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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1

새벽미사, 할머니집 가기

by 던다

호돌이 칸나 일기장이 둘리 일기정이 되었다. 뒷면에 적힌 (주)영문구는 1980년에 설립된 회사로 현재는 앨범으로 유명한 칸나에 인수된 것 같다. 일기장을 봐도 예전에는 유럽아이의 모습이 이때에는 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의 사진이 실려있다. 어린 시절 서양 문화를 알게 모르게 이상화하고 반면 그 외의 문화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로 자랐다. 당시에는 아버지는 바깥에서 힘써 일하고 어머니는 집에서 국산을 애용하고 절약하여 선진국 대열에 올라가야 한다는 그런 국민적 합의가 있었다.


나는 엄마와의 관계를 떠올리면 지독히도 깊게 곪은 상처가 떠오른다. 유년기의 나를 어미새처럼 보호해 주셨지만 세월이 가며 아픔과 절망을 함께 주시기도 했다. 여느 아픈 관계가 그렇듯 낱낱이 펼쳐놓기도 버거워 지금은 잠시 한편으로 두고 연락을 멀리하며 일종의 관계 디톡스를 하는 중이다. 그런 중에 펼친 1990년 일기장엔 빼곡히 엄마의 댓글이 달려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지금은 너무 버거워 연락도 못하는데 내가 한창 필요할 때 어찌 됐던 내 곁에 있던 사람이었다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직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그런 한 자락의 기억이 관계 회복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건 마치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가 사춘기 열병으로 속이 썩어가고 있을 때 애써 자녀가 한창 귀엽던 3-4살 때의 사진을 냉장고에 붙여 수시로 보며 마음을 달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가까운 관계일수록 깊게 사랑하고 깊게 할퀴게 되니까.


1990년의 1월로 돌아가보자.

어릴 때 나는 엄마의 영향(강요)으로 성당을 참 열심히 다녔다. 피아노는 고작 1-2년 배웠지만 피아노 선생님한테 약간의 반주법을 배워서 코드를 보면 얼추 반주를 할 수 있었다. 그래봤자 초급 수준이었다. 엄마는 평일에도 수시로 성당을 가셨고 나도 종종 따라갔다. 어느날 빈 성당에 오르간을 몰래 쳤다. 그 모습을 우연히 본 수녀님이 미사 반주를 하라고 했다. 성당마다 다르지만 보통 평일(화~금) 새벽 6시, 오전 10시 30분, 오후 6시 30분 정도에 미사가 있다. 매 미사에 4곡(입당성가-봉헌성가-성체성가-묵상 중 작게 치는 성가-퇴장성가) 성가를 부르는데 그때 오르간을 칠 반주자가 필요하다. 그 반주자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지 국민학생이었던 나에게 새벽미사 한 요일을 부탁한 것이다. 더군다나 엄마는 아버지 출근준비 도와야 돼서 같이 못 가고 나 혼자서 어두컴컴하고 인적 드문 거리를 해쳐 성당에 갔다. 1990년 1월에 그렇게 시작하여 결혼하기 직전인 2009년 12월까지 20년을 꼬박 주 1회 새벽미사 반주를 했다.


긴 기간 반주를 하며 서툰 복사들도 보고, 부임했다가 떠나가는 수녀님들, 신부님들도 많이 봤다. 새벽미사 반주를 시작해서 일요일의 어린이 미사 반주도 하게 됐고 어린이 성가 합창대회 반주도 하는 되고 중학생이 되어 청소년 미사 반주도 중2 정도까지 한 것 같다.

다행히 우리 집은 자주 여행을 가는 집이 아니고 나는 몸이 대단히 건강하진 못해도 자주 아픈 편이 아니어서 직장인처럼 한결같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사실 내가 원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고 엄마가 너무 바래서 시작한 거였고 하면서도 싫다, 좋다, 귀찮다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 내가 왜 해야 되나, 이건 어떤 의미가 있다. 그런 생각도 없고 그냥 해야 되는 일이라 했다. 공부를 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고 우리 집만의 여러 금기나 규칙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자가용을 소유한 적 없었던 우리 집이었다. 하지만 부모에 대한 도리는 확실해서 명절이면 꼭 경상북도 군위까지 대중교통으로 내려갔다. (지금 생각하면 상경한 아들의 도리는 참 깔끔하다. 명절에 얼굴 뵙기. 부모와 긴 대화 하지 않기. 주신 밥 먹기.) 웬만하면 군소리 안 하는 나였지만 저 날은 정말 너무 힘들었다. 작은 아버지 회사에서 명절이라고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여러 군데를 찍고 찍고 찍어서 대구에 내리는 코스였다. 교통 정체는 말도 못 하고 좌석은 좁고 불편했다. 버스 안의 디지털시계는 빨갛게 숫자를 보여줬는데 얼마나 오래 있었던지 am, pm이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 버스에 내려서도 도로변을 걷고 어렵게 택시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할머니댁에 도착했다. 하-

아버지 형제들과 할머니를 위한 잠깐의 기쁨을 위해 우리는 참 많은 수고를 들였다.


열두 살의 던다야.
금요일 새벽마다 미사반주하던 네가 떠오른다. 할머니들, 아주머니들이 소복이 모인 성당에 쭈빗쭈빗 앞으로 나가 반주를 했지. 그 긴 시간 신과 엄마에게 효도하느라 애썼다.

여덟 살 아들을 성당에 데려갔다가 “난 무신론자야. 성당 가운데(제대)에 인사하는 거 안 해”라는 아들 말을 듣고 마음이 복잡해졌던 너도 떠오른다.

너는 그만큼이나 온순하고 성실하고 꾸준한 아이였다. 주변 어른들이 그런 너를 쉽게 조종할 수 있었겠지만 또 그 덕에 인내와 끈기를 기를 수 있기도 했지. 지금은 해야 할 일, 하고 싶지 않은 일, 옳은 일, 그른 일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와 비판력이 생기고,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생겨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 시기를 거쳐온 네가 대견하고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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