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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7

얄미운 친구, 스파르타 고모네집

by 던다

91년

나는 6학년이 되었다.

여전히 조용한 아이였지만 5학년 때 글짓기상을 받은 이후에 나의 입지가 조금 생겨서 선생님께 인정받는 학생이 되었다. 더군다나 5, 6학년은 담임선생님이 같아서 두 개 학년이 하나의 학년처럼 기억이 난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못된 사람을 피해왔다. 누구나 선하고 악한마음 모두 갖고 있지만 미의 기준이 없다 해도 딱 보면 예쁘다는 느낌이 있듯이 전반적으로 좀 더 이기적이고 남에게 함부로 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을 예민하게 판별했다. 다 자라서 엄마들끼리 만날 때도, 내가 자녀의 친구들을 볼 때도, 물론 남자친구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이 못된 사람 판별 레이더는 가열차게 돌아갔다.

일기를 보다 보니 나를 방어할 방법을 몰랐던 시절 내가 못된 사람에게 치인 경험이 머릿속 어딘가에 박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찬주는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 기질이 좀 억세고 좀 어벙벙한 면이 있는 아이였다. 찬주 엄마와 그 집 딸들은 예쁜 것, 꾸미는 것을 좋아한 걸로 기억한다. 한편 나는 당시 몽실언니 같은 단발머리에 옷차림도 수더분했고 성격도 온순했다. 그다지 맞는 게 없었는데 등하굣길이 같아 몇 번 같이 오갔던 것 같다.


이 날은 찬주가 자기가 잘못해 놓고 나에게 생짜증을 내는 상황이다. 지금이라면 차갑고 강한 눈빛으로 “야. 말은 바로 해야지. 너 도와준다고 잡아줬잖아 쏟은 건 너잖아 너.” 쏘아붙였을 것이다. 그때처럼 바보같이 미안하다고 당황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로 같은 중학교 같은 반이 또 된 적이 있었다. 찬주는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는 앞자리에 앉아 초등학교 때의 나에게 하듯 국어 선생님께 말도 안 되는 짜증과 앙탈을 부렸다. 30대 초반이었던 앙칼진 여자선생님이 “얻다 대고 집에서 엄마한테나 하는 짜증을 여기서 부리고 있어!”하고 꽥 소리를 질렀다. 그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이제 와서야 그렇게 나 대신 직언해 준 선생님이 사뭇 감사하다.

(찬주 지금은 많이 성숙하게 잘 살아가고 있기를.)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 미안해할 줄 알고 고마워할 줄 아난 사람이 되라고 아이들에게 말하곤 한다. 물론 아름다운 세상과 관계를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이다. 그와 동시에 유한 아이들에게는 그에 못지않게 너의 정체성과 바운더리를 지키기 위해 최대한 피해라. 그러다 힘이 생기면 소리를 질러라. 너를 지켜줄 무리를 찾아 숨어라.라고 말하겠다.


그런 연유로 지금도 못된 사람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라고 열심히 피하고 양 같은 사람들과 연대하며 악의 무리를 감당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아버지는 팔 남매의 둘째 아들이었다. 위로는 아들 넷, 아래로는 쌍을 이루듯 딸 넷이었다. 그러니 나에게는 고모가 넷이나 있었다. 고모들 모두 학교 다닐 때 성적이 꽤 좋았으나 그 시절 어느 집이나 그렇듯 막내 고모만 간신히 국립대에 가고 세 고모는 대학을 가지 못했다. 하지만 자녀에 대한 교육열은 다들 대단했다.


특히나 큰고모는 자녀 공부에 있어 그 선봉에 서서 가장 강력하게 시키고 또 가장 확실하게 결과를 이끌어냈다. 일기에 나오는 저 날에도 나랑 나와 동갑인 사촌은 별생각 없이 고모집에 놀러 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실제 벌어진 일은

여느 친적집에 놀러 간 그런 일정이 전혀 아니었다.


고모 집에서 일박을 하고 다음 날.

