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992.7

다툼과 화해, 김밥가게와 집안일

by 던다

1992년 2월 중학교 입학 전 생리를 시작했다. 어색하고 뻣뻣한 초록색 교복과 두꺼운 검정 스타킹, 검정 구두를 신고 중학생이 되었다.


나의 생활 반경은 4개 동이었던 아파트 단지, 1.5km 거리의 중학교와 일요일에 갔던 성당 정도였다. 학원은 다니지 않았다. 학교에서나 어른들에게 글쓰기에 대해 별다른 칭찬을 받진 못했지만 나의 일기는 어느 때보다 생동감이 느껴진다. ‘배운 대로 들은 대로‘ 생활한다라는 철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듯했던 어린이였던 나는 청소년이 되면서 아주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적어도 일기에 있어서는 더 수다스러워졌다. 또, 남자애들 없는 학교가 편했다. 작은 아줌마들처럼 왁자지껄하게 교실에서 생활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중1 때는 방학 때만 일기를 썼다. 숙제가 아닌 순수하게 원해서 쓴 일기다.


1992. 7. 11

초등학교 5.6학년, 중학교 1 때가 여자아이들의 친구관계가 가장 미묘하고 신경전이 많을 때 같다. 겉으로는 잘 어울려 지내는 듯 해도 관계에서 자잘한 흠집이 나고 아물고를 반복했다. 중1 때 가까이 지내던 친구는 영윤이라는 아이였다. 친구는 유복한 집안에 사립초 출신이었고 깍쟁이 같은 느낌이 있었다. (추석 연휴에 -내가 할머니댁에 간다고 고생고생하던 시절 - 도쿄 디즈니랜드에 가족들끼리만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문화충격을 받은 기억이 생생하다.) 엿튼 나와는 어쩌다 등하교를 했지만 영윤이는 수경이라는 같은 사립초 출신 친구와 훨씬 더 친했고, 같은 반에서도 나 이외의 인싸친구들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 했다. 나는 자격지심인지 내가 공부를 못해서, 내가 옷차림이 후줄근해서 그런가 속상해했다. 일기에서처럼 소외감을 느끼는 때에는 주로 쪽지나 편지처럼 글로 표현했다. 그러면 내가 떨리고 분해서 하지 못했던 말을 용기 내서 할 수 있었고, 신기하게 상대도 대부분 수긍했다.


분명히 그런 성장기를 다 보냈는데도 중학생 여자아이들의 관계에서의 갈등을 보며 머리를 질끈 싸매며 ‘도대체 왜 그렇게 서툰 거냐.‘ 이해가 어려울 때가 있다.

많은 부분 연애처럼 서로의 작대기가 연결되지 않거나 둘이 서로를 원하는 강도가 비슷하지 않아서, 서로에게 끌리는 매력의 정도가 달라서 그런 것 같다. 거절당하고 멀어지는 일은 관계에서 필연적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관계의 핵심 아닐까 싶다.


엄마는 내가 중1-2 때 아파트 상가에서 작은 김밥가게를 하셨다. 좌석은 5-6개가 전부인 아주 작은 가게였다. 같은 상가에 이렇다 할 분식점이나 식당이 없어서 장사가 꽤나 잘 됐다. 메뉴는 1600원인가 했던 김밥과 우동. 딱 2개였다. 김밥에는 고기가 들어가지 않았고 대신 유부를 설탕과 간장에 조려 길게 잘라 넣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체육처럼 일종의 비건 김밥 아니었을까.


당시 부모님은 지금의 내 나이 40대 중반이었다. 아버지는 건실한 회사에 다니셨지만 언제 그만둬야 할지 모르는 위기감이 있었던 것 같다. 40대 후반에 자의든 타의든 그만두는 경우도 많으니 그런 압박의 시기를 보내고 계셨던 것 같다. 엄마는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가게를 알아보던 중 시기가 잘 맞아 가게를

시작하셨다.


92년 여름은 엄마에게 가게운영과 살림의 병행을 적응을 하던 시기였다. 중1 때 나는 엄마를 도와 빨래 널고, 빨래 개고, 설거지를 했다니 대단하다. 엄마의 저 다다다다 내리꽂는 주문이 너무나 익숙하다. 아 엄마들이 왜 저렇게 틈도 없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사라지는지.‘엄마 시간 없으니까, 엄마 너무 바쁘니까. 엄마 너무 힘드니까 ‘ 이런 말들도 너무 이해가 된다. 나도 몇 년 전에는 그러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 관뒀다. 그냥 체념하고 남편과 내가 다 한다. 한 명은 월화수목금 넘쳐나는 학원 숙제로 바빠서, 다른 한 명은 개구리 사업으로 먹고 자는 것도 벅차서 감히 요청하지 못한다. 그나마 학원 숙제로 바쁜 딸에게 고양이 화장실 청소를 시키고 싶지만 딸에게만 시키는 것도, 말 잘 듣는 쪽에 싫은 일을 더 시키는 것도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 거두어버렸다. 그래도 계속 고민 중이다.

이 날은 쓸 말이 없어서인지 무슨 일이어서인지 이렇게 인증도장 찍고 가듯 한 마디만 적어놨다.


그 시절 지금은 재개발로 없어져버린 복도식 아파트 1층에 살았다. 우리 집엔 선풍기 같은 냉방용품이 없어서 여름 내내 집에 문이란 문은 다 열고 지냈다. 집 바로 앞에 경비실이 있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라 프라이버시는 개나 줘버리는 그런 환경이었다. 봄에는 안 방 바로 앞에 목련이 폈고, 여름에는 찌르는듯한 매미 소리가 들렸다. 92년 7-8월 무더위와 매미소리와 함께 나는 공부보단 집안일을 하며 한가하게 여름을 나고 있었다.


중학생이 된 던다야.

점점 그때의 기억이 또렷해진다. 어린이보단 청소년이 지금의 나와 비슷하니까 더 반갑다고나 할까.
부모로서는 어떤 인생의 절정기와 위기를 동시에 맞고 계셨던 것 같아. 직위나 돈벌이 차원에서가 아니라 왕성히 일하던 때라고 해야 하나.

그즈음 드디어 갖게 된 작은 방에서, 드디어 갖게 된 중고 침대에서 생활하면서 그때는 잘 몰랐던 행복을 누리며 살았구나. 지금의 내 자녀가 모르는 것처럼 그때의 던다도 부모가 가정을 떠받치며 생활하는 덕에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은 모를 때였지. 그건 무척 알기 힘든 부분이니까.
어떤 방법으로든 마음을 표현하고, 너의 세계를
지키며 사는 모습이 이쁘다.

엇나가려야 엇나갈 수 없는
바르고 고운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던다야.
별다른 상장과 칭찬이 없어도 넌 아주 잘 살고 있어. 중학생이 된 걸 축하해.

























keyword
토, 일 연재
이전 19화19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