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과 아침운동
1989년 4학년이 되었다.
일기장 곳곳에서 소름 돋도록 도덕, 예규, 미풍양속을 철저히 지켜 살려는 모습이 보인다. ‘배가 너무 고파서 손으로 와구와구 고기를 먹었다. 숙녀가 아래서 되는지 원.’ 이라던가. 시험 보고 나서 답안지를 받고 ’더 높은 점수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 라든가. 점수받고 반성하고 예복습을 열심히 할 것을 다짐한다던가. 기상시간이 아침 7:10분이라고 되어 있는데 스스로에 대한 게으름에 또 반성하는 내용이라던가.
아버지는 금욕과 절약으로, 어머니는 신앙과 성실로 무장된 분이셨으니 나는 부모의 미니어처 같은 모습이었다.
4월 23일은 엄마가 대구에 외삼촌 결혼식에 가셔서 집을 비운 내용이다. 외삼촌은 외할머니의 늦둥이 아들이었다. 위로는 우리 엄마를 포함하여 누나가 다섯이었다. 직접 만난 적은 많지 않았다. 외삼촌 결혼 1년 전인가 서울로 이사 온 우리 집에 와서 마루가 운동장만하다고 사람 좋게 얘기한 기억이 전부이다. 서울, 그것도 아. 파. 트. 에 사는 유일한 누나여서 괜스레 기분이 좋으셨던 것인지. 여하튼 우리 집은 그랬다. 그 속사정이 어찌 됐던 가족 많은 양가 집에 우리집은 서울에 자리잡은 자랑스러운 오빠네, 동생네, 누나네 집이었다.
이 일기를 보니 유독 마음이 아프다. 외삼촌은 결혼 후 1년쯤 뒤 아들을 얻었고 그 아들이 백일정도 됐을 때 직장에서 불의의 사고로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 그 뒤 외숙모는 갓난쟁이 아들을 혼자 키우다시피 했다. 엄마가 애틋해하던 남동생을 잃고 엄마는 종종 외삼촌의 영(spirit)이 자신 앞에 왔다가 갔다는 말을 하셨다. “윤수가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내 얼굴 앞에 왔다가 갔어.” 그땐 대수롭지 않게 흘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동물을 잃어도 그 기운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가까운 가족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88 올림픽을 즈음해서 서머타임을 시행했었다. 해가 길어지는 여름엔 1시간 당기고 짧아지면 뒤로 보내는 그런 제도였다. 새벽 6시에 엄마는 왜 나를 깨운 걸까. 새벽 6시에 더 자고 싶은 것은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일기에 적혀 있지 않지만 어릴 적 어느 날인가 아버지가 엄근진한 말투로(거의 모든 말에 위엄이 있었지만) “내일부터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해라!” 지령을 내리셨다. 그럴 때 엄마는 “아이고 애들 더 자야 잘 크죠.” 그런 말은 하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릴 때 두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찾고 10리를 걷고 뛰어 학교에 다니셨다.”고 아버지 말씀을 추켜세우셨다. 아버지 말씀에 나머지 세명은 동의를 하든 안하든 무조건 따르는 분위기였고 엄마는 그 중에 선봉에 계셨다.
지금의 부모라면 운동하는 학원을 보낸다던가, 다정한 부모라면 함께 배드민턴이나 공놀이나 달리기나 뭔가를 같이 하자고 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자녀와 시간 보내는 것에 서툰 분이었다. 지령 아래 그 시간은 각자가 알아서 보내야 할 일이었다. 이른 아침 오빠와 나는 반쯤 감은 눈으로 내쫓기다시피 밖으로 나가 아파트 단지를 두어 바퀴 돌다가 들어갔다. 그때의 기분이라면 졸리다. 귀찮다. 아빠가 무섭다. 정도였다. 내가 왜 이래야 하나 하는 의구심이라던가, 에이 그냥 잘 꺼야 같은 반항 따위는 감히 떠올릴 수도 없었다. 꾸역꾸역 밖으로 나갔고 상쾌함을 느끼기에는 어린 내가 적막한 공기 속에서 어찌어찌 시간을 보냈다. 오빠가 있지 않았냐 하지만 오빠 역시 감정을 교류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딱히 가깝지도 않았지만 저학년 때를 지나면서 조금씩 더 멀어졌다.
그럼에도 그렇게라도 나갔다오니 기분이 상쾌해져서 좋았다고 적고야 말았다. 기어코 ‘사운드 마인드 사운드 바디’를 되새기며 일기를 마친다.
열한 살의 던다야
부모님의 보살핌이 조금씩 덜 필요해져 가는 중이구나. 그런데도 집에 엄마가 없으면 그 냉랭한 분위기가 너무 싫었었지. 다정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에 와서야 어린이에게는 무작정 사랑해 주는 사람이 반드시 한 명 이상 있어야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없어도 시험을 못 봐도 새벽에 밖에 나가도 어떤 상황에도 있는 그대로 겪어내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또 기특하기도 하다.
싫은 것을 참고 많이 한 사람이 결국 뭔가를 이루어낸다고들 하는데. 그런 거로 치면 꼬마 던다는 이미 위인이다!
잘 자라고 있는 너의 성장을 언제나 응원하고 있어. 크면 대충살기도 하는 법은 뒤늦게 배우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