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다쉬 청바지, 성당 여름 캠프, 무용공연
92년 중학교 1학년의 여름이었다.
그즈음 혜조라는 친구와 꽤 가까이 지냈다. 혜조는 순수하고 솔직한 성격이었다. 때로는 너무 솔직해서 속상한 적도 있었지만 그보다 약은 면이 전혀 없던 순진한 나와 통하는 면이 있어 오래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한 명이 불쑥 “우리 죽은 개미 묻어주자”그러면 “그러자”하거나, “내 성격을 좀 바꾸고 싶어”하면 “그래! 넌 오늘부터 **한 성격이야”라고 단박에 말해줬다.) 혜조네 아버지는 인품 좋아 보이시는 의대 교수님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집에 공연 초대권이 많이 들어왔다. 마침 예술의 전당도 지척이고 해서 친구 덕에 비싼 오페라도 무용공연도 봤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한 시절에 예술의 전당이란 곳이 대중들에게 지금만큼 많이 찾는 곳이 아니던 시절부터 그곳을 근처 공원 가듯 자주 갔다.
혜조네 집도 곧잘 놀러 갔다. 친구 집에는 우리 집에는 단행본 한 권도 구하기 힘든 책이 전집으로 좍좍 꽂혀 있었다. 분야도 다양하고 종류도 권수도 많았다. 그런 데다가 혜조는 늦둥이에 팔삭둥이 었나 해서 존재자체로 정말 귀한 아이여서 난 덩달아 귀한 딸의 귀한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유행하는 물건에 좀 더 민감해졌다. 당시에 청바지는 마리떼프랑소와저버, 게스, 겟유즈드가, 가방은 이스트팩과 잔스포츠가 인기였다. 모두가 입는 들고 다니는 그런 것들이 하고 싶었는데 나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극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을 실천하시는 부모님 슬하에 지내다 보니 자연히 체념하는 것에 익숙했다. 반면 혜조는 종류별로 모두 갖고 있거나 심지어 색깔별로도 갖고 있어 충격이었다.
우리가 같이 다니던 성당은 위치가 그래서인지 잘 사는 아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뭐랄까 유행템으로 쫙 입고 다니는 언니 오빠들이 더 멋있고 잘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존재감이 미미했던 나는 그 나도 저렇게 됐으면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당시 혜조는 엉뚱한 말을 잘하고 외모도 귀여워 언니 오빠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나는 왜 인기가 없는가? 저런 성격은 쉽게 장착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내가 인기가 없는 건 게스청바지 때문인가? 그런 생각을 했다. 우습지만 진지했다.
엄마는 대체 어디서 말머리 문양의 죠다쉬 청바지가 아닌 말머리 문양 옆에 뭔가가 더 있는 조다 뭐 청바지를 사 오셨을까. 뭘 입든 전반적인 밸런스가 중요한 것을 지금에서야 알지만 그때는 내 청바지의 마크 하나에 한껏 의기소침하고 또 한껏 자신감 생기는 그런 때였다.
방학이었지만 학원을 다니지 않았던 때였다.
그 거대한 빈 공간을 성당활동이 많이 채워줬다. 특히 여름엔 대학생 선생님들과 여름캠프 가는 것이 아주 빅이벤트였다. 한 조에 6-7명씩 있었고 고2 언니, 오빠들이 조장을 맡아 3박 4일을 함께 숙식을 하며 지냈다.
교리선생님들은 그 프로그램을 위해 아침 체조도 만들고, 야밤에 산행 루트도 짜고 정말 공을 많이 들였을 것 같다. 이 날의 일정의 마무리는 담력훈련 같은 야간 산행이었다. 지도를 보면서 꼭 찍고 가야 하는 지점들을 거쳐야 했다. 각 베이스마다 교리샘들이 있어서 그때마다의 미션을 주고 우리는 수행했다. 일종의 군대식 얼차려 같은 것이었는데 그러면서 협동심도 기르고 담력도 좋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며칠 부대끼며 지내면 당연히 많이 가까워졌다.
마지막날에는 롤링페이퍼를 썼는데 나는 그 롤링페이퍼를 좋아했다. 나에게 써주는 그 몇 마디가 마치 나의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또 읽고 또 읽었고 그 종이를 오래 간직하며 주기적으로 꺼내 읽었다. (그래봤자 ‘얌전할 줄 알았는데 엉뚱하고 용감하다. 자주 얼굴 보며 지내자.‘ 뭐 그런 별다를 것 없는 내용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에 대해 여전히 궁금하다.
