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의자
결혼해서 서울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셋째 고모와 고모부가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대구출신인
고모와 고무부에게 서울은 아직 낯선 도시였을 것이다.
우리 집 역시 과천에 살다가 이사 온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엄마는 활동적이고 생기 있는 분이었다. 애꿎게도 당신의 남편은 좀처럼 어딘가를 나가는 분이 아니었다. 그런 데다가 극단적인 절약생활로 다들 자가용을 살 그즈음에도 우리 집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그 정신은 상상 그 이상으로 꼿꼿하여 일평생 단 한 번도 차를 소유하신 적이 없다.) 그러니 움직이기 싫어하시는 아버지와 차 없는 여건이 합세하여 온 가족과 나들이 비슷한 것을 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다가 집안에 고모부라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좀 변화가 생겼다.
특히 셋째 고모부는 선한 분이셨다. 덩치도 크고 인상이 좋으셔서 웃는 곰 같았다. 처음 봤을 때는 고모부는 투도어 뒤에 짐 싣는 칸이 있는 (요즘은 볼 수 없는, 미니 세단 화물차?) 차를 몰았다. 업무용 차였다. 그런들 어떤들 집에 차가 없어서 운전하는 사람이라던가, 차를 소유한다던가, 어른이 차를 몰고 원하는 곳에 가는 그런 개념이 모두 신선하고 신기했다. 얼마 후에는 고무부는 봉고차를 몰았다. 그것도 회사 업무용 차였다. 고모부가 봉고차를 몰게 되면서 그 차는 곧 처갓집 식구들의 발이 되다시피 했다.
동네를 넘어서는 어디든 간 적이 없었는데 고모부 봉고차 덕분에 이 날 밤에 남산에 간 모양이다. 우리집에 같이 살던 막내시누이와 놀러 온 셋째 시누이 내외 모두 저녁밥을 차려내고 대충 치우고 엄마는 이런 밤나들이가 작은 기분전환이 되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올림픽대로, 한강, 밤의 남산. 이런 단어들이 일기장에 등장한 것 자체가 지금 나에게도 놀랍다. 고모, 고모부의 왕래가 잦아 봉고차 타고 나들이 갔던 때를 빼고는 우리 가족은 다시 여가 침체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는 한강을 넘어간 적도 거의 없을 정도로 잠잠하게 살았다. 그런 확대가족과의 교류가 없었더라면 대단히 폐쇄적으로 살았을 우리 가족이었다. 고모, 고모부나 이모, 이모부, 사촌들 덕분에 부모님이 해주지 못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요즘에 이르러서는 개인의 취향과 의사를 무시한 가족문화나 시월드에서 며느리에게 강요하는 의무나 도리에 반발한다. 함께하기보다 개개인의 삶이 더 중요해졌다. 나 역시 가족들이 우르르 뭘 하자 하거나, 며느리로 뭘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손익을 따지며 예민해진다. 그 시절에는 김 씨 가족이 아니었던 엄마라던가 고모부는 그저 남편이나 아내로 인해 생긴 가족들을 위해 많은 걸 내어주셨다. 더 길게 보면 엄마는 그로 인해 얽히고설킨 아픔을 갖게 되셨지만 단지 그 시절만 보면 엄마의 희생이 거름이 되어 일단 화목하였다. 그 상황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이 날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당시에 내가 쓰던 책상은 내 나이보다도 많았다. 엄마가 오빠를 임신해 있을 때 아버지가 미래의 아이를 위해 책상을 사셨다고 한다. 그 책상을 내가 이어받아 쓰고 있었다. 오른쪽 아래 작안 두 칸 서랍이 있는 갈색 책상이었다.
의자는 생각이 안 나지만 정황상 부서졌거나 해서 아예 의자를 쓸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뭘 사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좀처럼 같이 외출한 적 없었던 아버지랑 같이 의자를 사려고 집을 나섰다는 일 자체가 대단한 이벤트였다. 아마도 남부터미널이나 서초동 꽃시장 근처에 있었던 중고가구거리를 걸었던 것 같다. 물건을 사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니 그것이 중고든 새 거든 색깔이 삘갛든 노랗든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 나를 위한 물건을 산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선물이었다.
열 살의 던다야.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았을 아이.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때였다.
제한된 여건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를 찾았구나.
지금은 훨씬 많은 풍요와 자유를 얻게 되었는데
지금도 역시나 기쁨과 감사를 애써 찾고 있어.
부족했던 경험, 참고 숨겼던 마음이 바탕이
되어 지금의 너를 만들었다.
넌 너만의 취향를 갖고,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아는 어른으로 자라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