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고모는 대구에 살다가 결혼 후에 서울에 살게
되었다. 다른 세 명의 고모는 모두 우리 집에 살다가 결혼을 했는데 셋째 고모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좀 어색하고 또 궁금하기도 한 고모였는데 서울에서 출산하고 육아하며 우리 집에 꽤 자주 놀러 왔다. 고모의 오빠인 우리 아버지와는 몇 마디 나누지 않고 주로 엄마랑 가까이 지냈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가 오빠와 결혼한 사이인 언니라고 이렇게나 가까워지는 게 문득 신기하다. 엄마도 (많은 부분 강요된 희생이었지만) 품이 넓고 무던한 사람이라 고모들을 그렇게 줄줄이 같이 살고 또 분가하고 나서도 고모들이 놀러 오면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고모들 내외와 어린 조카들이 우르르 놀러 오고 할머니까지 오시게 되면 바로 잔치집이 되어버리는데 엄마는 그때마다 하하 호호 웃으며 밥상을 차려냈다.
그땐 아무 생각 없다가 그렇게 내어주고 퍼주다가 마침내 그 바다와 같은 마음이 정작 본인들의 손주들과 결혼한 딸을 대할 때가 되어서는 말라버린 느낌이 든다. 그건 이윽고 강요하는 상황이 아니라 자유로워지셔서 그런 것인지, 연로해지셔서 그런지, 한 사람이 베풀 수 있는 아량이 고갈되어서인지 모르겠다.
아! 나의 일기로 돌아와서 3학년 겨울방학 일기를 읽는데 이 시기에 나의 초자아가 비대해졌는지 내용이 너무 교훈적이거나 너무 꾸며대서 오글거렸다. 필체마저 정자처럼 굴려 쓴 걸 보면 어떤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담임선생님이 무섭고 규율이 엄격해서 짜인 대로 사느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짜야지면 짜인 대로 더 열심히 맞춰가며 살며 선생님이 한 번씩 내려주는 칭찬에 만족해하며 살던 때였다.
1988년 12월 8일 셋째 고모는 출산을 했고 아이 이름을 진희라고 지었다. 진희는 3-4년간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면서 사촌의 성장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진희는 얼굴이 두부같이 하얗고 성격도 둥글둥글하고 순한 아이였다. 노래를 시키면 음정과 박자에 맞게 잘 불렀던 기억이 난다. 고모는 낯선 도시에서 아이를 낳고 같은 지역에 터 잡은 자매들과 오빠네와 교류하며 힘에 부치는 영유아 육아시기를 보냈던 것 같다.
어릴 때 유난히 사고 싶었던 물건들이 있다. 키보드, 전신거울, 침대가 그런 것들이었다. 그렇게 거창한 거 말고도 보온도시락이나 기억에 나지 않은 사소한 것들도 부모님은 유난히도 잘 사주지 않으셨다. 극도의 절약을 하는 아버지와 옥죄어진 생활비에 도저히 여유가 없어서 엄마도 나에게 쉽게 뭘 사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엄마는 “간신히 밥만 먹고살았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 어린 나는 그렇다고 쳐도 살림하는 엄마는 특히 힘드셨다. 동네 사람들에 비해 훨씬 적은 생활비로 생활한다는 것은 사람들과 교류하는데 어려움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했어야 됐나? 싶다. 반찬개수도 너무 많으면 안 되고, 제철과일이 아닌 과일을 먹어도 안 되고, 식사 두 시간 이내에
군것질을 하면 안 되고, 자가용은 물론이거니와 에어컨, 선풍기 같은 냉난방 기구도 없고 전자레인지도 없이 줄곧 살았다. 절약을 한다 해고 좀 더 나은 삶의 환경을 만드는 방법을 궁리해 볼 수도 있는데 너무 긴 시간 참고만 살았다. 그 인고의 시간 덕분에 남들보다 불편함을 잘 참기도 하고 그 불편함이 싫어서 더 못 견뎌하기도 한다. 새벽배송과 총알배송에 익숙한 시대를 살며 과거의 내가 아득해진다.
던다야
남을 많이 의식한 듯이 쓴 일기이지만 그래고 꾸준히 썼던 그것만으로도 대견하다. 늘 친지들과 접촉하며 자라온 것이 너에게도 알게 모르게 여러 사람을 대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
던다의 부모님은 서울에서 가장 먼저 자리 잡아 맏이역할을 하시며, 그 책임과 도리를 하느라 고생스러우셨을 것 같아. 부모로 불만도 많겠지만 한 인간으로 있는 그대로의 삶을 존중하고 존경하자. 그땐 그게 최선이었어. 너도 너대로 열 살을 살아내느라 최선을 다했듯이. 애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