92년 8.14과 8.15은
내 인생에 무용공연과 관련된 날로 기억한다.
중학교 1학년 때 무용시간이 있었다. 진한 버건디(팥죽색) 무용타이즈에 짧고 나풀거리는 연분홍 치마를 입고 일주일에 한 번씩 무용 수업을 받았다. 50대 중반 정도의 무용선생님이셨다. (놀랍게도 존함도 뚜렷이 기억이 난다. *채옥 선생님이셨다. ‘채’는 요즘 인기 많은 젊은 감각의 글자고 ‘옥‘은 촌스러운 느낌인데 두 개가 결합한 이름이군.이라고 기억했다.) 선생님은 엄하셨다.
선생님은 우리 1학년들에게 여름방학 숙제로 ‘무용공연 보고 감상문 써오기‘를 내주셨다. 하.. 무용공연이 웬 말이람. 안 해가도 될 줄 알고 안일하게 있다가 어디서 소문을 들었던지 갑자기 꼭 해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인터넷도 없어 정보가 귀한 시절이라 누군가가 어디에 무슨 공연있데더라 하면 그냥 거길 따라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간신히 한 군데 알아왔더니 이번엔 2만 원이라는 가격이 문제였다. 당시에 김밥을 1700원에 팔고 있던 엄마에게 2만원짜리 공연 보러 간다고 했다가 절약의 중요성에 대해 일장연설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단념하고 어찌어찌 용케(somehow manage to) 다른 공연을 알게 돼 결국 3000원인가 5000원인가 훨씬 싼 값의 공연을 보러 가게 됐다.
장소는 혜화역 근처였고 공연장 1층에서 나는 생소한 냄새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촛농에서 나는 냄새 같기도 하고 새 건물에서 나는 냄새 같기도 했다. 일생일대의 무용 공연장에 온 낯선 상황과 낯선 건물, 천장 높이 빛나는 샹들리제와 간신히 오게 된 이 공연, 그리고 마침애 숙제 못해갈 뻔했던 상황에서 구제된 안도감 등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일었다.
그래서 공연은 어땠냐 하면?
당시 내 시선에서 어려웠다. 대중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공연이라 티켓값이 쌌나 싶었다. 자막 없이 제3세계 영화를 쭉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찌 됐던 끝까지 보고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먼 길을 돌아왔다. 그날의 티켓은 성당 여름캠프의 롤링페이퍼와 함께 오래 간직했는데 아직 그 무용공연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창무’라고 적혀 있었다. 무심결에 인타넷에 검색해 보니 창무 공연을 92년 내가 본 그 해에 시작한 이래 작년에 30회 공연을 했다고 한다. 얼떨결에 무용사에 있어 중요한 공연을 보게 된 셈이었다.
선생님이 무심히 내주는 방학 숙제는 어느 학생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무용선생님께 감사하다. 지금은 학교에서 숙제가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여름이면 숙제거리를 생각해 낸다. 꼭 해야 돼요? 묻고 그건 아니야 하면 바로 안도의 표정과 함께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학생들이 대다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여름방학숙제가 일종의 앵커처럼 머릿속에 남겨두고 대충이라도 해보려 할 테니까.
풋풋한 청소년 던다야
게스청바지를 입지 못하고 2만 원짜리 공연을 못 가서 아쉬워한 때였구나. 알뜰한 부모님 덕에 뭐든 어렵게 손안에 넣을 수 있었던 때였지. 그때가 문득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너는 커서 옷도 네 맘대로 질릴 때까지 사다가 이제 그만즘 사자고 생각할 때가 올 거야. 브랜드보다 전체적인 스타일을 궁리하는 사람이 될 거야.
연 2회 정도는 공연도 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게 될 거야. 단지 시간 내기가 어려워, 꼭 보고 싶은 공연이 없어서 보지 않을 뿐일 거야.
네가 어떤 성격인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관련 학과에 진학하고 매일 아침 일기를 쓰며 자신을 탐험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거야.
오늘도 내일도 너의 삶과 생활을 응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