새벽이라 기억되는

이른 시각에 일어났다. 밥 먹기 전에 사촌동생들과 밖에 나가서 운동을 하고 들어와야 했다. 밥을 먹고 야구르크 같은 것으로 후식을 먹고.

방학숙제인지 책 읽기인지 공부라 할만한 것을 1-2시간 했다. 고모는 계속 집안일을 하면서 큰 딸(편의상 ‘재희’라고 하자)을 수시로 불렀다.

“재희야 구구단 2단부터 12단까지 앞으로 뒤로 2번씩 외워봐” 하면 재희는 고모 앞에서 줄줄줄줄 외웠다. (뒤로도 외우다니!)

“재희야 피아노 학원 가기 전에 배웠던 것 10번씩 쳐라” 그러면 또 재희는 익숙한 듯 피아노를 횟수만큼 쳤다. 고모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거기 틀린 부분. 거기만 5번 더 쳐라” 그런 식이었다.


그렇게 오전을 보내면 식사를 하고 이어서 독서 시간엔 진짜로 독서를 했고, 수학시간엔 진짜 수학공부를 했다. 중간중간 과일을 깎아 주시기도 하고, 잠깐 자리를 비우기도 했지만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 어린이들은 완전히 퍼져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단 일분도 없었다. (있어도 계획하에 20분 TV시청. 그런 식이었다.) 순수하게 놀러 온 줄 알았던 나와 동갑인 사촌은 어리둥절해하면서 힘겹게 그 스케줄을 따랐다.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 재희는 그런 삶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그리고 고모네 집을 떠날 때는 사법연수원이라도 퇴소하는 기분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고모네 집은 숙식제공, 관리형 독서실이자 스파르타 기숙학원이었다. 배우는 것을 학습이라고 할 때 고모는 집 밖에서는 ‘학‘을, 집에서는 철저히 ‘습‘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엄청난 재주가 있었다.


그 이후에 재희가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더욱 박차를 가해 잠시 우리 집(외삼촌집)에 놀러 올 때도 공부할 거리를 보따리로 싸매고 와서 내 방 책상에서 공부를 하곤 했다. 재희도 상당히 영특했던 것 같고 그에 못지않고 큰고모는 어마무시하게 타이트하고 집요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재희는 다들 부러워마지않는 s대 의예과에 입학하여 집안 최대의 학벌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한편 대단한 우리 큰고모는 두 딸의 입시 만루홈런을

치고 입시 메이저리그인 대치동에서 학원상담실장이 되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후에 원장이 되어 20년 가까이 일했으니 수완도 체력도 대단했다.


고모얘기로 깊이 빠져버렸지만 6학년의 나는 여전히 공부란 것은 잘 모르고 잔잔히 사람들 사이에 치이면 치이는 대로, 숙제는 숙제대로 착실히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단, 6학년의 일기장에서 발견된 것은 찬주 이야기처럼 억울하고 속상하고 화가 나는 일들이 꽤 나온다. 아마도 그즈음부터 속으로 화를 내고 일기장에 적극적으로 풀어냈던 것 같다. 그렇게 화난 마음을 ‘제대로‘ 겉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 30년이 걸린 것 같다.


6학년의 던다야.
지금의 딸과 똑같은 나이였을 때였구나. 거창한 꿈이나 목표는 없었지만 그렇게 한 발 한 발 차분히 살아가고 있었구나. 요즘의 아이들처럼 영어학원, 수학학원, 논술학원에 메이지 않고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복이었던 같아. (또 다른 복은 음반시장 르네상스를 산 것)

친구끼리, 가족에서, 동네에서 못마땅한 일들이 점점 더 잘 보이게 될 거야. 그게 어쩌면 사춘기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던다 너는 그만하면 큰 탈 없이 지내게 될 테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할 수 있게 적어놓은 건 참 잘한 일이야. 그게 꼭 좋은 일이 아니래도 다시 생각하고 조심할 수 있고 다른 면으로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점점 피고 있는 봉오리 같은 던다야.
오늘도 응원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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