뭘 키우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그 그대로 따라 했으나 어딘가에 뭔가가 부족했던지 뜻대로 자라지 않았다. 당시에는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없는데 반성을 하고 반성을 하는 내 모습이 조금 안쓰럽다. 그때의 선생님의 마음이 문득 궁금하다. 교실 가득 메운 학생들을 보는 마음은 어떠했는지. 딱히 다정하고 사랑이 많은 분은 아니었는데 또 막상 어른 대 어른으로 이야기를 나누면 다를지도 모르니까.
(88 올림픽 개최 준비에 한창 박차를 가하던 때여서인지 참 잘했어요 도장도 호돌이구나.)
6시 40분 언저리에 일어났었는데 기상시간이 새벽 1시 50분이다. 아버지는 그 시대 많은 가장들이 그렇듯 충실한 직장인이었다. 주 6일 근무에 새벽 6시에 일어나 7시 15분에 칼같이 출근하셨다. 한 방에서 부모님과 함께 자던 나는 아버지 출근준비하는 소리에 깨고 식사하실 때 같이 아침을 먹었다. 극도의 금욕적인 삶을 사는 아버지의 몇 안 되는 기쁨은 낚시였다. 평생 자가용 없으신 분이 낚시는 어찌 간단 말인가 싶은데 당시에는 동네마다 드문드문 낚시용품 파는 가게가 있었다. 우리 동네엔 남서울낚시회가 있었다. 주말에 사람을 모아 버스를 대절해서 낚시터에 내려주고 낚시회 회장 그러니까 가게 사장님은 그날 잡힌 물고기 크기를 재서 수건과 같은 소소한 경품을 주었다.
아버지의 취미활동에 나머지 식구들은 그냥 끌려갔다고 보면 된다. 차라리 혼자 가시기 왜 우리 모두를 데리고 가셨는지는 모르겠다. 온종일 아버지 낚시하시는데 숨죽여 있다가 긴긴 지루함과 싸우다가 오후가 되어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조금이라도 부스럭 소리를 내면 “거 조용히 해라!” 따끔하게 한 소리를 들었다. 나랑 오빠처럼 조용한 성정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닌 자식 안 만난 것이 행운이셨을 텐데 아실까. 허허.
그렇게 민물고기의 비린내와 함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잡은 붕어를 손질해서 붕어탕을 끓이셨다. 그 역시 내가 질색하는 음식 중 하나였는데 엄마는 가장의 어깨를 항상 추켜세워주시는 스타일이 셔서인지 아버지가 잡아오신 귀한 붕어라고 구태어 강조하셨다. 아버지는 우리 집에 태양왕 루이 14세였다.
아홉 살 던다야
어린이를 위한 친절한 세상은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애써 기쁨을 찾고
바른생활을 하기 위해 애썼구나
싫은 거 참고 지루한 거 참아 오늘의 네가 됐구나
기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