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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11

by 던다

국민학교 2~4학년까지 공책은 오히려 빳빳하고 하얗고 디자인도 괜찮았다. 올림픽 이후라 그런지 4학년의 공책은 질이 훅 떨어진 것 같다.


여하튼 나는 4학년이 되어서도 꾸준히 일기를 썼다. 내가 일기를 열심히 쓴 것은 당시의 교장 선생님 덕인 부분도 있다. 물론 담임선생님의 일기 검사를 하는 수고 덕분이기도 하다. 당시에 김장호 교장선생님이 남달리 글쓰기 교육에 관심이 많아서 각종 글짓기 대회며 일기 쓰기의 상이 많았다. 마침 조용했던 내가 그런 면에서 미미하게나마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일기장에 교장샘 도장도 찍혀 있다니 그것도 새삼 영광이다.

1989년 11월. 농한기라 시골에 사시는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신 모양이다. 오빠방에 누워 지내시다가 술 드시는 것이 주 일과였다. 할아버지는 애주가를 넘어서 알코올중독이었다. 거의 항상 취해계셔서 할아버지와 주고받는 어떤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생각해 보면 내가 아버지와 그렇듯, 내 아이들도 외할아버지와 별다른 감정적 교류가 없다. 물론 마음은 넘어질 때 격려하고 잘하고 있다면 더 북돋아주고 싶으리라 믿는다.

마음의 문제 혹은 표현의 문제겠거니 그것이 아니라면 본인 스스로의 삶에 풀지 못한 문제가 이미 가득이라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한다.


나에게 강렬한 영향을 미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이름을 지어주신 점. 그 정도이다. 왜 그냥 은경이 소영이 지연이 그런 무난한 이름을 짓지 50년대생 이전 여자들의 이름에나 있을 ‘옥‘자를 넣었는지 묻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세월이 너무 지나가버렸다.


할아버지는 내가 기억하는 한 한결같이 부지런히 마시다가 이 일기를 쓴 시점으로부터 약 4개월 후에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 역시 우리 집에 잠시 오셔서 오빠방에 지내시던 중이었다. 한 하루이틀 술을 드시지 않고 꽤나 멀쩡해 보여서 그것이 서로 간 어색하던 중이었다. 그 마지막 장면을 아주 가까이서 지켜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동영상을 보다가 정지화면을 누른 것 같았다.

유년기에 나는 카드나 편지를 써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즐겨했다. 여차하면 카드와 편지지까지고 만들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초대장도 만들었다. 어떤 디자인으로 만들고 무슨 문구를 넣고 누구에게 줄지 궁리하는 것이 좋았다. 말 그대로 도화지를 ‘곱게’ 접고 오리고 붙이면서 생각한 것이 냉장고 디자인이었다.


4학년의 나는 친구관계가 더 넓혀졌다. 생전 남자애들과 어울려 지내는 일이 없었는데 앞자리에 앉은 김진우라는 아이와 친하게 지냈다. 키가 좀 작고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웃기고 목소리가 큰 재간둥이 었다. 난 사실 수업 중에 순간순간 재밌는 생각을 잘 떠올리는 편이었다. 목소리가 작아 혼잣말처럼 작게 웃긴 멘트를 하면 김진우가 확성기처럼 그 말을 크게 말했다. 그러면 반 애들이 깔깔 웃곤 했다. 뭐랄까 인간 프롬프트와 배우와의 관계 같다고 할까. 그때 인싸기질이 다분했던 김진우는 잘 컸으려나 모르겠다. 공인중개사나 수입차딜러 그런 일 하지 않을까.


89년의 던다야
매해 나의 세계는 좀 더 넓어지고 관계도 다양해지고 있구나. 그 어렵다는 교우관계도 큰 어려움 없이 흘러가는 것 같아 참 다행이다.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조부모를 만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친구들만은 재밌고 편안했네.
일기장에 한가득 ‘공부를 더 잘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자 ‘, ‘시간과 돈을 아껴 쓰자 ‘,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되자’라는 다짐으로 꽉 차 있구나. 어느 쪽을 펼쳐도 건전 그 잡채였던 너. 그런 마음을 새기고 새겨 지금의 네가 되었다. 바르고 선하게 커가는 너의 모습을 한결같이 응원하고 있어!
대견하고 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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